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는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활자중독 비슷한 게 있습니다. 잠깐 화장실에 가더라도 정 읽을 게 없으면 샴푸나 치약 뒷면에 씌어진 글자라도 읽어야 마음이 편해지고,

책이든 스마트폰이든 뭐든 항상 '읽다가 지쳐' 스르르 잠들지 않으면 제대로 잠을 못 자는 타입이지요.

이런 성향 때문에, 학부생 시절 방학마다 겨울엔 논산훈련소와 성남에 있던(지금은 괴산) 학생중앙군사학교에서 2주, 여름엔 4주동안 군사훈련을 받으러 가야만 했는데 그 때가 제일 힘들었어요. 

여느 훈련시설과 마찬가지로, 핸드폰은 커녕 도서조차 반입이 안 되는 곳이라 읽을 거라곤 재미없는 교범들밖에 없었거든요. 분/소대 전투, 혹은 북괴군 전술이라던지 뭐 그런...

물론, 2년차가 되고난 후엔 요령이 좀 붙어서 종교행사에서 초코파이로 세례를 받고 득템한 성경을 이야기책처럼 읽으며 버티긴 했지만요.


이게 20대 초반까지는 금단증상이 올 정도로 거의 강박에 가까웠는데, 군대도 두 번이나 다녀오고 하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잠들 수 있는 요령 비슷한 걸 터득해서 

요새는 그정도까진 아니고, 그냥 오래된 습관처럼 그럭저럭 유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베갯머리에서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도무지 독서할 틈이 없을만큼 최근 제 몇 년간의 삶이 팍팍한 탓도 있구요.




2.

이건 예전의 바낭에서도 썼지만, 그런 핸디캡을 가진 주제에 또 한 번 잠들면 기똥차게 잘 잡니다.

보통 평일엔 많이 자면 4~5시간 정도를 자는데, 꿈 꾸는게 연례행사일 정도로 항상 푹 자서 생활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요.

물론 '아무 것도 안 하고 집에서 퍼질러 자는' 행위 자체를 좋아해서 주말에 마음만 먹으면 20시간이고 30시간이고 잘 수 있지만... :)


그래서 그런지, 가끔 꿈을 꿔도 꿈의 내용까지는 기억하지 못하고 단지 '좋은 꿈', '나쁜 꿈', '야한 꿈' 정도의 이미지만 남아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오늘처럼 내용까지 완벽하게 기억나는 건 정말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일이에요. 게다가 기억하는 꿈들은 하나같이 다 이상해요... 

거대 버섯괴물에게 쫓긴다던지, 여자로 태어나 어떤 시인의 아내로 평생을 사는... 뭐 그런 꿈들요.

프로이트 옹이 꿈이 무의식의 반영이라고 했다던가요, 그 점을 미루어 보았을 때 아마 저는 제 정신 박힌 사람은 아닌 듯 합니다.



3.

제목에 꿈 이야기라고 써놓고 쓰잘데 없이 공들여서 제가 가진 성향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으니 아무리 21세기가 자기PR의 시대라지만 좀 과잉친절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싶네요.

하지만 저는 바낭을 일종의 컬렉션쯤으로 여기고 있고,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또렷한 '꿈'을 꾸는 게 정말 흔치 않은 일이라 이것에 대해 최대한 디테일하게 기억하고 싶어서 자세히 적어봤습니다.

아무튼 어젯밤에도 스마트폰을 꿈지럭거리다가 잠들었어요. 잠들기 직전에 듀게에 왔었는데, 하필 마지막으로 본 글이 가끔영화 님과 Zelkova 님의 귀신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4.

무서운 글을 읽고 잠들어서 그런지 굉장히 음습하고 기분 나쁜 이미지의 꿈ㅡ아마도 귀신이 나왔을ㅡ을 꾸다 잠시 깨어나 뒤척이는데, 손끝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아니, 눈조차도 못 뜨겠더라고요.

단 한 번도 가위에 눌려본 적은 없지만, 여기저기서 워낙 많은 얘기를 들어서인지 직감적으로 깨달았어요. '아, 나 지금 가위 눌렸구나.'

처음 겪는 일이라 무서운 와중에도 '보통 가위에 눌리면 귀에서 무슨 소리같은 게 들린다던데 조용하네?' 라는 생각을 하니까 그 순간 귓가에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어요. 

근데 그 음성의 정체가 좀 웃긴게, 제가 마지막으로 사귀었던 여자친구의 웃음소리였거든요. 워낙 좋은 쪽으로 특이한 톤이라 지금도 정확히 기억이 납니다.


가위에 눌린 것 치고는 상황이 좀 웃겨서 피식거리고 있는데, 그 순간 웃음소리가 늘어진 테이프처럼 점점 희한해지더니 귀곡성 비슷하게 변하고, 침대가 들썩들썩거리기 시작했어요.

아... 이게 장난이 아니구나. 그 때 덜컥 겁이 나더라고요. 필사적으로 가위 유경험자들의 조언을 떠올리면서 손끝, 발가락같은 말단부에 힘을 주기 시작했지요.

이게 다행히 효과가 있었던지 조금씩 몸의 통제권이 돌아오는 게 느껴졌습니다.


어느 정도 몸이 정상화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이 때다 싶어서 벌떡 일어나면서 문을 박차고 나가 안방으로(...) 직행했어요. 아, 어제가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이기도 해서 요 며칠동안은 본가에 머무르고 있거든요.

곤히 주무시고 계신 어머니를 흔들어 깨우며 거의 울먹거리면서 '엄마 나 가위눌렸쪄ㅜㅜ'를 시전하려는데, 희한하게 말 대신 '어어으... 으으으...' 하는 요상한 소리만 나오더라고요.

어 뭐지... 하고 있다가 쇄골께가 축축해서 슥 봤는데 온 몸에 피칠갑을 하고 있더라고요. '어어으...!!!!' 하면서 비명을 질렀는데 그 때 깨달았어요. 제 혀가 잘려 있다는 걸.

지금 생각해보니 웃긴 게, 그 와중에도 어머니는 일어나지 않으셨어요.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시x스 침대




5.

그러고 또 깨어났습니다. 다행히 현실이었어요. 자면서 뭔 난리를 쳤는지 온수매트고 이불이고 죄 바닥에서 굴러다니고, 침대보도 절반쯤 벗겨져 있네요.

이 바낭을 적으며 진정이 되어서 지금은 좀 괜찮아졌는데, 밤새 무서워서 화장실도 못 가고 이불 속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지요.

대충 여기 쯤에서 마무리짓고 밀린 화장실 좀 갔다가, 찝찝한 기분으로 한 주를 시작해야겠네요. 급합니다. 화장실이



듀게인 여러분은 제 몫까지 섹시하게 한 주를 시작하셨음 해요. 그럼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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