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가수업 중인 후배가 읽어보고 쓴소리 해달라며 보내준 단편소설 초고를 이틀에 걸쳐 읽었습니다. 
유난히 환멸이란 단어가 자주 등장하더군요.  자연스럽게 든 의문은 환멸幻滅이 절망이 될 정도로, 혹은 자유로움이 될 정도로, 그는 과연 순수한 환幻을 지녀 보았던 것일까? 하는 것이었어요. 환이든 혹은 그 멸滅이든, 그의 글에 있는 건 수사학 정도가 아닐까? 싶은 이 느낌을 솔직하게 말해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하기 어렵네요. - -

- 환과 멸은 진眞을 가정하는 개념입니다. 기실 모든 수사학이 그런 것이죠. 저의 경우에는, 작가가 자신의 수사학의 자의식이 유일무이한 것은 아니며  '이를테면' 이라는 포즈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을 때는  자연스럽게 수용됩니다. 그것이 수사학적 자의식이 지닌 강점이라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수사학의 약점은? 진의 존재 여부의 문제를 진에 대한 인식가능 여부의 문제와 동일시하는 게 도드라져 보일 때라고 할까요. 

- '환멸이 절망스럽거나 혹은 자유로움일 만큼 과연 그는 어느 한시절 순수한 환幻을 지녀 봤을까?'라는 저의 의문도 사실 수사학의 입장에서는 큰 의미가 없는 것이죠.  수사학 내부에서의 이동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 수사학은 수사학의 '밖'을 의식하지 않는 한 잡담에 불과합니다. 자신이 레토릭에 불과함에 절망하는 레토릭만이 레토릭으로서 진실해요. 그 절망의 표정은 아마도 침묵을 닮아있을 거고요. 바꾸어 말하면, 침묵조차 아직은 수사에 불과한 것입니다. 

-  '어떤 생각을 하는가'로 '나'는 다른 사람과 변별되며 작가로서의 퍼스낼리티를 갖게 됩니다. 그런데 '생각'이란 것이 그 자체로 존재의미가 있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드는군요. 삶의 역력한 형식으로 확연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상념만으로는 독자적인, 그런 삶이란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드는 거예요.
만약 보이는 차이가 그대로 존재의 차이, 삶의 차이가 된다면 그건 대단히 쓸쓸한 일입니다. 그건 그야말로 '1차원적 세계'에 머무는 인식이 아닐까요. 다른 차원이 배제된 삶을 산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지루합니다. 지루함을 넘어 두렵습니다.

2.  그에게 감상을 몇마디 전하려니,  아도르노의 성찰이 문득 떠올랐기에  <미니마 모랄리아(한줌의 도덕)>를 뒤적거려봤습니다.
이 책에는 글쓰기에 대한 아도르노의 생각이 산재해 있습니다.  특히 '아포리즘 51'에서 그는 글 속에 살림을 차리는 작가에 대해 말하고 있어요. 이 단상의 맥락은 글쓰기의 다양한 방법에 대한 성찰이지만, 글을 어떻게 쓰는 게 좋은가 따위의 습작 강의를 하는 건 아니에요.  사실 아도르노의 말은 일반화되기에는 너무나 특수하죠.

"작가는 텍스트 속에 살림을 차린다. 종이, 책, 연필, 서류를 방마다 끌고 다니면 무질서가 생겨나듯이 작가는 사유 속에서 그렇게 행동한다. 
그에게는 사유가 가구여서,  안주하는 동안 마음이 편해지기도, 불편해지기도 한다. 그는 사유를 가구처럼 부드럽게 쓸어보기도 하고, 닳을 때까지 쓰기도 하며, 난잡하게 늘어놓기도 하고,  위치를 바꾸어 보기도 하고, 망가뜨리기도 한다."

고향이 없어진 사람에게 글쓰기는 '집'을 짓고 들어가 사는 것과 같은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글을 쓰면서 그는 -옛집에서 그랬듯- 어쩔 수 없이 쓰레기와 잡동사니를 생산해내죠.  그러나 창고가 없기 때문에, 그는 쓰레기를 앞으로 밀쳐두곤 하므로써 결국 주위는 쓰레기로 가득차게 됩니다. 반복, 반복.

- 제가 '아포리즘 51'에서 찾아낸 도토리 같은 메시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중심 모티프가 분명하게 강조되어 있는지 텍스트를 꿰뚫어보라. 글의 '진행'에 사로잡혀, 말하고 싶었던 것을 잊어버리기 쉽다.
2. 사소한 개선이란 없다. 개별적으론 어리석고 고루하게 보이지만, 작은 변화들이 모여서 텍스트의 새로운 수준이 형성된다.
3. 길이가 관건이 아니다. 삭제하는 일에 인색치 말라. 사유의 절제가 충만하고 힘있는 구성에 도움이 된다.

4. 동의어들의 결합은 추악하며 그 사유는 허위로 오해되기 쉽다. (예: '완전히 그리고 아주', '번영과 파멸' '확장하고 깊이 있게')
5. 저속한 사유를 화려한 문체로 장식하는 행위를 삼가라. 무성한 숲이 결코 신성한 숲은 아니다.
6. 어떤 작은 의심도 진지하게 받아들여라. 그것이 전체의 객관적인 무가치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7. 변증법은 극단적인 논리적 결과를 통해 사유를 전환시킨다.
8. 표현 자체의 아름다움은 장식적이고 인위적이며 추악하다. 자신이 생각한 바를 잘 말하는 것이 바로 아름다운 것이다.
9. 고귀하게 작성되는 텍스트는 방직물처럼 촘촘하고, 집중적이며, 명백하고, 견고하다. 그런 텍스트는 하나의 사유가 던지는 불빛을 받아 다른 사유가 빛나기 시작한다.

10. 작가는 텍스트 속에 방을 꾸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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