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데드 링거> 보고 왔습니다

2020.07.21 23:11

Sonny 조회 수:578

평어체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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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공동체라는 말은 매혹적이다. 그러나 운명이라는 말은 늘 비극을 연상시킨다. 일단 정해져있고 되돌릴 수도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없다는 이 절대적인 의미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만 실감하기 때문이다. 행복은 운명과 맞닿아있지 않다. 오로지 상실과 쇠퇴만이 운명공동체란 말의 무게를 떠안긴다. 어떤 일이 닥쳐도, 그 압력을 고스란히 함께 한다는 무언의 법칙이 운명공동체를 묶어놓는다.


운명을 공동으로 체험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운명보다 공동이 선행해야 비로서 성립되는 이 말은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는 의지와 노력에도 절대 이뤄질 수 없는 낭만처럼 느껴진다.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개체들은 오로지 순간을 공동으로 체험할 수 있고 그 찰나는 더디게 연속될 뿐이다. 어쩌다가 함께 기쁘고, 어쩌다가 함께 슬프고, 나눠진 삶 속에서 함께 하는 순간들도 쪼개진 채로 연결되었다가 이내 시간의 뒤편으로 쓸려나간다. 고독을 전제로 하는 인간들의 삶 속에서 운명공동체란 말은 집단의 목표를 위해 개체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정치적 문구 혹은 다른 개인을 위한 개인의 피지배를 합리화할 때만 쓰는 속임수 같은 말이 아닌지.


공동이 아니라서 운명이 분리될 수 밖에 없다면, 탄생부터 성장과 성취를 공동으로 만들어놓는다면 어떨까. 단지 함께 하는 시간과 공간의 공유가 아니라, 생물학이라는 필연 아래에서 피와 살을 나눈 자로서 사회학적인 선택까지도 동질하게 함께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데드 링거>의 쌍둥이란 존재다. 그냥 닮은 자가 아니다. 생물학적인 닮음을 사회적으로 계속 발전시켜나가면서 본인들의 동질성을 고수한다. 얼굴이 닮은 자들은 같은 종류의 학문을 하고 같은 종류의 취향을 갖고 같은 대상을 향해 성욕을 나눈다. 분리된 존재로서 나눠졌어야 할 취향과 욕망도 이들은 동질성의 틀에 넣고 함께 가지고 간다. 이들은 운명공동체란 말에 가장 근접한 존재들이다. 직업, 주거지, 취미, 탐구심 등 삶의 전반을 차지하는 거의 모든 것을 공동으로 나누고 있으니까. 태어나면서 한번도 결별하거나 달라진 적 없이 닮은 존재로서 살아온다면 운명은 단 한명의 것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사회적 계약인 결혼이나 세대와 사회적 지위의 차이가 나는 부모자식간의 관계와도 비할 수 없다. 이들의 직업과 사회적 결속은 그 이후의 문제다. 함께 해 온 시간의 익숙함과 어떤 노력도 없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닮음은 본인들이 직접 계발시켜온 가운데 하나의 시계 안에서 순환한다. 


<데드 링거>의 맨틀 형제에게 동질성은 단순한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생활 루틴이고 오래된 부부가 아침 식사를 하는 것처럼 당연해야 하는 정신적 유대이다. 쌍둥이에게 동질성은 곧 목적이다. synchronization은 동질성을 지키기 위한 가장 기본적이고 안정적인 수단이다. 직업을 같이 하고, 사는 곳을 같이 하고, 여자와의 섹스를 통한 쾌락을 공유하는 것은 이 둘에게 "정상"이다. 개별로 나눠질 수 밖에 없는 것들은 어떻게해서든 상대방인 척 하는 기만을 통해, 혹은 후일담을 통해 서로 알아야 하고 체험이 아니더라도 기억을 통해 공동의 자산이 되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당연한 영화 초반과 중반이 엔딩의 극악한 수술장면보다 더 로맨틱하다. 그 어떤 타인들도 개체차와 성별차, 문화와 취향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채 분리된 상태의 독립적 공존밖에는 할 수 없다. 엘리엇과 베벌리는 쌍둥이라는 유전적 동질성을 바탕으로 모든 것이 겹치는 공생을 이미 완벽에 가까운 상태로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인과 개인이라는 존재론적 장벽을 이 둘은 수십년에 쌓은 생물학적 동질성의 역사로 거의 극복해냈던 것이다.


