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현실이 답답하고 그럴 때 공상해 보는 것 있지 않습니까. 어디선가 짠 하고 부자 친척이 나에게 막대한 유산을 상속해 준다면...출생의 비밀까지는 좀 거하고. 

여튼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볼 듯한 그런 일들이 만일 나에게 일어난다면 참 재밌겠구나 하고 말이죠.

 

그런데 근대 유럽 부르주아들에게는 이런 일들이 종종 있었는지 가끔 책들을 읽다보면 이런 갑작스런 상속에 얽힌 에피소드들이 나와서 재밌더군요.

( 소설 모리스의 작가 에드워드 포스터도 숙모에게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적이 있고)

 

 

1843년 로버트 그레이엄이라는 한 영국의 상인은 어느 날 어떤  창고업자로부터 연락을 받습니다. 그가 갑자기 먼 친척 아저씨로부터 적지 않은 유산을 상속 받았다는 소식과 함께 자기네 회사에서 근 40년 가까이 보관하고 있던 물건들을 대금을 내고 찾아간다면, 그 유산들을 다 받아갈 수 있게 조치해 준다는 것이었죠. 대체 무슨 물건을 그토록 오래 보관하고 있었느냐고 했더니, 그 물건 주인은 바로 그레이엄에게 유산을 남겨준 친척 아저씨 토머스 그레이엄의 유품이라는 대답이 돌아왔죠.

어차피 유산 상속에 관한 법률 대리를 이 창고회사가 하고 있던 터라 로버트는 그러마고 승낙했고 법률 대리인은 곧 금고에 보관하고 있었던 토머스의 유품을 꺼내왔습니다. 대체 무엇이 들었을까...하는 궁금증과 함께 모두의 앞에 모습을 보인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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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게인즈버러, 1777, 우아한 그레이엄 부인 메리 캐스카트 (부분도)

 

 

아름다운 여인의 초상화였죠.

로버트는 순간 당황했지만, 그림속의 여인이 누구인지 곧 알아보았습니다. 바로 젊은 시절 세상을 떠난 그의 숙모 메리 캐스카트였거든요. 그리고 메리는 그에게 지금 유산을 상속해 준다고 하는 삼촌 토머스 그레이엄의 아내이기도 하구요. 대체 삼촌은 왜 숙모의 초상화를 수 십년 동안이나 창고에 방치해 둔 걸까?

궁금증은 금방 풀렸습니다. 그의 삼촌 토머스는 생전에 대단한 애처가였었는데, 일찍 잃은 아내를 일생 그리워한 것으로 알려졌었죠. 그래서 그는 상처한 뒤에도 그 후 재혼하지 않고 혼자 살 정도이기도 했고. 혹시 너무나 괴로워서 아내의 기억을 묻어버리려고?

 

 

Gainsborough, Thomas | The Hon. Mrs Thomas Graham (1775-1777)

 

초상화는 그의 삼촌이 신혼 시절에 그려진 것이었습니다. 부유한 상인이기도 하고 나름 열성적인 군인이기도 했던 삼촌 토머스 그레이엄은 생전에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해서 유럽 전역의 전쟁터를 떠돌아다닌 적도 있었죠. 로버트는 삼촌이 그렇게 사랑한 숙모의 초상화를 이렇게 수 십년 동안이나 어둠 속에 방치했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삼촌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으려니 하고 생각하고는 그림 보관 대금을 지불하겠다고 서명했습니다.

 

여튼 이렇게 해서 게인즈버러의 대표적인 초상화 하나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토머스 게인즈버러는 조슈아 레이놀즈와 함께 18세기 영국의 초상화계를 대표하는 양대 거장들 중의 한 명입니다. 이들은 함께 영국 화가 아카데미를 설립하기도 했었죠. 덕분에 영국의 초상화가들의 지위가 비약적으로 높아지는 업적을 세우기도 했고요.


