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

2018.04.21 00:37

underground 조회 수:1178

저는 평일 저녁에는 매일 운동하러 가는데 보통 20분 정도 걸어서 가요. 


요즘 나뭇잎도 파릇파릇해졌고 꽃도 알록달록 피었고 나무 위에서 새도 짹짹 울고... 걷는 동안 눈과 귀가 바빠졌죠.


그런 어수선한 가운데서도 하늘을 떠도는 공기 속의 한 가닥 향기는 금방 알아차릴 수 있어요. 라일락이죠. 


라일락은 언제나 향기로 거기 있다는 걸 먼저 알려주는 꽃이에요. 눈으로 보지 못했어도 공기 속에 떠도는 향기를 들이마시며 


아, 근처에 라일락이 피었구나 하고 알게 되죠. 그 순간이 참 좋아요. 그리웠던 사람이 어느새 제 곁에 다가와 있는 걸 알게 되는 것처럼..


어떤 때는 반가운 마음에 두리번 두리번하며 라일락을 찾아보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그냥 숨만 깊게 들이쉬며 천천히 걸어가죠. 


보이지 않아도 누군가 곁에서 향기로 감싸주는 것을 느끼며 걸어가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이에요.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눈 앞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냥 이별인데, 그래서 발걸음을 떼는 순간 마치 등을 돌리고 헤어지는 기분인데 


라일락은 한참 동안 그 향기로 제 몸을 감싸며 함께 걷는 거죠. 시각적이기보다는 후각적이고 촉각적인 꽃이죠. 


한참 붙박이로 서서 지켜보다 어쩔 수 없이 무거운 발걸음을 떼고 돌아서야 하는 다른 꽃들과는 달리 


라일락은 굳이 눈 맞추지 않아도 애써 지켜보지 않아도 곁에 머물러 있다는 걸 알 수 있고 매번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함께 걷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꽃이에요. 그래서인지 라일락에게서는 뭔가 먼저 사랑받는 느낌이 들어요. 


향기를 내뿜는 꽃들은 이렇게 먼저 다가와서 여기 와 있다고 알려주고, 부드러운 공기로 살며시 안아주고, 


굳이 마주보며 지켜봐 주지 않아도 즐겁게 나란히 걷다가 조금씩 살며시 눈치채지 못하게 사라지는 다정한 연인 같아요. 


다른 예쁜 꽃들은 제가 먼저 찾아보지 않으면 못 보고 지나칠 수도 있어서 의식적으로 열심히 찾아봐야 하는데  


라일락은 그럴 걱정이 없어요. 숨을 안 쉬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요. 놓칠 걱정 없이 먼저 다가와서 향기를 뿜으며 기다려주는 꽃, 


놓칠 걱정 없이 느긋한 마음으로 편안히 만날 수 있는 꽃이죠. 


아련하게 피어나는 라일락 향기를 맡으면 아, 이제 4월이구나, 이제 진짜 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신기하게 후각은 시각보다 뭔가 더 아련한 기억을 불러오는 것 같아요. 후각이 뭔가 더 감정과 연결된 감각인 것 같아요.  


아침에 일찍 못 일어났던 저는 도서관에서 제일 나쁜 자리, 화장실 바로 앞 자리에서 중간고사 시험 공부를 했었는데 


화장실 냄새를 막으려고 교정에 피어 있는 라일락꽃 몇 송이를 따다가 코에 대고 살랑살랑 흔들며 신나했었죠. 


(공부는 안 하고 라일락 앞에서 콧구멍만 벌름벌름하며 황홀해 했던 기억이...) 


라일락은 어느 날 문득 향기를 내뿜으며 다가와 언제나 먼저 아는 척해주고 먼저 안아 주고 천천히 함께 걷다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조용히 사라지는 정답고 사려 깊은 꽃, 그래서 왠지 더 그리운 꽃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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