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를 좋아하던 한 남자

2019.12.27 15:03

Sonny 조회 수: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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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낚시성 제목이죠? 만화책 <사채꾼 우시지마>의 이야기입니다. 이 만화의 완결편을 드디어 보았습니다. 이북으로 꼬박꼬박 보고 있었는데 완결편이 올라온 걸 뒤늦게 확인했습니다.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토끼와 사채꾼의 공생 드라마는 전혀 아니구요. 그냥 저 잔인한 사채꾼의 설정 중 하나가 자기가 키우는 토끼는 애지중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 사람은 아주 악랄한 사채꾼이라서 돈을 받아먹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지 합니다.


전 이 드마라가 21세기를 상징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인간의 허영과 욕망을 꾸짖는 척 하면서 몰락한 인간들의 이야기를 보고 즐기는 경제적 관음 포르노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빠칭코에 빠진 주부나 명품에 중독된 여자등을 주인공으로 삼은 초기 에피소드들은 아무리 현실이어도 그 시점이 지나치게 남성을 위한 가학적 포르노 같았죠. 그러나 권을 거듭할 수록 멍청하고 욕심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로테이션 하는 게 아니라 점점 구조적 모순에 대해 이야기를 해나갔습니다. 빚을 지고 가난해진 인간은 무슨 짓을 해도 그 가난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돈을 꿔주며 우시지마와 일당들은 은행, 기업, 부동산업자, 야쿠자, 다른 사채업자들의 구조적 권력에 대해 설명합니다. 우시지마에게 돈을 빌리는 사람들은 더 이상 어쩌지 못하는 경제적 약자들인데, 그 사람들이 돈을 빌리고 쓰고 또 빌려서 점점 빚더미에 앉게 되는 과정을 보면 이게 그냥 선택의 문제는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작품의 초점은 숨쉴 틈이 없어보이는 고층빌딩 숲이나 건축 중인 건물들, 황량한 놀이터 등 공간을 많이 비춥니다. 단순히 악인과 약자의 세계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이 구조의 영향 아래 돌아간다는 걸 끝없이 상기시키는 미쟝센들이 있습니다.


이 작품을 보면서 제일 걱정했던 것은 주인공인 우시지마가 돈을 빌려주면서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에게 충고나 해대는 일종의 "현자" 역할로 남는 게 아닐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각 인물들이 처한 부조리에서 한발짝 물러서서 "번번히 고마워"하며 이자나 떼어먹고 때로는 히어로 역할도 하고 삶에 대한 조언도 하는 그런 외부의 절대자로 남으면, 그는 그냥 흔한 꼰대가 되고 말지 않습니까. 저는 자신의 안전이 도모된 상태나 권력자의 위치에서 위험이 필연인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어쩌구 저쩌구 하며 선생 노릇을 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딱히 읽고 싶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런 함정을 잘 피해갔습니다. 우시지마의 악행은 그에게 차곡차곡 쌓인 업이 되어 나중에 엄청 크게 돌아옵니다. 그는 몇번이나 죽을 뻔 하고 돈도 날릴 뻔 하고 정말로 인생의 궁지에 몰립니다. 주변 사람들은 다 도망가라고 충고를 하구요. 자본주의의 폭거 속에서 어찌 사채꾼 한명만이 관찰자이자 계속되는 승리자로 남을 수 있겠습니까. 그 또한 경제라는 흐름 속에서 돈을 쥐고 쫓는 한 명의 개인일뿐인데요. 


