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늙고 지쳐서 머무느니 옛 고장이라, 이를테면 지팡이들 하나씩 챙겨 짚고 홍홍홍홍 예쁜 여자라는 집어등에 몰리는 딴지일보랄지, 듀게랄지, 여튼 노인정에 엉덩이 들이밀고 앉아 세월 가는 거 보는 낙에 사는데요

영화가 됐든, 책이 됐든 뭔가 새롭고 낯선 것은 노안이 온 자에게 쥐어진 폰트 7짜리 문장마냥 저어하게 되고, 그저 젊어서 즐거이 읽고 보았던 것들을 지치지도 않고 보더란 말입니다. 곰팡이 닦아낸 서책을 개다리소반 위에 펼쳐 놓고는, 소리 높여 "아이쿠~ 우리 홍련이가 또 좆되엇꾸나~" 하듯이요.

근래 제법 쓸만한 책장을 염가에 들이면서 70년대 고학생마냥 바닥에 쌓아 두었던 책들을 정리하는데, 글쎄 중학생 때(지난 세기) 처음 물려 받았던 영어교습본을 발굴하지 않았겠어요?

이것이 분명 영어책인데 한문이 절반인 기이함 보다 저를 더 당황시킨 것은 거기에 적혀 있는, 이른바 영길리나 미리견의 신사숙녀들이 대화를 시작한다는 방식이었어요.

일단 웬 남자가 비도 오는 날에 정류장에 혼자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냥 중년의 남자가 비 오는 날 텅빈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겁니다. 블루스지요... 이런 경우 절대 마일즈 데이비스를 떠올려서는 안 됩니다. 무조건 빌리 할리데이인 겁니다..

이때 웬 숙녀가 우산을 들고 표표히 나타나 신사의 곁에 섭니다. 그리고 말 합니다. 하이... 왓업도, 에이요도 아닙니다. 멀뚱히 시계를 쳐다보지도 않아요. 불현듯 나타나 툭 떨어뜨리듯 말을 해요. 하이... 남자도 피하지 않고 이 말을 받아줍니다. 하이... 그리고 덧붙여요. 나이스밋츄? 으아... 이건 블루스에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버스 정류장)
여: 안녕?
남: 안녕? 반가워요
여: 저도 만나서 반가워요
남: 이름이 뭐에요?
여: 나는 제인.. 그 쪽은요?
남: 나는 톰.. 날씨가 좋지요?
여: 그러네요. 톰, 어디에서 왔어요?
남: 뉴욕. 당신은요?
여: 런던이요
남: 런던은 아름다운 도시지요
여: 뉴욕도 아름다운 도시지요
남: 어디로 가지요?
여: 로스엔젤리스
남: 나는 시카고로 가요
여: 나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어요
남: .... 저도 그래요...

정말로 우리는 저 대사문으로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던 겁니다. 왠지 싸구려 모텔방, 거짓으로 내뱉은 이름, 실은 시카고나 아닌 미네아폴리스로 가는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던 남자와, 런던은커녕 평생 공항에도 가본적도 없는 여자. 그리고 후회와 한숨만을 남긴 뼈와 살이 녹는 밤이 연상되는 대화 아닙니까?

어쩌면 교재를 저술했던 그 옛날의 교수가 반쯤 마시다 남긴 럼주가 담긴 잔에 청자 한 개피를 담가 끄며

'소년, 소녀 제군.. 인생은 부도난 수표책 뒤에 적힌 전화번호를 들고 공중전화박스를 서성이는 밤 11시 같은 거라네.. 난 그 마음을 이 대화에 담았다오..' 했던 것 같지 않습니까?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5206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775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2220
123613 아스날 옷 입은 하베르츠네 강아지들 [2] daviddain 2023.06.30 257
123612 듄: 파트 2 새 예고편 [1] 상수 2023.06.30 311
123611 [넷플릭스바낭] 배보다 배꼽이 큰, 블랙미러 시즌 6 잡담입니다 [12] 로이배티 2023.06.30 760
123610 프레임드 #475 [4] Lunagazer 2023.06.29 101
123609 인디아나 존스 봤어요 [2] 돌도끼 2023.06.29 402
123608 애니 리버비츠 베니티 페어 할리우드 화보 모음(1995~2008) [4] LadyBird 2023.06.29 302
123607 조상신에 대해 [7] catgotmy 2023.06.29 485
123606 이런저런 잡담... [3] 여은성 2023.06.29 366
123605 [티빙바낭] 이번엔 리메이크 버전 '이탈리안 잡' 잡담입니다 [10] 로이배티 2023.06.29 374
123604 프레임드 #474 [4] Lunagazer 2023.06.28 109
123603 새 슈퍼맨 & 로이스 레인 캐스팅 발표 [11] LadyBird 2023.06.28 661
123602 6월 28일 오늘의 뉴스 몇가지(젊어지는 날, 김건희, 메가 스터디) [1] 왜냐하면 2023.06.28 339
123601 픽스 트랩 전기 모기채 써보신 분 있으신가요? [4] 산호초2010 2023.06.28 254
123600 [스압] AI챗 너머에 사람 없는 것 맞나요? 혼돈과 충격의 채팅창 [5] 스누피커피 2023.06.28 424
123599 올해 오스카 명예상 수상자들은... [6] 조성용 2023.06.28 377
123598 슬라보예 지젝 말투 [2] catgotmy 2023.06.28 297
123597 세리에 클럽들 등번호 88번 사용 금지 daviddain 2023.06.28 188
123596 축구는 더러운 산업, 모두가 포주와 창녀, 하지만 나는 그것을 사랑한다 [1] daviddain 2023.06.28 232
123595 어르신 됨을 실감 [10] 2023.06.28 398
123594 아빠 회사로 전화 건 딸 [3] 상수 2023.06.28 380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