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잡담...

2015.10.24 19:51

여은성 조회 수:914


  1.꽤 오래 전부터 그려본 만화가 있어요. 저는 좀 막연하게 늘 이렇게 여기고 있었죠. 이 만화는 오래 그렸고 분량이 많으니 언젠가 돈 많은 누군가...또는 '무언가'가 연재권을 돈을 주고 사가면 오랫동안 날로 먹을 수 있을 거라고요. 흠. 한 5년? 5년정도는 아무것도 안 하고 놀면서 용돈을 벌겠구나 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최근에 그럴 만한 기회가 생겨서 옳다구나 하고 한번 훑어봤어요. 그리고 좌절했어요. 없애야 할 부분 고쳐야 할 부분이 너무 많은 거예요. 그걸 감안하면 날로 먹을 수 있는 기간은 길어봐야 1년 반~2년 정도 되어 보였어요. 2년이 지나면 또 이야기를 진행시켜야 하는데 이 다음 부분은 느닷없이 전쟁이 일어나거든요. 여러 세력이 싸우는 복잡한 전쟁 부분이요. 이건 누가 만들어도 잘 만들기 힘든 거죠. 



 2.사실 이건 제 수법이긴 해요. 뭔가 소소한 배경으로 소소한 이야기가 지나가지만 심심할 때마다 한 번씩 이러는거죠. '곧 전쟁이 일어날거야.' '곧 세계가 멸망할지도 몰라' 이런 식으로요. 그리고 현실 시간으로 9년이 흘러도 전쟁이 일어나거나 하는 일은 없어요. 현실에서 9년이 흐르는 동안 작중 시간은 그보단 덜 가거든요. 


 독자들이 '일어난다는 세계 멸망은 언제 일어나는 거야?'하고 짜증을 낼 때쯤 수상한 녀석이 등장하죠. 수상한 녀석은 뭔가 벌이려다가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아.'하고 중얼거린 후 어깨를 으쓱한 뒤 애프터눈 티를 먹으러 가고, 다시 아무 일 없이 소소한 일상이 시작되는거죠. 아니면 이런 수법도 있어요. 웬 예언가가 세계 멸망이 일어나는 꿈을 꾸다가 깜짝 놀라며 일어나는 장면으로 때우는 수법이요.


 하지만 당신이...아니, 그게 누구든 이런 식으로 만화를 9년을 끌면, 이젠 정말 세계 멸망이 일어나야 해요. 아니면 세계 멸망 비슷한 거라도요. 



 3.위에 말했듯 이 만화가 계속되려면 이젠 전쟁이 일어나야 하고, 여러 세력...그것도 기술과 문화 수준이 12만년정도씩 차이가 나는 세력끼리 멋있게 싸우게 만들기란 힘든 일이죠. 최선을 다하면 욕을 안 먹을 정도로는 만들 수 있겠지만요. 흠. 욕을 안 먹을 정도의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거보단 새 이야기를 만들어서 파는 게 계산만 따지면 더 셈이 맞는 거죠.


 새로 만들 이야기도 아마 이럴지도 모르겠네요. 이건 버릇이니까요.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주인공에겐 거대한 적이 있고 언젠간 싸울 수도 있겠지만 그 둘은 우연히 마주칠 때까지 싸우지 않는 거죠.


 흠. 


 처음에는 이게 재밌을 수도 있겠지만 이 상황이 한 몇 년 정도 지속되면 독자들은 이런 의문을 품을 거예요. '왜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찾아가지 않는 거지? 왜 당장 끝날 수도 있는 이 만화는 몇 년 동안 계속 연재되는거지?' 하고요.


 쿨했었던 시절의 저라면 이러겠죠. '왜냐면 작가들은 돈을 벌어야 하니까. 그리고 주식 대박은 안 나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건 꽤 힘들거든. 거기 지적질 하는 너, 니가 한번 만들어 봐라?'


 하지만 더이상 쿨했었던 시절의 저는 없으니 저 사실을 숨기고 어떻게든 한 철천지원수가 다른 한 철천지원수를 찾아가지 않는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 내고야 말 거예요.



 4.휴.



 5.그리고 어느날 간단한 사실을 깨닫겠죠.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설명할 그럴듯한 이유를 매주, 매월, 매년 만들어 내는 것보다는 그냥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게 더 쉬울 거라는 거요.


 그 사실을 깨닫는 날 그 만화는 끝날 수 있겠죠.



 6. ......잠깐.



 7.새로 만든 이야기를 아무도 안 사갈 수도 있겠네요. 제가 그 사실을 깨닫는 날, 철천지원수를 찾아가려던 주인공, 또는 주인공을 찾아가려던 철천지원수는 여행 가방 꾸리던 손을 다시 멈추겠죠.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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