영화는 멘틀 형제의 광적인 집착이 로맨스와 다르지 않다는 힌트를 하나 남긴다. 클레어는 베벌리에게 그 이름이 여자 이름 같다고 슬쩍 놀리고 베벌리는 이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 d이 쌍둥이 형제의 생활은 이성애적 커플의 로맨스와 닮아있다. 다소 구시대적이나 남성성으로 일컬어지는 외향성, 여성성으로 일컬어지는 내향성을 두 사람은 완벽하게 나눠갖고 있다. 이 둘은 어떤 면에서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생물학적으로 결합한 존재이다. 이것을 편협한 이분법이라고 정치적 공정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기 전에 쌍둥이 형제가 "두 명"의 개체로 구성된 세계를 상호보완적으로 지탱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한다. 두 사람이 있으면 어느 한 쪽은 힘이 셀 것이다. 어느 한 쪽은 말을 잘 할 것이다. 두명이 있으면 둘 사이의 차이는 반드시 생긴다. 그 상대성의 차이는 아주 동질한 이 개체들 사이에서도 어쩔 수 없이 발생할 수 밖에 없고 그것을 이 두 형제는 다소 일방적이되 공생에 가까운 형태로 주고 받으며 쌍둥이 형제의 동질한 삶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베벌리가 엘리엇 덕분에 여자와 섹스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절대 잊으면 안된다)  현대 사회에서 이 정도로 공생을 하고 있는 그 어떤 한 쌍의 두 개체들도 발견된 적이 없다. 서로 아끼고, 서로 장단을 보완하고, 서로 닮아있다. 나와 거의 똑같은 존재가 나를 물심양면으로 돕고 나를 의지한다는 그 관계는 아주 일부분이 동질하게 겹칠 뿐 그 외의 차이에서 분쟁이 일어나고 마는 개개인의 비극을 거의 초월한 상태이다. 어찌보면 닮음은 선천적으로 얻었던 환경이 아니라 이들의 동기화된 생활 패턴으로 취득해낸 결과물인지도 모른다


이 둘의 로맨스를 이해하는 첫번째 방법은 위에 써놓은 대로 이들을 이성애적 커플로 치환시켜 보는 것이다. 맨틀 형제의 집착은 그 정도가 아주 과할 뿐 보통 사람들의 연애와 비슷하다. 사랑하는 연인이 아플 떄 우리는 뭐라고 말하는가. "내가 차라리 아팠으면 좋겠어." 다른 삶과 다른 고통을 지고 있지만 연인이라는 관계 하에서 동반자살이라는 극단적 동기화가 일어나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분리된 개체로서 상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고독한 인간의 비극이다. 연인과 같은 상태를 유지하면서 동병상련을 겪고 상대를 이해하며 상대를 외롭지 않게 하려는 이 고통의 공유는 맨틀 형제에게는 지극히 일반적인 동질성의 실천이다. 연인은 데이트를 통해 즐거움을 같이 누리고 고통을 나누는 그런 관계다. 맨틀 형제는 그것을 태어난 뒤 유년기부터 자연스럽게 실천해왔다. 이들에게는 모든 사회적 상식과 도덕을 초월한 유대가 이미 몸에 배어있다. 엘리엇이 클레어를 방해물 취급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그는 Mantle brothers' saga라고 분명히 이야기한다. 이 세계의 주인공은 애초에 두 사람 뿐이고 다른 모두는 조연이다. 그런데 그 조연에 불과한 존재가 자꾸 주인공들의 세계에 멋대로 끼어들어서 훼방을 하고 형제의 동질성을 깨트린다. 그는 가장 큰 방해물이다. 


