죽음보다, 한 사람의 생존과 고통을

2020.07.11 23:10

Sonny 조회 수:1142

강남순 교수의 "열광적 '순결주의'의 테러리즘"을 읽고


1. 성폭력 사건을 어떻게 읽어야할까. 그 출발지와 도착지는 저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가해자 남성이 권력과 인망이 있는 경우 예외없이 하나의 공식으로 결정된다. 이야기의 시작은 훌륭하고 위대했던 어느 남자 A다. 이야기의 끝은 훌륭하고 위대했던 어느 남자 A다. 성폭력 사건은 어떤 남자의 이야기로 완결된다. 이제는 완전히 장르화된 이 성폭력 스토리의 정형성 안에서 피해자 여성 A는 사라진다. 그야말로 흔적도 없이 소멸된다. 어찌보면 당연하다. 본디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어찌됐든 "눈여겨봐야함"이라는 가치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라는 이야기의 방식에 앞서 무엇을, 이라는 이야기의 전제부터 여자는 사라진다. 남자 가해자가 잘했느냐 못했느냐, 남자 가해자가 좋은 사람이었냐 나쁜 사람이었냐, 남자 가해자가 생전에는 어떤 사람이었냐, 이 수많은 이야기들은 피해자 여성 A를 비켜간다. 성폭력 사실을 제외한 성폭력 가해자 남성의 인생 전체가 성폭력 가해자 남성 A의 해석에 동원된다. 동일한 방식의 시점과 해석은 피해자 여성 A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강남순 교수의 글도 이 공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2. 이 공식의 무서운 점은 성폭력 사건의 용의자 남성 A가 가해자 남성 A로 진실이 밝혀졌을 때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 전까지 성폭력 사건의 주인공은 철저하게 피해자 여성 A가 된다. 그의 평소 행실은 어떠했고 그가 얼마나 사악했으며 그의 진술에 어떤 헛점이 있는지 회를 뜨는 수준으로 파헤쳐지는 동안 용의자 남성 A는 관심에서 비켜나있다. 그러다가 가해자로 확정이 되면 그의 복합적이고 또 다른 면모를 들여다보느라 정신이 없다. 그러니까 이 공식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성폭력 가해 남성의 가해 사실을 시야 밖으로 밀어내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해자 남성 A가 무엇을 어떻게 해서 여성 A에게 성폭력을 행사했는지는 절대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성폭력에 대한 객관적 해석의 불가능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된다. 처음에는 여자의 부덕과 거짓을 의심하는 시선에서, 그 다음에는 남자의 덕과 선행을 재조명하는 시선으로 옮겨간다. 강남순 교수의 글에서 피해여성 A는 등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끝난 사건이니까. 피해자 여성이 등장하기에는 이미 진실이 밝혀진 사건이라 등장할 타이밍도 없는 것이다. 내가 만약 과장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강남순 교수의 글을 정독해보길 바란다. 피해자 여성 A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객체조차 되지 못한다. 


3. 나는 성폭력 사건이 장르화되었다고 일부러 표현했다. 장르화가 되었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픽셔널하게 고쳐지고 기승전결이 부여되며 그 등장인물에게 공감하거나 반동하는 식의 감정적 반응을 일으키는 서사를 목적으로 무언가 변형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즉 드라마다. 주인공이 있고, 어떤 사건이 있고, 그 사건의 전후를 다룬 또 다른 사건들이 있다. 그런데 이 드라마 속에서 여자가 등장하질 않는다. 이것을 영화라고 생각해보면 카메라는 계속해서 그 남자의 얼굴과 전신만을 비추고 있다는 뜻이다. 양쪽의 입장이 나눠져있는 사건이 있다면 양쪽의 입장을 공평하게 다루는 것이 객관이 시작되는 첫걸음이다. 그런데 이 걸음마를 포기한 채로 수많은 서사들이 가해자 남성 A를 위해 복무한다. 이쯤되면 나는 오히려 의심하게 된다. 이 세계 자체가 남성이라서, 그 모든 서사를 자서전으로 쓰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의심을 품고 여자 A의 존재를 찾는 나나 다른 사람이 이상한 것은 아닌지. 강남순 교수의 글을 다시 한번 읽어봐도 피해자 여성의 자리는 없다. 그림자 한 조각 없는 이 완벽한 맥락의 삭제가 어떻게 존재를 제치고 가능한지 자문해보다가 역으로 성폭력을 당하기 전부터 말살된 존재들이 "감히" 지워진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호출해낼 수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다시 한번 곱씹게 된다. 보이지 않았던 불꽃을 이어받아 서지혜 검사가 들어올리고 줄줄이 건네받아 김지은씨와 박원순 성추행 사건의 피해자 여자 A는 지금 어떻게 고발을 해낸 것인가. 고발을 한 후, 유죄가 증명이 되었는데도 이처럼 깨끗하게 소거가 되어버리는데. 불을 꺼트리는 방식이 아니라 태양을 띄우고 세상을 대낮으로 만들어서 그 불꽃을 삼켜버리는 이 찬란한 휴머니즘 앞에서, 성폭력 피해자 여자들의 존재는 어떻게 타오를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나마 서지혜와 김지은은 목숨을 걸고 고유명사화되었다. 정말이지 온 몸을 던져서 부싯돌처럼 불을 일으키고 그 불씨를 자기 존재의 업화로 옮겨받은 다른 여자들과의 공생이 일으킨 기적이다. 박원순 앞에서 피해여성 A는 고유명사가 되지 못하고 있다. 존재에 존재로 부딪혀 존재함을 알린 이들에 비해 박원순이라는 "고유명사" 앞에서 피해자 여성 A는 강남순 교수와 다른 이들의 글에서 끝없이 말살당하거나 예언된 잿더미로서의 실천을 당해마땅한 고유명사로서만 존재한다.


