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집자랑 식사를 하게 되면 비싼 곳에 가기가 좀 그래요. 회사 카드로 비싸고 맛있는 걸 먹고싶긴 하지만 눈치가 보이거든요. 편집자는 '비이~싼 곳에 가셔도 됩니다.'라고 호기롭게 말하곤 하지만 글쎄요. 회사에 돈도 별로 못 벌어다 주는 작가를 데리고 비싼 곳에 가면 편집자가 회사에 돌아가서 한 소리 듣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들곤 하거든요. 회사에는 내가 20세기때부터 알았던, 돈 많이 벌어다주는 작가들이 소속되어 있으니까요. 그런 사람들이라면 좋은 가게에 가서 당당히 회사 돈을 써도 괜찮겠지만 나는 어쩐지 눈치가 보인다 이거죠.


 그래서 그냥 적당한 곳에 가서 먹고 회의를 하곤 하죠. 어디까지 가도 좋다는 가이드라인이 있는 건 아니지만 눈치라는 게 있으니까요.



 2.사실 이건 내가 너무 눈치보는 거겠죠. 어차피 회사 일을 하려고 만난 건데 어딜 가도 별 상관은 없어요. 편집자도 짬밥이 엄청 쌓였으니 그가 쓴 영수증을 회사 사람들이 일일이 들여다볼 일도 사실은 없을 거고요. 하지만 눈치나 염치...뭐 그런것들이 있으니까요. 친한 사이라면 뭐 얻어먹고 사주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친하지 않은 사이라면, 그런 눈치나 염치는 엄청나게 까다롭게 작용하는 법이고요. 내가 당당하게 얻어먹어도 되는 자리에서조차, 적당한 메뉴나 식당을 고르게 되는 거예요.



 3.한데 오늘 들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모금 행사 일화는 매우 우울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잖아요. 모금을 당당히 하거나 기부 좀 하라는 말이 쉽게는 안 나와요. 하더라도 그런 말을 당당히 하는 건 힘들고요. 그야 몇 년, 몇십년씩 그런 기부행사를 주도하는 경험이 쌓이면 그땐 얼굴에 철판 깔 필요도 없이 당당하고 자신있게 기부를 부탁...아니, 독촉하게 되기도 하겠지만요.


 어쨌든 나는 모금 행사나 기부 행사가 매우 멋있고 품위있게 진행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미국 드라마에서 보면 파티장에서 사람들끼리 담소를 나누다가, 호스트가 술잔을 수저로 톡톡 두드리며 맑은 효과음을 내고 '여기 주목좀 해 주십시오! 지금부터...' 뭐 이러잖아요? 그런식으로 흘러가는 거라고 생각했죠.



 4.휴.



 5.하지만 묘사된 모금행사의 상황을 보니 그런 거랑은 매우 다르더라고요. 할머니들은 불편한 자리에 호출되어서 불편한 시간들을 보내야 하고, 행사가 끝나면 교회에서 헌금을 걷는 듯한...강요된 모금 분위기가 조성되는 걸 또 견뎌내야 해요. 그야 돈을 걷는 '운동가'들이야 그런 걸 많이 해봤을 테니 감정적으로 힘들 것도 없겠지만 할머니들은 일반인이잖아요. 그런 분위기에 익숙할 수 있을 리가 없겠죠. 회사 일로 만나서 식사 한번 할때조차 눈치가 발동하는게 사람인데...그런 행사에 가서 돈을 달라고 하는 입장이 되면 얼마나 눈치가 보여질지 상상도 안 가요.


 그리고 그런 행사에 사람을 동원하는 것도 어떻게 대우하느냐에 따라 동원되는 사람의 기분이 매우 달라지죠. 할머니들을 행사에 '모시는' 것과는 좀 달랐어요. 물론 개인적인 느낌일 수도 있지만 쓰여진 글을 보면, 동원된 입장에서는 행사에 '디스플레이되는'느낌을 받은 것 같아요.