이 둘의 로맨스를 이해하는 두번째 방법은 맨틀 형제를 온전한 자아의 분리된 결과로 보는 것이다. 우리는 외로울 때 또 다른 자신을 상상하곤 한다. 또 다른 자신은 지금 자신의 모든 감정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그걸 똑같이 나눌 수 있으며, 어떤 질투나 감정적 왜곡없이 그걸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며 기뻐할 수 있을 테니까. 내가 시험에 붙었을 때 제일 기쁜 것은 나 자신이다. 그 기쁨조차도 궁극적으로는 홀로 나눌 수 밖에 없다. 그럴 때 자기 자신이 있다면 온전히 같은 질과 양의 기쁨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일을 못해서 욕을 먹고 풀이 죽었을 때 누굴 상상하는가. 일을 잘하는 타인, 혹은 친구는 어떻게 해도 자기 자신을 초라하게 만든다. 자기 자신이되 자기가 했던 실수를 하지 않고 완벽하게 처리해서 칭찬과 인정을 받는 자기 자신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차원이 다른 위로가 될 것이다. 다른 개체이되 자기 자신인 그 존재는 자신의 못난 과거를 부정하고 잘난 미래를 예언하는, 재현의 존재가 될 테니까. 엘리엇과 베벌리는 서로 그런 존재다. 


우리는 소꿉친구를 기억한다. 유년시절을 함께 했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가장 순수하고 여린 시절 동질한 경험을 했다는 이유에서다. 중고등학교 친구가 평생 친구라는 이야기들을 한다. 2차 성징으로 불안하면서도 막 세상을 깨우치기 시작한 그 때 다른 세속적인 조건에 초탈해서 농밀하게 교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베벌리와 엘리엇은 이 시간들을 몽땅 자신들로만 이루어진 세계 안에서 보냈던 이들이다. 이들에게 그것은 크게 로맨틱하지 않다. 그것은 4인 정상 가족 안에서 부모의 양육을 받고 사는 대다수 사람들이 느끼는 당연한 감각같은 것이다. 그것이 점점 깨진다. 왜 베벌리가 그 모든 사회적 성공을 외면하고 스스로 마약중독이 되어가면서까지 베벌리와 같아지려고 하냐면, 그 동질성은 너무 당연한 것이라 어떻게든 유지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엘리엇과 베벌리의 가장 큰 목적은 동질성이다. 이것은 연인이나 가족이 관계를 유지하되 생활에서 교집합을 이룰 뿐 취향과 목표 같은 것은 전혀 공통되지 않는 일반적 패턴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삶이다. 내가 너 같으면 좋겠어, 우리가 우리를 서로 닮았으면 좋겠어, 이런 로맨틱한 문장들은 늘 현실에서 아직 동질하지 않고 그 동질성이 결코 일부분에 그칠 수 밖에 없다는 현실적 한계를 전제한다. 닮아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닮은 것은 당연하다는 이 쌍둥이의 존재론은 영화에서 그저 동질성의 회복과 안정을 위한 모든 수단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크로넨버그는 그것을 육체적으로 표현한다. 베벌리가 클레어에게 다시 돌아가 관계를 회복할 때, 베벌리는 엘리엇이 자기를 지켜보면서 둘의 몸뚱이에 살덩어리로 된 튜브가 연결된 환상을 본다. 클레어는 그 관을 꺠물어서 뜯어내려 한다. 클레어에게 깊이 빠지면서 베벌리가 그런 악몽을 꾼 것은 엘리엇이 그만큼 클레어에게 빠지지 않고, 클레어가 자신을 엘리엇과 확실히 구분한다는 그 현실 때문에 동질성에 위기감을 느낀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클레어는 엘리엇과 베벌리를 가장 확실하게 구분짓는 분리의 지표이다. 내가 곧 엘리엇이고 베벌리라는, 영혼의 "엉겨붙음"은 클레어의 등장으로 점점 뜯어질려고 한다. 베벌리의 이 꿈은 엘리엇에 대한 공포나 강박이 아니라 쌍둥이의 관계를 뜯어내는 클레어에 대한 공포이다. 우리는 극도의 긴장과 불안을 직관적으로 표현할 때 내장을 빌리곤 하지 않는가. "내 애간장이 다 녹아버리는 줄 알았다" "내 오장육부가 찢어질만큼 괴롭다" 그 문장을 크로넨버그는 영상으로 번역했다. 육체라는 것은 늘 온전해야하고 연결된 상태로 신체 내부에서 안전하게 보존되어야 하니까. 베벌리와 엘리엇은 밖으로 튀어나와있는 서로의 장기 같은 존재다. 그것을 뜯어내려는 것은 얼마나 아프고 괴로울 것인가. 베벌리는 약으로 그것을 달래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클레어에게 의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클레어는 약을 줄 수 있고, 연애대상으로서 그의 결핍을 채워줄 수는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상호의존의 욕구는 채워주지 못한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그가 간이나 심장의 역할을 대신 할 수는 없다.