https://theqoo.net/square/665961440


4. 강남순 교수는 이분법을 지적하고 있다. 내가 그의 지적에서 의아하게 여기는 것은 그가 "성폭력"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상화와 악마화를 지양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이상, 악마라는 추상적 상태로 구체적 행위와 결과를 뭉그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왜 어떤 개인이 천사도 악마도 아닌 복합적 존재인지, 그 복합이라는 상태를 이루는 행위들을 세세히 따져보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오히려 강남순 교수가 이분법을 지적해야 할 대상이 이상화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아닌지 지적하고 싶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계속해서 박원순이 무엇을 이룩했고 어떤 구체적 공공선을 실천했는지 이야기하면서 그의 성추행과 무책임한 도피에 대해서는 구체적 언급을 아예 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원순을 복합적인 인간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이 사람들은 성추행 가해 이전의 사실들은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만 그 이후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피하고 있다. 박원순이 얼마나 인간적인지는 구체적 서술이 가득한데 박원순이 얼마나 비인간적인지는 구체적 서술의 질과 양이 균형이 맞지 않는다. 


5. 강남순 교수의 이분법에 대해 슬라보예 지젝의 이야기를 좀 끌고 오고 싶다. "저는 여성을 강간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논쟁해야 하는 사회에 살고 싶지 않습니다. (...) 저는 강간이 역겹고 정신나간 짓이라고 여겨지는 그러한 사회에 살고 싶습니다." 지젝은 어떤 행위나 결과가 인간의 복합성을 논의하기에 무의미할만큼 선명한 악의 스펙트럼 끝자락에 위치해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현재 문명국가들 중 어느 국가도 강간을 허용하거나 그것이 올바른 일이라고 하지 않는다. 강간을 성폭력으로 치환해도 큰 무리가 없다면 대한민국 국민들이 박원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지점은 복합적인 해석이 나올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는 것에 모두 동의할 것이다. 여기서 박원순을 비판하는 이들이 말하는 것은 사회의 합의와 가장 기초적인 인권에 따라 박원순이 저지른 성추행을 비판의 여지가 없는 만큼 비판하자는 것이다. 사람들은 박원순을 성추행범 박원순이라 부르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복합성에서 인간성을 넘어간 저 너머의 "인간적으로 복합적인" 지점이니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악마화이고, 어디까지는 악마화가 아닌 정당한 비판인가. 강남순 교수의 글에는 박원순의 성추행에 대한 이런 구체적 기준이 제시되지 않는다. 박원순을 비판하는 모든 사람들이 악마화를 꾀화는 비인간적 집단이고, 이상화를 꾀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는 세계의 풍경만이 제시될 뿐이다.