 밥을 먹자고 하니 돈이 없어서 안된다...라고 했다는 증언에 대해선 잘 모르겠네요. 반대쪽에서도 뭐 할말은 있을 거니까요. 바빴다거나, 귀찮아서 어쩌다 한두번 그랬다거나...뭐 그런 이유가 있을 수도 있겠죠. 정말 밥값도 없지는 않았을테니. 어쨌든 이런저런 행사나 시위에 동원되거나 순간순간에 서운한 대접이 꽤 있었긴 한 것 같아요.



 6.한데 이게 그렇거든요. 뭐 나는 그래요. 어떤 자리에 가면 그 자리의 주빈을 챙기지는 않거든요. 잘나가는 사람...그 모임의 주빈인 사람은 그 자리에서 기분이 상하는 게 있으면 어필을 하거나 그냥 박차고 나가면 그만이니까요. 애초에 파티에 모인 사람들이 주빈을 서운하게 만들 일도 없고요.


 하지만 그 모임에서 주빈이 아닌 사람...오긴 왔는데 어째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은 사람들은 기분을 알 수가 없어요. 지금 어색함을 느끼는 건지, 아니면 소외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중인지...아니면 그냥 나름대로 파티를 잘 즐기고 있는 중인지 알 수가 없죠. 왜냐면 사람이란 게 그렇거든요. 자신이 주빈이 아닌 곳에서는 자신의 기분이나 서운한 점을 말하기가 참 힘들어요. 그래서 나는 어떤 행사나 모임에서는, 주빈이 아닌 사람을 좀 더 챙겨줘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주빈보다는 주빈이 아닌 사람을 좀더 '모시듯이'대우하는 게 좋다는 거죠.



 7.물론 할머니들은 정의연에서 벌이는 시위나 모금 행사에서 주빈이 맞긴 해요. 하지만 그분들 스스로는 도저히 그렇게 느끼지 못할거란 말이죠. 묘사된 모금행사 일화를 보면 모금을 계좌로 따로 받는 것도 아니고 현물을 현장에서 수령하는 경우가 많은 모양인데...그렇게 눈앞에서 돈이 오가는 걸 보면 고마움보단 미안함이나 창피함이 들게 마련이니까요. 일반적인 사람은요. 자신의 노동이나 봉사의 댓가로 받는 게 아니라 그냥 돈을 받는 건 누구에게나 불편하니까요.


 그건 풍족한지 아닌지에 관한 게 아니라, 남에게 무언가를 받아내는 게 익숙한지 아닌지의 문제거든요. 



 8.어쨌든 그래요. 나도 위안부라는 말보다는 sexslave가 옳은 표현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표현을 들어야 하는 당사자는 정말 괴로울 거니까요. 전범 국가들을 '문제삼는'건 옳은 일이예요. 그러나 전범 국가들을 몰아세우고 문제삼기 위해, 할머니들과 할머니들의 감정을 계속 땔감으로 써먹어야 하는 건 좋지 않죠. 그분들도 눈이 있고 귀가 있는데 하루도 조용할 날 없이 주위에서 맨날 재주 넘어 보라고 하고 성노예라는 말을 자꾸 주워섬기면 기분이 안좋겠죠. 일본이 제시한 100억 펀드가 큰 금액은 아니지만 당사자들 입장에선 어떻게든 마침표라도 찍고 얼마간의 보상을 원하는 게 당연한 것 같기도 해요. 지쳐서 갈등을 끝내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갈등이 끝나선 안된다고 윽박지르는 건 나쁜 거죠. 잘 다독이는 것도 아니고.


 일반적인 사람은 그렇잖아요. 연인이나 친구 사이에 싸워서 삐져도, 그 삐진 상태가 3일만 가도 서로 지쳐요. 웬만하면 그 불편한 상태를 끝내고 그냥 화해하고 싶어지죠. 그런데 위안부 할머니들은 적게 잡아도 30년이예요. 30년동안 끝나지 않는 갈등 상황을 겪고 있는데, 되돌아보니 그 30년동안 이용만 당한 것 같다는 기분이 들면 매우...화가 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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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만화에서 어떤 군인이 '군인들은 그저 큰 목소리를 낼 수만 있으면 돼.'라는 대사를 하죠. 군인이 큰 목소리를 계속 내려면 전쟁이 끝나지를 말아야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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