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겨울 숲 外

2016.01.08 12:54

underground 조회 수:1983

지난 가을에 박정대 낭만시인의 시에 심취해 있다가 연말 연시에는 시를 잊고 지냈는데   


어제 채O 님의 글에 댓글을 달다가 복효근 서정시인의 시를 발견하고 마음에 들어서 


오늘 몇 편 더 찾아봤어요. 


(온라인에서 검색해서 찾은 시들이라 혹시 틀린 부분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어느 대나무의 고백 

 

 

늘 푸르다는 것 하나로

내게서 대쪽 같은 선비의 풍모를 읽고 가지만

내 몸 가득 칸칸이 들어찬 어둠 속에

터질 듯한 공허와 회의를 아는가

 

고백컨대

나는 참새 한 마리의 무게로도 휘청댄다

흰 눈 속에서도 하늘 찌르는 기개를 운운하지만

바람이라도 거세게 불라치면

허리뼈가 뻐개지도록 휜다 흔들린다

 

제 때에 이냥 베어져서

난세의 죽창이 되어 피 흘리거나

태평성대 향기로운 대피리가 되는,

정수리 깨치고 서늘하게 울려퍼지는 장군죽비

 

하다못해 세상의 종아리를 후려치는 회초리의 꿈마저

꿈마저 꾸지 않는 것은 아니나

흉흉하게 들려오는 세상의 바람소리에

어둠 속에서 먼저 떨었던 것이다

 

아아, 고백하건대

그놈의 꿈들 때문에 서글픈 나는

생의 맨 끄트머리에나 있다고 하는 그 꽃을 위하여

시들지도 못하고 휘청, 흔들리며, 떨며 다만,

하늘 우러러 견디고 서 있는 것이다

 




 

 


타이어의 못을 뽑고

 

 

사랑했노라고 그땐

또 어쩔 수 없었노라고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도 모를 너를 찾아

고백하고도 싶었다


-그것은 너나 나의 가슴에서 못을 뽑아버리고자 하는 일


그러나 타이어에 박힌 못을 함부로

잡아 뽑아버리고서 알았다

빼는 그 순간 피식피식 바람이 새어 나가

차는 주저앉고 만다

 

사는 일이 더러 그렇다

가슴팍에 대못 몇 개 박아둔 채

정비소로 가든지 폐차장으로 가든지

갈 데까지는 가는 것

갈 데까지는 가야 하는 것

치유를 꿈꾸지 않는 것

꿈꾼대도 결국 치유되지 않을 것이므로

대못이 살이 되도록 대못을 끌어안는 것

 

때론 대못이

대못 같은 것이

생이 새어 나가지 않게 그러쥐고 있기도 하는 것이다

 




 


 

콩나물에 대한 예의


 

콩나물을 다듬는답시고

아무래도 나는 뿌리를 자르진 못하겠다

 

무슨 알량한 휴머니즘이냐고 누가 핀잔한대도

콩나물도 근본은 있어야지 않느냐

그 위를 향한 발돋움의 흔적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하지는 못하겠다

 

아무래도 나는 콩나물 대가리를 자르진 못하겠다

죄 없는 콩알들을 어둠 속에 가두고

물 먹인 죄도 죄려니와

너와 나 감당 못할 결핍과 슬픔과 욕망으로 부풀은 대가리 쥐뜯으며

캄캄하게 울어본 날들이 있잖느냐

무슨 넝마 같은 낭만이냐 하겠지만 넝마에게도 예의는 차리겠다

 

그래, 나는

콩나물에게 해탈을 돕는 마음으로

겨우 콩나물의 모자나 벗겨주는 것이다







 

수인번호를 발목에 차고

 

 

대중탕에 들어서면 운명처럼

번호표 달린 열쇠를 받는다

죄인이라는 거다

관을 닮은 옷장을 열면

물음표 같은 옷걸이 하나

살아온 날을 묻는다

확인하자 벗으라 한다

양말을 벗고 겉옷을 벗고

속옷을 벗고 남김없이 벗고나면

입은 만큼 껍질로 쌓이는 시간

거울 속

수인번호를 발목에 차고

추레한 사내 하나

벗어야 할 껍질로 서 있다

 




 

 


눈 오는 날 콩나물국밥집에서

 

