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내린 눈

2019.02.20 04:33

어디로갈까 조회 수:972

아침.
세상의 모든 모서리를 허물며 눈이 내렸어요.
눈, 눈, 다정하고 가혹한 눈. 

출근 길, 동쪽 하늘 10시 5분 방향에서 불거져 
잿빛 침묵으로 드넓게 퍼져 나아가던 1초, 2초, 3초의 적막. 
기록해요, 눈에 대한 오랜 반감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어떤 입구를 보았음을.
추락하는 비행체처럼 뜻없이 내리꽂히던 도무지 겨를도 없던 절망적인 아름다움.

오후.
마음의 중심을 둘로 가르며 여전히 눈이 내렸어요.
맑은 날 단골 카페에 가면, 제 커피에는 항상 눈을 조금씩 섞어주죠.
저는 매번 모른다는 표정으로, 커피 속에 번진 눈을 받아 마셔왔어요.
어젠 눈 대신 커피 아래로 흰 구름 하나 흐르고 있더군요.
잿빛 하늘에서 비올라 소리가 나고, 길들이 상하좌우로 울렁이고, 
건물들이 클클대며 수런거리고, 나뭇가지들이 시적인 암호를 주고 받은 건
커피 때문이었어요. 눈이 섞이지 않은 커피는 감각체계를 교란시켜요.

밤.
광속으로 달아나는 희망처럼 눈이 그쳤어요.
길은 꿈결처럼 일렁이고 마른 불빛들은 아름다웠습니다.
낮에 제게 온 기별은 서류, 서류, 서류 뿐이었는데,
눈 쌓인 밤의 거리에서 저는 온 세상의 편지를 읽는 기분이었어요.
피곤하고 귀가가 급했기에 눈 덮힌 길의 밤 운전자들은 신경이 날카로웠죠.
저는 혼자서 느긋하게, 갈 테면 가고 말 테면 말 수도 있다는 듯,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으며 운전을 했어요.

언젠가  어떤 여자는 쓰레기 버리고 온다며 문을 나가서 
수십 년이 지나서야 나타났다죠.
저는 그렇게 집을 나온 것 같기도 했고 
그렇게 나온 집으로 돌아가는 것 같기도 했어요.
정신을 놓고 바라보는 도시의 불빛은 유성처럼 아름다웠습니다.

지금.
그래서 어떤 망각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어요, 
눈이 내리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떠나온 나라가 있는 것 같아요.

덧: 눈내리는 날이면 찾아 읽는 시가 있습니다. 열아홉살 때 처음 이 시를 읽었는데, 눈이 이처럼 아름답게 이미지화된 시를 지금까지 보지 못했어요.

- Thirteen Ways of Looking at a Blackbird / Wallace Stevens

1. 눈 덮힌 스무 개의 산 속에서
  단 하나 움직이는 물체는
  검은새의 눈망울뿐이었다.

2. 세 마리의 검은새가 앉아 있는 나무처럼
  나에겐 세 가지 마음이 있다.

3. 검은새는 가을 바람 속을 선회했다.
  그것은 무언극의 조그만 부분.

4. 남자와 여자는
  하나.
  남자와 여자와 검은새는
  하나.                        

5. 어느 것이 더 좋은지 모르겠다,
  굴절의 아름다움과
  풍자의 아름다움 중에서,
  검은새의 지저귐과
  그 이후 중에서.

6. 고드름이 거친 유리로
  길다란 창을 채웠다.
  검은새 그림자가
  그 창을 가로질렀다, 오락가락하며.
  마음은
  그 그림자 속에서
  헤아릴 길 없는 이유를 더듬었다.

7. 오, 하담의 가녀린 사내들이여,
   당신들은 어찌하여 황금새를 그리고 있는가?
   당신들은 검은새가 어떻게
   여인들의 발치 주위를
   걸어다니는지 보지 못하는가?

 8. 나는 고상한 어조와
   밝고도 불가피한 리듬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도 알고 있지,
   내 아는 바 속에
   검은새가 들어 있음을.

9. 검은새가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그것은 많은 원주 가운데 
   한 원주 테두리를 남겼다.

10. 푸른 빛 속에서 날고 있는
   검은새들을 보면
   목청이 좋은 창녀들까지도
   새 같은 목소리로 외칠 것이다.

11. 그는 코네티컷의 길 위를 가고 있었다.
   유리 마차를 타고.
   그때 공포가 그에게 스며들었다.
   그가 마차 장구의 그림자를
   검은새로 
   잘못 보았던 것이다.

12. 강물은 흐르고,
   검은새는 날고 있음이 틀림없다.

13. 오후 중 저녁무렵이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고,
   계속 내릴 예정이었다.
   검은새는 
   삼나무 가지에 앉아 있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5227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787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2280
123704 케이리그 올스타랑 바르셀로나팀이랑 친선경기를 다음달에 갖는다네요. 메씨도 나올 듯. [5] nishi 2010.07.07 1845
123703 [궁금] 지금 메신저 대화명이 뭐에요? [19] 서리* 2010.07.07 2423
123702 [영작질문드립니다] 당신이 생각하기에 아무리 사소한,,, [2] reading 2010.07.07 1918
123701 [월드컵] 저는 스페인에 걸겠습니다. [26] nishi 2010.07.07 2279
123700 뽕짝을 싫어하진 않아요. 하지만.. [1] hwih 2010.07.07 2252
123699 ebs에서 커피 관련 다큐가 나오고 있어요~~~ [7] 서리* 2010.07.07 2976
123698 페스트푸드 체인점에서 팥빙수를 시켰는데 형편없는 퀄리티로 나왔다면. [10] nishi 2010.07.07 3258
123697 여러 가지... [4] DJUNA 2010.07.07 2978
123696 이상하게 생긴 여자 [12] 차가운 달 2010.07.07 5267
123695 수학좋아하세요? [19] 살구 2010.07.07 2949
123694 전주 번개 소식 늦달 2010.07.07 2044
123693 슈퍼쥬니어는 아이돌의 새 역사를 쓰는군요 [14] art 2010.07.07 5061
123692 정장이야기, 남자 반팔셔츠 추천요 [6] 스르볼 2010.07.07 3593
123691 안암동, 서울쌈냉면 [10] 01410 2010.07.07 3944
123690 대기업 슈퍼마켓의 골목상권진출 [6] 현반아 2010.07.08 2571
123689 술 취한 밤 [4] 러브귤 2010.07.08 1901
123688 무릎팍 강타 편 재밌네요~ [7] 수수께끼 2010.07.08 3699
123687 차두리는 정말 귀엽군요. [7] poem II 2010.07.08 3602
123686 [스압] 심슨 장면 총모음 2010.07.08 1972
123685 심슨 장면 총모음 part2 [2] 2010.07.08 2194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