6. 강남순 교수가 이야기하는 순수주의에의 열망은 과연 성추행범을 성추행범으로 부르고자 하는 이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혐의인가. 강남순 교수가 빠트리고 있는 것은 그 순수주의가 항상 권력과 결부되어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자국민의 권력, 인종의 권력, 이성애자의 권력 등 어떤 식으로든 "다수"와 "정상성"이라는 폭력적 관념이 그 순수를 지향하며 생긴다. 이것은 순수라기보다는 권력지향의 이야기다. 지금 박원순의 성추행을 성추행이라 부르는 이들은 다수와 정상성이라는 개념 무엇을 등에 없고 어떤 복합성을 말살하고 있는가. 순수주의에의 열망을 성별로 이야기한다면 압도적으로, 그 어느 나라나 인종을 초월해서 남성이라는 집단이 순수를 추구했다. 남성만이 순수한 인간이고 권력자일 수 있다는 그 믿음이 성추행을 가능케하는 원동력이다. 지금 박원순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남성만이 섹슈얼리티의 주인이자 지배자라는 그 순수주의에의 열망에 저항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도덕의 순수주의와 어떤 상관이 있나.


7. 강남순 교수는 본인이 지향하는 철학적 순수를 철학자 개개인의 불완전한 면모들과 실패한 철학적 영역들에서 어렵사리 극복했다고 밝힌다. 이 지식의 추구가 과연 시민들이 박원순에게 요구하는 도덕적 "완전성"의 결벽이라고 동치할 수 있는가. 첫번째로, 강남순 교수가 밝히는 지적 탐구는 시민들이 박원순을 비판하며 요구하는 사회적 행위와 동치되지 못한다. 어떤 철학이 윤리적으로 완벽할 수 없다는 것과 누군가 성범죄를 저지르지는 말아야 한다는 의견은 전혀 다른 영역의 이야기다. 전자가 논리적, 합리적 일관성의 실패를 경험하는 "불완전한" 부분이라면 후자는 절대 저질러서는 안되는 도덕의 실패로서 "금기"의 영역이다. 지식을 받아들이는 데는 불완전한 부분을 빼고 받아들일 수 있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그리스 철학자들을 그렇게 일단 수용하고 다시 페미니즘의 영역에서 재생산하고자 한다. 박원순은, 어떤 교과서나 지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살아있는 인간이고 공직자다. 이 점에서 그는 덜거나 뺄 수가 없는 하나의 완성된 개체이다. 그리고 그가 오염된 지점은 학술적으로 잘못된 주장을 하고 죽어서 개념만이 남아있는 상태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폭력을 그의 육신을 가지고 유물론적으로 실천을 했다는 지점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살아있는 박원순이 살아있는 여자에게 저지른 성추행을, 살아있는 사람들간의 약속인 법과 도덕으로 심판하고자 한다. 이것을 왜 시민들이 강남순 교수가 "오염된" 철학자들을 받아들이듯 이해하고 받아들여야하는가. 목적의 방향과 대상이 완전히 다른데 이것을 인간의 이해라고 엮을 수 있는 것일까.


8. 두번째로, 강남순 교수는 과거의 인물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과거를 이야기할 때 그 시대적 한계를 감안한다. 박원순은 과거의 인물인가. 그는 오히려 과거에 머물러있던 도덕적, 사회적 합의를 깨부수고 더 멀리 나아가 많은 시민의 인권을 신장시킨 인물이다. 그런 인물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 왜 강남순 교수는 몇백년전의 인물들의 필연적인 도덕적 실패를 가지고 오는 것일까. 박원순이 칸트와 같은 시대의 사람이었다면 그의 성추행은 그 시대 인물들의 어쩔 수 없는 한계로 쓴웃음을 짓고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는 현재의 인물이 저지른 현재의 폭력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기에 박원순의 현대적인 성추행을 현대인의 관점에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악마화인가?


9. 강남순 교수가 말한 "칸트와 함께 칸트를 넘어서 생각하기"의 개념을 지금 실천하는 것은 다름아닌 박원순 비판자들이다. 박원순이 개념의 정립에 큰 공을 세웠던 "성희롱"이라는 죄목을 가지고 박원순이라는 인물의 성추행을 비판하면서 그의 오점을 그의 업적으로 넘어서고자 한다. 박원순을 비판하는 이들은 박원순을 분석적 도구로 차용하고 있다. 한 사람의 삶이 한두가지 표지로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은, 박원순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가장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부분이다. 오히려 박원순에게서 성추행범의 면모를 덜어내고 그를 한가지 표식으로만 기억하려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박원순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단 한명도 그의 성취나 업적을 부정하지 않는다.