 

눈이 뿌리기 시작하자

나는 콩나물국밥집에서 혼자 앉아

국밥을 먹는다 입을 데는 줄도 모르고

시들어버린 악보 같은 노란 콩나물 건더기를 밀어넣으며

이제 아무도 그립지도 않을 나인데

낼모레면 내 나이가 사십이고

밖엔 눈이 내린다 이런 날은

돈을 빌려달라는 놈이라도 만났으면 싶기도 해서

다만 나는 콩나물이 덜 익어 비릿하다고 투정할 뿐인데

자꾸 눈이 내리고

탕진해버린 시간들을 보상하라고

먼 데서 오는 빚쟁이처럼

가슴 후비며 어쩌자고 눈은 내리고

국밥 한 그릇이 희망일 수 있었던,

술이 깨고 술 속이 풀려야 할 이유가 있던

그 아픈 푸른 시간들이 다시 오는 것이냐

눈송이 몇 개가 불을 지펴놓는

새벽 콩나물국밥집에서 풋눈을 맞던 기억으로

다시 울 수 있을까 다시 그 설레임으로

심장은 뛸 수 있을까 사십에

그까짓 눈에 속아

입천장을 데어가며 시든 콩나물 악보를 밀어넣는다

 




 

 

 

목련 후기

 

 

목련꽃 지는 모습 지저분하다고 말하지 말라

순백의 눈도 녹으면 질척거리는 것을

지는 모습까지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그대를 향한 사랑의 끝이

피는 꽃처럼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지는 동백처럼

일순간에 져버리는 순교를 바라는가

아무래도 그렇게는 돌아서지 못하겠다

구름에 달처럼은 가지 말라 청춘이여 

돌아보라 사람아 

없었으면 더욱 좋았을 기억의 비늘들이

타다 남은 편지처럼 날린대서

미친 사랑의 증거가 저리 남았대서

두려운가

사랑했으므로

사랑해버렸으므로

그대를 향해 뿜었던 분수 같은 열정이

피딱지처럼 엉켜서

상처로 기억되는 그런 사랑일지라도

낫지 않고 싶어라

이대로 한 열흘만이라도 더 앓고 싶어라 

 






 

잠자리에 대한 단상



잠자리 두 마리가 엉킨 채로 날고 있다

그러니까 저것들은 시방 흘레붙은 채로 비행하는 것이렸다

방중숭의 체위를 이름하자면 지행체위쯤 될 터인데

참 둔하다

저리 둔한 순간에는 천적에게 잡히기도 쉬울 터인데

참 아둔하다

가만히 머문 자리에서 사랑을 나누지 않고

그 짓을 하며 날아야 할 만큼 조급한 일이 있었을까

그럴 수도 있겠다

혼자서 날아온 먼 길과 다시 혼자서 가야할 먼 길 사이

단 한번뿐인 이 시간

혼자서 날 때와 둘의 날개로 날 때

그 삶과 사랑의 무게 차이를 가늠해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네 날개 힘들어 함께 균형 잡아 파닥이며

한 방향과 한 목적지를 향하여 날아가는 그것이,

참 둔하고 아둔한 그것이 삶과 사랑 아니겠느냐고 묻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싸움하는 자세와 똑같은 체위로 사랑을 하고

그 순간에도 서로 다른 세계를 그리는 이 음습하고 낮은 세상에다 대고

저 한 쌍은

목숨을 거는 것이 잠자리라고 말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겨울 숲 

 

 

새들도 떠나고

그대가 한 그루

헐벗은 나무로 흔들리고 있을 때

나도 헐벗은 한 그루 나무로 그대 곁에 서겠다

아무도 이 눈보라 멈출 수 없고

나 또한 그대가 될 수 없어

대신 앓아줄 수 없는 지금

어쩌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눈보라를 그대와 나누어 맞는 일뿐

그러나 그것마저 그대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보라 그대로 하여

그대 쪽에서 불어오는 눈보라를 내가 견딘다

그리하여 언 땅 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뿌리를 얽어쥐고 체온을 나누며

끝끝내 하늘을 우러러

새들을 기다리고 있을 때

보라 어느 샌가

수많은 그대와 또 수많은 나를

사람들은 숲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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