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진 사람

2020.03.12 17:22

은밀한 생 조회 수:1187

사람 변하는 거 쉽지 않다고 하죠.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다 뭐 그런 말도 있고요. 특히나 부부 관계에 있어 인생 선배들이 주로 하는 조언에 상대방이 변하기를 기대하지 말라. 같은 내용이 많더라고요. 내가 좋아하는 것들 백가지를 해주는 것보다 상대방이 싫어하는데 난 좋아하는 (또는 아무것도 아닌) 그 한 가지를 고치는 것이 너무나도 어려운 일임을 세월이 흐를수록 더 절실하게 느끼는 것 같아요.

음 그런데 드물게 자신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그 사람을 아는 주변인들도 조금의 예상을 하지 않았던 그런 변화가 일어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아요. 정말 ‘다른 사람’이 돼버리는 경우요. 사소하게는 입맛 같은 것들도 그렇고. 음악이나 영화 같은 취향의 영역도 좀 그런 부분이 있는 것 같고요. 요즘 제가 자주 주변에서 듣는 말은 “니가 아이돌을 좋아할 줄 몰랐다”입니다... 쿨럭. 그래서 떠오른 기억들이 있는데요.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니가 아이돌을 좋아할 줄 몰랐다 소리를 듣다가 떠오른 게 아니라, 최근 불거진 신천지 사태로 인해 떠오른 것 같기도 하네요.

제 이십대를 관통하며 친하게 지내던 언니가 있었어요. 어린 나이에 이미 업계에서 상당히 인정을 받고 작품 활동을 하던 사람이었죠. 사람이 어찌나 총명하고 고상한지 그 언니랑 같이 있음 좋은 향기가 나는 것 같았어요. 목소리도 신비로울 만큼 좋아서 은은하고 낭랑하게 퍼지는 그 목소리의 여운에 취하는 기분이었죠. 차분하고 어여쁜 자태도 정말 좋았는데..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담배를 피우고 하루 종일 담배를 펴도 신기하게 좋은 냄새가 났어요. 아기 얼굴처럼 말갛고 흰 피부에 쌍꺼풀이 없이 큰 눈. 오뚝한 코. 적당한 길이의 살짝 얇은듯한 입술,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는 또 어찌나 영롱한지.

그 언니가 얘기하는 모습을 가만히 보기만 해도 제 마음에는 일종의 감동이라든지 설렘 같은 것이 늘 서렸어요. 어쩐지 애틋한 기분도 들었고.. 그 언니가 저를 부르던 애칭이 있었는데 “**아...” 하면서 살짝 말끝이 잦아드는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 물끄러미 그 언니를 바라보곤 했죠. 재능 있고 고상한데다 아리따운 젋은 예술가. 누구보다 순수했고 성실했던 사람. 그런데 그 언니가 성실하게 종교에 입문하더군요. 개신교이긴 한데 굉장히 공격적으로 포교 활동을 하는 교회였어요. 우리의 대화는 기승전우리교회안올래로 바뀌었고.... 그걸 계속 견딜 수 없었던 저는 마음의 소파 같은 한 사람을 보내야만 했죠. 신천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 교회도 성령을 받은 목사를 섬기는 교회였어요. 그 목사가 기도를 하고 손을 대면 아픈 사람도 낫는다는.

저는 지금도 정말 모르겠어요. 그 언니가 왜 그런 종교에 빠졌는지. 소위 힙스터라고 불리는 무리 중에서도 순도 200%짜리 힙스터 영혼인 사람이었는데 말예요. 그러면서 한편으론 회의론자이기도 해서 종교나 샤머니즘에 무척 냉소적이었거든요. 심지어 몇몇 작가들이 협업한 프로젝트에서 동료 작가가 개신교인이란 이유로 트러블이 나기도 했었던 그 언니가.... 왜.


그 이유를 그 언니가 직접 얘기를 해줬는데, 그녀는 프랑스 시골 마을로 여행을 가서 두 달 정도 살다 온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 ‘심심해서’ 성경을 읽었다고 하더군요. 그 언니는 어릴 적부터 굉장한 다독가였어요. 그런데 그 성경을 읽다가 그만 주님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해요. 신의 계시요. 한국으로 돌아가서 사역하라는. 저는 사실 이 부분은 믿었어요. 그 언니가 뭐 그런 걸로 사기를 치겠나요. 정말 목소리를 들었으니 들었다고 했겠죠.

암튼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 언니를 저는 점점 감당할 수가 없었고, 이제는 어느 곳에서 어떻게 쓰러지든, 무엇에 슬프고 무엇에 기쁘든. 아무런 소식도 모르는 익명이 돼버렸네요. 한때는 서로를 소울메이트라 부르던 사람들이 이렇게 서로에게 익명 1이 되다니. 이 언니의 “**아..” 하면서 저를 부르는 그 목소리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파요. 그리고 그 언니가 진심으로 저를 안타까워했거든요. 너도 거기서 그러고 있으면 안 되는 앤데.... 영적 허기는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어.. 왜 주님을 만나지 못하니.. 하면서 대성통곡을 하며 슬퍼하기도 했죠.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저를 보면 가슴이 찢어질 거 같다고 괴로워했어요.

그녀가 들은 신의 목소리를 따라 잘 살고 있겠죠. 부디 아프지 말고 건강하길.
밥은 안 먹어도 그림을 그리는 것이 생명수와도 같은 사람인데, 물감이랑 캔버스 살 돈은 넉넉하길.. 진심으로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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