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개인으로 살기

2019.01.01 10:30

어디로갈까 조회 수:1169

 1. 세상에 저와 같은 사람만 있었다면, 이 추위를 견디게 해주는 난방기나 여름에 얼음을 만드는 냉동고,  거대한 몸체로 고공을 나는 비행기 따위는 인류의 역사에 등장할 수 없었을 거에요.
그렇지만 세상에 저와 같은 사람만 있었더라도, 인류가 생활의 방편이 없어서 멸절했을 것 같지는 않아요.
훨씬 덜 스펙터클하고 덜 재미있는 삶이었겠지만, 아마도 인류는 식탁과 침대 정도는 갖출 수 있었을 것이고, 아마도 해 뜨는 방향과 해 지는 방향 정도는 살폈을 것이고, 아마도 대부분의 시간을 턱을 괴고 앉아 이런저런 생각에 조용히 정신을 빼앗기다가 갔을 거에요.

그러나 인류는 저와는 다른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기에 저는 남들이 만든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고, 귀로는 수십 년 전 카잘스가 연주한 바흐를, 눈으로는 인터넷을 통해 오늘 하루 세계에서 일어난 시시콜콜한 뉴스들을 접하고 앉아 있습니다.
고마운 일이죠. 하지만 어떤 기술과학만은 끝내 거부하며 살다 가고 싶습니다.
가령 저는 휴대폰을 정당하게 없앨 궁리를 하루에도 몇번 씩 하곤해요.  이 생각을 슬핏 드러낼 때마다 이기적이라는 비난 폭탄이 쏟아지죠.
몇년 전 휴대폰 구입을 미루고 미루다 상사 한 분으로부터 폰을 구입할래, 사표를 쓸래, 라는 협박까지 받아봤답니다. 
하지만 뭐, 소신 있는 미개인으로 사는 것도 나름대로 주제가 뚜렷한 삶이라고 생각하며 여러 부분에서 꿋꿋히 버티며 살고 있어요.

조금 전, 선물로 받아 사용하던  쥬서기가 그 명을 다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다시 장만할 생각은 장난으로도 하지 않을 거니까, 제 삶에서 확실히 하나의 문명이 사라져버린 것이죠.

 
2. 새벽에 BBC가 제작한 '새의 사계'에 관한 다큐필름 파일을 보게 됐어요. 
새들의 여러 속성을 보여줬는데, 그 중 하나가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미 매가 자리를 비운 틈에 어미 어치(jay)가 매의 둥지를 습격하여 새끼들을 다 죽여놓고 가는 장면이었어요.
해설에 따르면, 매의 새끼가 크면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것을 예상하고, 어치가 미리 화근을 제거하는 일종의 방어본능이라더군요.
매는 다른 새들을 압도하는 사나운 새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 장면은 말할 수 없이 놀라웠습니다. 
한참을 생각해도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그런 장면이었어요.
인간의 삶만 그런 게 아니라, 생태계는 역설과 아이러니, 집착과 맹목으로 흘러가고 있는가 봅니다. 
세계는 무겁고 깊어요. 언제, 어디에서 의미의 반전이 일어날지 짐작할 수 없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2419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08803
111076 이자즈민 정의당 입당 [38] 사팍 2019.11.04 1257
111075 날씨의 아이 큰 스크린으로 못본게 아쉽네요 [2] 파에 2019.11.04 413
111074 진중권 전라인민공화국에 대한 궁금증 [21] 도청이본질 2019.11.04 1157
111073 터미네이터 다크페이트 잡담.. [11] 폴라포 2019.11.03 760
111072 탑텐 의류 후기, 순항 중인 기생충과 아시아 영화판 잡설 [16] 보들이 2019.11.03 1081
111071 [바낭] 사우어크라우트 후기, 무김치들 담기 [4] 칼리토 2019.11.03 460
111070 스포] 방탕일기, 잭 라이언, 우리는 모두 봉준호의 세계에 살고 있다 [22] 겨자 2019.11.03 1162
111069 [바낭] 다들 로망의 지름품 하나 쯤은 있지 않으십니꽈 [34] 로이배티 2019.11.03 971
111068 터미네이터 다크페이트(스포일러) [4] 메피스토 2019.11.03 515
111067 [KBS1다큐] 더 플래닛스(The Planets, 2019) [2] underground 2019.11.03 2311
111066 26살 틸다 스윈튼 [1] 가끔영화 2019.11.03 741
111065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 [10] 어디로갈까 2019.11.03 900
111064 [넷플릭스] 데렌 브라운의 종말과 공포를 보고 있습니다 [6] 노리 2019.11.03 627
111063 이런저런 일기...(여혐, 제보자) [3] 안유미 2019.11.03 561
111062 잡담 아래 옛게시판 포함 게시글 사진이 보이는데 [1] 가끔영화 2019.11.02 354
111061 넷플릭스 Living with yourself.. 음.. [9] 포도밭 2019.11.02 588
111060 인도네시아 영화 레이드 말고 본 살인자 말리나의 4막극(스포일러 있음) 가끔영화 2019.11.02 216
111059 오늘 밤 8시 5분 시사기획 창 - 오지않는 청년의 시간 예정수 2019.11.02 397
111058 공무원 내년 3만여명 채용한다..29년 만에 최대 [18] Joseph 2019.11.02 1344
111057 [게임판바낭] 팝콘 씹으며 구경하는 즐거운 '데스스트랜딩' 메타 리뷰 사태 [12] 로이배티 2019.11.02 589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