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내 폭력을 극복하는 법.

2018.08.18 22:02

잔인한오후 조회 수:1421

최근 어느날 새벽에 듀게에 글 하나가 올라왔었습니다. 애인에게 지속적으로 구타를 당하며, 시골에 고립되어 있고, 이야기할 친구 하나 없는데 어떻게 하면 애인과 잘 지내볼 수 있냐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초반부와 말미에 꼭, 애인과 헤어지라는 답만은 하지 말아달라고 단서를 붙였습니다. 저는 그 글에서 화자가 당하고 있는 상황에 너무 화가 나서 특정 책을 인용하며 꼭 헤어지라고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글은 지워지고 말았습니다. 지금이라면 그런 자기만족적 댓글이 아닌, 한국여성의전화 전화번호를 달았을 것입니다.


저는 전부터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가난한 사람은 왜 계속 가난할 수 밖에 없는가, 혹은 가난한 사람은 비효율적인 선택을 통해 가난으로 파고드는가, 가난에서 벗어난다면 그 전환점은 무엇으로부터 시작되는가 같은 식입니다. 이와 같은 '고통이 계속 지속되는데도 자의적 선택으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에 대한 의구심과 의문은 한국 사회에 가득 차 있으며 성폭력과 폭행, 권력의 하방 압박과 부조리한 근무환경 등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이 던져집니다. 능동적 대처가 없었다면 그런 과정에서의 피해는 피해자라고 해도 어느 정도는 자기 책무 때문에 어느 정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관념은 해체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할 수 있는 것이 책 읽는 것 밖에 없어, 그 글이 지워진 이후 두 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아주 친밀한 폭력]과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인데, 최대한 실사례에 밀접해 있으며, 사람들의 사고 관념을 파악할 수 있는 책을 골라봤습니다. (사실 질적으로 좋은 책들 중 고를만큼 접근 가능한 볼륨이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관련 서적이 있다면 더 읽고 싶은데 혹시 추천하실 책이 있다면 해주세요. [아주 친밀한 폭력]은 한국의 가정 내 폭력 혹은 아내를 향한 폭력에 대한 개론서 같은 책입니다. '아내 폭력'이라고 정의된 폭력이 한국에서는 매우 보편적이며 40여개의 논문의 설문조사를 분석하여 60년대부터 현재까지 폭력 경험이 있는 아내가 30 - 40%라는 충격적인 수치를 초반에 내어놓습니다.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는 한국 여성의전화에서 나온 내부 사례집인데, 다양한 형태의 폭력으로부터의 탈출이 다뤄지고 있습니다. 두 책에서 여러 놀라운 부분들과 고통스러운 부분들이 저를 힘들게 만들었으며, 폭력의 대상이 되어 있을 때 거기서 빠져나온다는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어느 정도는 상상할 길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폭력 피해자나 가해자의 학력, 나이 등 인구학적 요소는 다종다양하며 그다지 특별한 차이를 만들어 내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이해한 상황은 이렇습니다. 일단, 많은 사람들이 가정 내 폭력에서 빠져 나오지 못합니다. 적어도 자식은 가족에서 독립함으로 탈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부부의 경우는 상황을 유지하고 빠져 나간다는 결정을 내리지 못합니다. 사례집에서 빠져 나온 사람들의 공통점은, 폭력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정한 임계점을 넘겼을 때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대안을 가지고 있으면 전환점에 도달합니다. 그러나 그 폭력의 임계점이란 혹독하고 가혹해서, '이러다간 정말 죽겠구나' 수준에서야 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


폭력을 꾸준히 당하는 것은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며, 끊임없이 신체/정신적으로 에너지가 소모되는 상황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즉 양 쪽 방면으로 자원이 부족한 상황이기 때문에 효과적인 선택과 사고를 할 수 없으며, 다수의 토로에서 피난처에서 완전한 안전이 제공되자 자신의 사고방식이 조금씩 재건되었다는걸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이 당하고 있는 상황을 특수한 사례로 생각하여 자신의 행동이 상황을 만들고 있다는 순환논리에서 벗어나, 한국에서는 매우 보편적인 상황이고 자신이 아니라 누구더라도 이런 상황을 접할 수 있으며 자신의 여러 선택의 결과로서 책임이 자기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도 중요했습니다. 보통은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보고 대화하며 느끼게 되는데, 한국에서 이러한 폭력 상황이 특수 사례라고 가정하는 것이 얼마나 해악인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다른 피해자와 대화하면서 '아 내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였구나'라고 읊조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당연히 어떤 보편적 가정을 내릴만큼 제가 아는 것도 없기 때문에, 다른 정보를 찾아 이 쯤 적어봐야겠습니다. 가정 내 폭력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폭력에서 완전히 안전한 공간이 확보되고, 그 공간에서 편안한 사고를 할 수 있을만큼 휴식을 취한 후에 개인의 결정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희진은 가정 폭력의 보편성을 일단은 인정하지 않았다가도, '자기 가족 내에 폭력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다수의 학생들이 있었다고 답변하면서 놀라움을 느끼는 광경을 책의 초반에 서술합니다. 저는 건너 건너에서 실제 사례들을 직접 듣기도 해서 이런 상황들과 공존하고 있는 현 상태가 가끔 매우 괴로울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데이트 폭력이 그러한 폭력의 연장선상 혹은 징후라는 생각도 들고, 이러한 아비규환이 보편적이라면 빠르고 바른 방식으로 (지난하지만) 해소되었으면 합니다. 그 때 그 글을 쓰신 분이 이 글을 읽으셨다면 혹시라도 02 - 2263 - 6464 혹은 1366 으로 연락을 한 번 취해보셨으면 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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