10.  강남순 교수는 죽음을 이해 너머의 것으로 정의내린다. 어떤 죽음은 그렇다. 어떤 죽음의 깊이는 그렇다. 우리는 슬픈 것까지는 상상할 수 있지만 그 괴로움의 정도나 양상에 대해서는 다차원적인 정확성을 나와의 동일성을 근거로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복합성은 나와 완전히 같지는 않을 것이라는 개별성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내가 상상도 할 수 없고 내가 전혀 짐작도 못할 불가해(incomprehensible)의 영역에 놓였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은 복합적인 존재이되 그 복합성을 크거나 작게 교집합을 만들며 살아가는 사회적 "동질성"을 전제한 존재이기도 하다. 동질하다는 것과 동일하다는 말을 의도적으로 달리 써서는 안된다. 우리는 누구도 박원순의 절망을 정확히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대략적으로는 상상할 수 있다. 성추행을 하다가 발뺌하지 못할 것이라는 상상 끝에 오는 수치와 공포는, 다들 상상은 할 수 있다. 강남순 교수는 어느 정도까지의 정확성을 요구하며 박원순의 자살을 인식하라는 것인가. 이해 너머에 있는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고통과 다른 사람들의 엇비슷한 고통을 통합해서 부정확하게나마 한 덩어리를 만들어 감정적 추론을 시도하지 않는가. 그것이 복합적인 인간성이 품고 있는 또 다른 아름다움 아닌가? 왜 그것이 살아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할 때에는 전적으로 불가능한 무엇이 되어 감히 상상도 하지 말고 해석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되는 것일까?


11. 강남순 교수는 매 죽음이 세계의 종국이라는 데리다의 말을 인용한다. 나는 안타깝게도 여기에 걸맞는 페미니스트 철학자의 말을 인용할 수가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살아있는 매 순간이 세계의 위기라는 말을 하고 싶다. 나는 이것을 단순한 비아냥의 의도가 아니라 박원순의 성추행 피해자를 상상하며 이야기하고 있다. 박원순의 속옷차림 사진을 받고, 박원순의 접촉을 당하고, 박원순의 성적 농담을 들어야 했던 그 피해자 여성의 매 순간들을 소환하고 있다. 한 인간의 존엄은 그 자체로 세계다. 파손된 존엄은 연속된 종국을 초래한다. 강남순 교수는 죽음 속에서 안식을 찾아낸 망자의 완전성이 아니라, 위태롭게 종국을 맞이하는 한 세계의 종국을 막기 위한 것이 우선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지금도 어떤 세계는 끝을 맞이하지도 못한 채, 균열이 가있는 상태로 존재한다. 끝나지 못한 채로 끝이라는 완결을 바라는 세계들을, 강남순 교수는 "한꺼번에" 볼 수 있어야 한다.


12. 강남순 교수가 인간의 복잡성을 외면한 채 본 "파안대소"하는 얼굴들에서 나는 다른 것을 본다. 손정우와 안희정에 화를 내다 지쳐 이제 분노를 소진한 이들이 터트리는 정신질환적인 웃음이다. 남성들이 공포를 느낄 때만 말하는 "여자의 한"이라는 것은 눈물이 아니라 웃음에서 가장 드러나지 않았던가. 악마화를 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미친 여자는 울지 않는다. 미친 여자는 무서운 게 없다는 듯이 웃으며 돌아다닌다. 부조리가 상식을 넘어서 연속될 때 인간은 웃음으로 대항한다. 울거나 화를 내는 것은 정신력을 너무나 크게 소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파안대소에서 여자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복합적일 수 있는지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이 현대 사회가 던지는 복합적 인간성의 과제이다. 인간이 복합적이기 때문에 죽음도 복합적이다. 어떤 여자들은 "그 다음을 이어서" "세계를 위해 해나가야 할 일"을 상상하지 못한다. 한 개인이라는 존엄이 박살나있기 때문에. 그리고 가해자 남자의 우주에 삼켜지기 때문에.


13. 강남순 교수는 인간의 권리가 확장되는 서울과 한국을 이야기한다. 어떤 사람들은 서울과 한국에서 권리가 파괴되어가는 인간을 이야기한다. 그의 거시적이고 원대한 시선은 무엇을 발판삼아 확보한 시야인가. 밟혀왔던 인간, 아니 여자들이 이야기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소외되고, 한국 정치사에서 지워진 그 여자들이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순수한 사람을 바라지 않는다고. 우리는 우리를 인간으로 보고 성범죄만큼은 안저지르길 바라는 사람을 바랄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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