그런데 게인즈버러나 레이놀즈나 정말 어찌나 그림속의 인물들이 하나같이 그렇게 멋지고 아름다운지, 이 사람들 그림만 봤다가는 무슨 18세기 영국 상류사회는 엘프들만 살았나 싶을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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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아 레이놀즈, 배내스터 탈턴 장군의 초상, 1782, 부분도, 영국 내셔널 갤러리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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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기병장교로 미국 독립전쟁(1775~1783) 때 대륙군 토벌로 악명과 명성이 동시에 높았던 장군의 초상화입니다. (초상화가 그려질 당시는 이미 전선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약관의 나이에 대령으로 승진한 참이었죠)

 

배내스터 탈턴Banastre Tarleton, 1754~1833

https://ko.wikipedia.org/wiki/%EB%B0%B0%EB%82%B4%EC%8A%A4%ED%84%B0_%ED%83%88%ED%84%B4

 

전투 때 마다 거의 학살에 가까운 작전 수행으로 '녹색 드레곤'이라는 별명도 얻으셨다고...(그런데 이건 제가 지은 별명입니다. 원래 별명은 '녹색의 기병') 심지어 항복한 적에게도 발포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어떤 적장을 생포할 땐 항복 안 하면 산채로 태워 죽이겠다고 협박을 한 적도 있다네요...;; (미독립전쟁 중 대륙군 장성 찰스 리를 생포할 당시 발언) 이 분이 이렇게 잔혹한 용장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적은 병력으로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 상황에서, 믿기 힘든 투혼을 발휘해 여러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세웠기 때문이죠. (그러려니 잔혹함이 필요했던 건지)

 

처음 봤을땐 그냥 좀 잘생긴 청년 장교인줄 알았었는데, 지금은 무슨 예쁜 터미네이터로 보이는군요.

어느 분 말씀대로 아수라의 심장을 가졌나…


그런데, 아무리 젊은 시절 그려진 초상화라고 해도(28세) 넘 미화된 듯 합니다. ( 이 분의 다른 초상화들을 좀 보고 왔는데, 완전 딴 사람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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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놀즈나 게인즈버러나 모두 당대를 대표하는 초상화가였지만, 인물을 터무니없이 미화하는 것으로 그 시절에도 말들이 좀 있었더군요. (그래도 그 때문에 인기가 좋았다니까)  저는 학교 다닐 때 이 분들 대표작 몇 편만 봤던 터라 그냥 그 초상화 주인들이 워낙 인물들이 좋았었나 보다 했죠. 그랬는데, 검색해 보니 이 양반들이 그린 초상화들이 죄다 엘프....참, 이게 뭔가 싶습니다.

물론 우리도 사진에 포토샵 동원하니까 뭐 그런거 생각하면 할 말이 없긴 하지만...그래도 이 두 화가는 정말 심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초상화 화가들과 비교해 봐도 미화가 넘 심해요. (덕분에 엘프들 원없이 구경해서 좋긴 합니다만)

 

 

다시 상속 얘기로 돌아와서,

 

참 뜬금없지만 이렇게 멋진 그림이나 골동품들을 집안 어른들께 물려받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잠깐 생각해 봤습니다. 언젠가 어느 분이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정체모를 조선 사대부의 근사한 초상화가 한 점 있어서 어느 날 미술관에 의뢰했더니, 그림 속 주인공이 무려 '곽재우'로 밝혀져서 화재가 된 적이 있었죠. (예, 임란 최초의 의병장, 홍의 장군 곽재우 말입니다. 붉은 색 도포를 입고 있는 그림이었죠. ) 티비 뉴스로 그 소식 듣는데, 정말 신기하더군요. 게다가 그 분은 곽재우의 후손도 아니었었는데 말이죠.

후대에 그려진 것이 분명했지만 - 미화된 것도 분명했고 - 워낙 멋진 초상화라 한동한 제 뇌리에서는 그 붉은 옷의 선비가 잊혀지질 않더군요. 그래서 친구에게 그 얘길 하다가 정말 그 초상화 갖고 싶다고 했더니 친구가 말하길,

 

" 왜? 뭐하러? 아무리 멋지더라도 남의 집 귀신인데, 왜?"

 

순간 기가 막혀서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고 했더니,

 

" 몰랐어? 조선 시대 초상화는 모두 영정용으로 그려진거야, 제사 때 걸고 지내려고. 네가 곽재우 장군 제사를 지내줄 게 아니라면 남의 집 귀신 데려다 뭐하려고?"

 

.......순간 할 말이 안 나오더라는…

 

제 친구가 좀 직선적이긴 합니다만, 뭐 틀린 말 하는 애는 아니라서. 그러고 보니 제가 정말 초상화의 용도를 잊고 있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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