서로가 서로의 장기라면, 장기가 아플 때 장기의 주인이 아픈 것도 당연하다. Destructive one for Mantle brothers' saga라는 클레어에 대한 엘리엇의 진단은 정확해진다. 엘리엇을 약물중독에 빠지게 한 클레어는 사실상 이 두 형제에게 일종의 병균이다.엘리엇의 lay인 여자를 두고 셋이 춤을 추다가 베벌리가 베란다에 나가서 쓰러지는 것도 단순한 우연이나 드라마틱한 설정만은 아닐 것이다. 베벌리는 이미 엘리엇과의 동질한 관계에 아주 강력한 독성을 발휘하는 외부 존재, 클레어를 이미 안에 받아들인 상태다. 셋이 춤추는 장면에서 베벌리는 클레어 외에 다른 외부인을 한명 더 받아들이는 구도를 만든다. 엘리엇과 베벌리 사이에 끼어있는 이 이물질은 베벌리의 몸에 즉각적으로 작용한다. 독에 독을 더한 결과로 베벌리는 쓰러진다. 이물질의 적당한 개입은 두 쌍둥이 사이를 더 견고하게 만드는 항체 같은 역할을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못했다.  이 때 영화에서 클레어는 드라마 촬영 명목으로 완전히 사라진다. 그리고 엘리엇이 베벌리를 치유하려는 장면만 계속 나온다. 영화가 두 형제만을 집중하는 것은 단순히 이 둘의 드라마틱한 관계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엘리엇의 치유를 위해 영화가 의식적으로 클레어를 치워낸 결과일 수도 있다. 쌍둥이와 이물질을 관객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쌍둥이의 온전한 세계를 관객이 받아들이고 치유되는 과정을 스스로 느끼게끔 하는 것일수도 있는 것이다. 클레어는 베벌리가 중독되어있는 약물과 동치된다. 형제 외의 다른 존재에 대한 탐닉과 집착은, 알콜중독이나 마약중독과 같은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베벌리는 호전되지 않는다. 엘리엇은 자신도 약을 먹기 시작한다. 이 모순적이고 자기파괴적인 행위는 순수하게 동기화를 위한 것이다. 한명이 아픈데 한명은 건강하면 안된다. 그 순간 운명공동체로서의 한 개체는 찢어지고 그 존재 자체가 의미를 잃는다. 한쪽 쌍둥이의 아픔이나 고통은 다른 쌍둥이와 절대 비대칭일 수 없다. 이것은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좋겠다"라는 고통의 전이와 희생이라는 개념과도 궤를 달리한다. 그것은 상대의 고통을 소거시키기 위한 육신의 제사라면, 엘리엇의 마약 중독은 오로지 같은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가 나아야 자신도 낫고, 상대가 아프면 자신도 아파야 한다. 동질한 운명은 동질한 육체를 통해 증명되어야 한다. 어찌보면 자기기만적인 이 동기화는 이 둘의 연결된 영혼이 신체를 통해 발현되는 지극히 과학적인 현상일지도 모른다. 분명히 나눠져서 존재하는 이들을 우리가 연결되었다, 하나일지도 모른다, 똑같다고 느끼는 것은 눈을 통해 확인하는 이들의 외모, 즉 유물론적인 실재를 가장 큰 근거로 두기 때문이다. 육체적으로 동일하기에 존재론적인 연결을 확신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내가 다 아프다"라는 문장은 그저 말이 아니라 정말로 일어날 수 있다. 이 쌍둥이 사이에서라면 문장이 담은 로맨스는 실질적으로 발생한다.