마지막 에피소드는 다른 누구도 아닌 사채꾼 우시지마 본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그 동안 "이런 사람들이 이런 것 때문에 돈을 빌렸고 그래서 인생이 개박살났대요~" 하면서 우시지마 본인이 넌지시 관전과 설명을 했었다면, 이제 작품은 우시지마 본인을 두고 "이 사람은 이런 것 때문에 사채업에 뛰어들었고 이제 그것 때문에 인생 개박살나게 생겼대요~"하면서 우시지마를 해부대에 올려놓습니다. 그렇게 허영과 욕심을 꾸짖던 우시지마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일상 생활에 무료해하던 인간이었고 어려서부터 야심과 수완이 있었으며 타인에게 잔인해질 수 있는 인간이었습니다. 그가 사채업을 시작할 때부터 이미 커다란 업을 쌓은 채였고 그게 시간이 지나고 다시 돌아와서 그를 그렇게 괴롭게 합니다. 권선징악이라기에는 너무 유치하지만, 자기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시지의 이야기로 최종장을 맺는 게 저는 이 작품의 당연한 귀결이라 생각했습니다.


도덕적인 관점을 떠나서라도 사채꾼 우시지마의 이야기는 우시지마의 이야기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둠의 시장에서 우시지마는 제법 잘 나가는 개인 영세업자 입니다. 그런 그를 위협하는 것은 야쿠자인 다른 조직들 혹은 그와 엇비슷한 다른 영세업자 사채꾼들이나 범죄자들입니다. 갈수록 대기업화되고 중소기업들간의 제살깎아먹기 경쟁이 심화되는 21세기에, 우시지마 본인의 사채업의 존망을 다루는 것이야말로 이 작품이 피해나갈 수 없는 화두였기 때문입니다. 사채 쓰면 인생 망한다고 하는 저 사채업자는, 자기 인생은 과연 망하지 않을 것인가? 마침내 우시지마는 야쿠자 나메리카와에게 무릎을 꿇고 모든 것을 빼앗깁니다. 어둠의 시장에서 "폭력"과 "조직"이라는 자본이 딸리는 이상 영세업자인 사채업자는 절대로 대기업인 야쿠자와 경쟁해서 버틸 수가 없습니다. 우시지마는 이익을 얻기 위해 가진 것 없는 인간들을 악착같이 빨아제낍니다. 그리고 몇만엔 지폐를 뺏어냅니다. 나메리카와는 금융에 눈이 밝은 부하들에게서 최신 정보를 얻고 주가조작을 하고 브로커를 만나고 투자를 합니다. 그래서 몇십억의 이익을 단숨에 냅니다. 늘 양복을 입고 다니는 나메리카와와, 캐쥬얼하게 입고 다니는 우시지마의 의상 차이는 대기업 직원과 자영업자의 대조적인 의상 차이처럼도 보입니다. 우시지마의 패배는 자본주의에서의 절대적인 법칙 하나를 상기시킵니다. 제 아무리 질좋은 노동력이 되고 제 발로 열심히 시장을 뛰어다녀도 자본의 힘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나메리카와도 작중에서 말합니다. "심지어 돈버는 일도 넌 내 발끝에도 못따라와" 돈이 곧 힘이고 돈을 무조건 많이 벌겠다며 악덕을 쌓은들, 한번의 클릭과 투자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사채꾼 우시지마는 뒤쳐진 악덕에 대한 경고인지도 모릅니다. 언젯적 사채업이냐, 그딴 걸로 무슨 야망을 이루겠느냐.


마지막 에필로그는 조금 서두른 감이 있습니다만 그래도 약속된 엔딩을 잘 끌어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감히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우시지마가 바라겠습니까? 그에게는 장렬렬한 죽음도 허락될 수 없습니다. 남들의 인생을 그렇게 몰아갔던만큼 비참하고 쓸쓸하게 죽어야죠. 조금 감상적으로 바라보면 그 수많은 생사의 위기를 넘겨오면서 그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죽음처럼도 보입니다. 자본주의의 세계에서 강한 존재가 되고자 했던 이는 그렇게 수많은 이를 파멸로 이끌었지만 결국 자신은 구하지 못합니다. 그가 그렇게 칼에 찔렸던 까닭은 나메리카와가 입힌 상처 때문이라는 걸 생각하면, 아무리 살아남은들 결국 죄는 따라붙습니다. 돈도 좀 착하게 벌어야하는 것일까요. 그런 고민을 하기에 저희는 너무 성실하고 약아빠지지 못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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