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지 작가의 '상수리나무 아래'

2020.10.02 09:37

겨자 조회 수:1079

대단히 한국인의 정서에 맞는 로맨스 판타지 소설이네요. 남자는 존경받는 드래곤 슬레이어지만, 한꺼풀 들춰내면 천민 출신. 조그만 영지를 다스리느라 밤낮없이 일해야하죠. 여자는 공작의 큰 딸, 왕가의 후손, 마법사지만 사실은 여덟살 때부터 매 주 두 번 씩 아버지로부터 두들겨맞은 말더듬이입니다.


리프탄 칼립스는 열두살 때 가출해 용병생활을 하고, 열 여덟에 검술대회에 우승한 후 기사가 됩니다. 귀족이 되어 왕으로부터 영지를 하사받지만 사실은 몇십년간 버려졌던 척박한 땅입니다. 마물이 날뛰는 변방의 아나톨에 정성을 쏟아 융성하는 도시로 만들었습니다. 맥시밀리언 칼립스 (결혼 전 성은 크로이소)는 왕가의 후손인 어머니, 야심이 많은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큰 딸이예요. 왜 아들로 태어나지 못했느냐, 그것도 아니면 왕가에 정략결혼시킬 수 있는 인재로 태어나지 못했느냐, 왜 말을 똑바로 못하느냐 라는 아버지의 꾸지람으로 정신적으로 위축되고 신체적으로 학대받은 어린시절을 보냈죠. 아버지 크로이소 공작은 자기가 나가야할 드래곤 토벌에 누군가를 대신 보내고자 하여 리프탄 칼립스를 계략으로 옭아넣고 쓸모없는 큰 딸과 결혼시킵니다. 한 번도 사랑받아보지 못한 맥시밀리언은 자신에게 관심을 두는 리프탄을 위해서 자기의 과거를 감추며 헌신으로 성을 돌봅니다. 그녀는 자기가 속한 조직 안에서 쓸모있어지고 싶어하죠. 하지만 그럴 수록 리프탄은 자기가 충분히 아내를 부양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괴로워합니다. 처음부터 변방의 자신이 아닌 중앙의 귀족에게 보내줬더라면 맥시밀리언은 편하게 살 수 있었을텐데 하구요. 그리고 그 생각이 꼭 틀린 것도 아닙니다. 리프탄과 엮이면서 맥시밀리언은 다치고 지치고 피를 흘립니다. 몸의 상처로 친다면 크로이소 공작에게 맞으며 지낸 시절 보다 리프탄과 함께 마물과 싸우며 더 심각한 부상을 입었겠네요. 그렇지만 사랑하면서 산다는 게 고통없는 것이었나요.   


남산 N타워에 올라가 서울을 내려다 본 적 있습니다. 거기엔 무수한 아파트가 있죠. 그 아파트 한 채 한 채에 엄청난 가격이 붙어 있습니다. 한국의 가구들은 그 빚을 매달 지워나가죠. 그 한 채 한 채가 누군가의 성 같이 보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로판을 읽다가 이건 아무리 봐도 젊은 맞벌이 부부 이야긴데, 라는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남편은 죽어라 일해서 집 한 채 (여기선 성이지만)를 마련해요. 아무리 일해도 할 일은 끝나지 않고 세상은 적들로 들끓고 있죠. 똑똑한 마누라는 결국 학위를 하고 돌아와 너를 도와줄테니 보내달라고 합니다. 기러기 부부를 선택한 마누라를 남편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리프탄은 아무리 봐도 노동에 치이고 책임감 가득한 한국 남자고, 맥시밀리언은 아무리 봐도 한국식 장녀 컴플렉스, 콩쥐병이 있어 보여요. 아들로 태어나지 못해서 구박받았다는 설정은 물론 글로벌한 것이긴 하지만, '바리공주' 이야기에서 보이듯이 대단히 한국적인 정서이기도 하죠. 자신의 희생과 헌신 (이른바 콩쥐병)으로 상황을 극복하려고 하는 것도 그렇구요. 맥시밀리안의 여동생 로젠탈이나 아그네스 왕녀는 여기서 그러니까 한국식 엄친딸이죠. 엄마 아빠가 쟤 좀 보고 배워라 쟤처럼 좀 되어 봐라 하는 선망의 존재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충분히 잘하고 있고 열심히 하고 있는데도 내면에 가득찬 '나는 더 열심히 해야해'라는 자책감. 타인에게 강렬하게 인정받고 싶고 주변 (기사단)이 동류로 끼워주기를 바라는 마음. 노력에 대한 종교적이기까지 한 믿음과, 이에 대비되는 자격지심이 한국인의 정서에 잘 어필하겠구나하고 느꼈습니다.  


1부 173회


"당신이...나, 나를 특별하게 새, 생각하는 게 좋아서..."


중략


"하지만...나,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정말로...아, 아무것도 아닌데...그걸...당신이 아,알게 되는 게 두, 두려워서..."


중략


"나는...내가...너무 창피해..."



김수지 작가의 전작은 '희란국 연가'던데 여기서도 자기를 희생해서 남을 살리는 여자, 속아서 결혼한 남자, 사회에서의 고립, 불특정 다수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정서가 등장하네요. 이 작품은 '희란국 연가'보다 더 세계관에 넓이도 있고 깊이도 있어서 좋군요. 이 작품은 완결되지 않았고, 한 번 시작하면 흠뻑 빠질 수 있습니다. 연재 중단된 상태입니다. 이 작품을 읽으니, 이 작품 이전에 읽었던 로맨스 판타지 소설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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