클레어의 자궁경부는 세개이다. 그는 그의 육체를 저주한다. 두개여야 하지만 세개가 있어서 제 기능을 못하는 그의 육체는 둘이어야 온전하지만 셋이 되어서 제 기능을 못하는 맨틀 형제, 특히 베벌리의 파괴를 상징한다. 베벌리가 약기운에 잘못된 도구로 여자 환자를 거칠게 다루고 환자가 아파하는 내용 이후 자신만의 그로테스크한 수술도구를 의뢰하는 것은 그가 아마 클레어를 '적출"하고 싶은 욕망의 발현일지도 모른다. (그는 돌연변이 자궁을 가진 환자를 위한 도구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후 그는 그 도구를 달리 설명한다. 그리고 그는 이 도구를 자신의 쌍둥이 형제에게 사용한다. 세개가 있어서 비정상이라면, 하나를 제거해서 온전한 둘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베벌리는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하나가 끼어들어 오염된 둘이 있다면 그 하나를 적출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이제 오염된 채로 붙어있는 것들을 떼어내야 한다고. 여기서 영화는 다시 한번 권력의 역전을 꾀한다. 외향적인 엘리엇이 내향적인 베벌리를 착취하는 것 같은 계급갈등이 있지만 그것은 어느 때나 뒤집어질 수 있는 외부적 지표이고 동기화의 실패에 따른 상대적 약자는 상대적 강자의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고. 엘리엇은 베벌리를 치유하고자 하다가 자신의 타락을 통한 동기화를 시도하지만 베벌리는 단절과 적출을 시도한다. 최후의 상대적 강자는 베벌리가 되었으며 더 잔인했던 것도 베벌리이다. 더 망가져있는 엘리엇은 베벌리의 생존을 위해 순순히 그의 실험을 돕는다. 만약 우리가 갈라지고 내가 떨어져나간다면 베벌리는 회복되고 살 수 있지 않을까. 


베벌리는 엘리엇을 추출해낸다. 그러나 수술은 실패한다. 엘리엇은 죽었지만 베벌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떨어져나간채로 살아있는 이 영혼의 샴쌍둥이는 클레어에게서 어떤 감흥이나 유대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무감각해진채로 집에 돌아간 그는 쌍둥이의 시체 위에서 조용히 죽는다. 그것은 감히 분열을 꾀했던 자기 자신에 대한 속죄이며 징벌이다. 그리고 둘이 떨어져서는 살 수 없던 생물학적 운명의 귀결이다. 너가 없으면 나는 살 수가 없어. 이들의 죽음이 슬픈 이유는 극도의 상호의존성이 로맨스로 발휘된 결과이다. 어떤 생명체는 짝을 읽으면 죽는다. 어떤 존재의 부재는 남은 존재를 죽을 정도로 외롭게 만든다. 죽음은 이들이 마지막으로 실천할 수 있는 동기화이다. 크로넨버그의 이 기괴한 영화는 과장된 문장이 닮아있는 두 존재의 신체를 통해 발현될 때의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현상으로 증명하고픈 로맨스 장르이다. 함께 있어야 살고, 한 쪽이 아프면 다른 쪽도 아프다. 가장 극도의 로맨스는 호감과 애정의 교환이 아니라 서로 그 형질이 닮고 닮아서 운명이 서로 눌러붙어 같이 박동하고 만다는, 육체적 저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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