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승계 (Succession) - HBO

2019.10.07 14:30

겨자 조회 수:590

HBO의 드라마 '승계 (석세션: Succession)'은 다소 뻔한 이야기에서 시작합니다. 아버지 로건 로이는 미디어 제국을 세웠어요. 하지만 늙어가고 있죠. 후계자는 첫째 아들 켄달 로이로 삼기로 했는데, 후계자를 공표하기로 한 창업주의 생일날이 되자 이 할아버지가 생각을 바꿉니다. 세번째 아내 마시아 로이에게 더블 보팅 (이사회에서 투표할 권한을 두 배로 줌)을 주겠다고요. 첫째 아들은 조그만 인터넷 미디어를 인수하느라 정신이 팔려서 아버지가 서명하라고 하는 문서를 읽지도 않고 서명합니다. 알고보니 이로 인해 새 어머니 마시아의 이사 권한을 두배로 올려주겠다는 문건에 동의한 셈이 되는 거죠. 


아버지 로건 로이는 둘째 아들 로만, 첫째 딸 쉬브에게 새어머니의 권리를 올려주라는 문건에 사인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쉬브는 만만치 않아요. 변호사와 상의해야겠다며 아버지와 신경전을 벌이는데, 이렇게 대치하던 중 헬리콥터 안에서 아버지는 뇌일혈을 일으킵니다. 뇌일혈 직전 아버지는 기존의 COO를 해고했고, 둘째 아들 로만을 COO로 기용하겠다고 약속했어요. 대신 형과 경쟁해서 제국을 차지해보라는 거죠. 마찬가지로 쉬브에게도 자리를 줄테니 후계자 자리를 차지해보라고 미끼를 던집니다. 후계가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리더가 쓰러져서 의식을 잃었는데, 누가 리더를 해야하죠? 촌수가 가까운 새어머니? 이제까지 가업을 돌봐온 큰 아들? 아이디어가 많은 둘째 아들? 어디서든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똑똑해보이는 딸? 


보통 시리즈 파일럿인 첫 작품이 가장 쫀쫀하고 짜임새 있는데, 과연 시즌 1 에피소드 1은 볼 만 합니다. 이 에피소드에서 작가는 세 명의 후계자가 다들 장점이 있고 나름의 결격사유가 있다는 걸 재빨리 보여줍니다. 큰 아들은 가업을 돌봐왔지만 심지가 약해요. 3년전까지는 마약문제가 있어서 재활원에 있었고, 아버지의 그늘에 짓눌려서 자기 결단에 확신이 없습니다. 둘째 아들은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많고 자기 판단에 대한 확신도 있지만 아랫사람에게 잔인합니다. 그리고 타인의 마음을 사는 방법도 몰라요. 큰 딸은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친한 척 할 수도 있고, 아랫사람에게 잔인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가 이룬 미디어 제국에 연연하려고 하지는 않아요. 또한 위기상황에서 의연한 자세를 보여주지도 않죠. 이 모든 걸 에피소드 하나에 다 보여주는데, 그건 작가가 각별히 신경을 썼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에피소드 1은 큰 아들이 한국계 미국인 (로버트 양이 연기)이 운영하는 인터넷 미디어를 인수하려고 하면서 시작합니다. 큰 아들은 말을 함부로 하면서 인수합병을 마무리하려고 하지만, 순식간에 인수합병 대상에게 휘둘립니다. 그럼 둘째 아들은 어떤가, 둘째 아들은 온 가족이 노는 야구 게임에서 하인의 자식을 불러서 내기를 해요. 홈런을 치면 백만달러를 주겠다고 하죠. 하인의 자식은 그 말을 듣고 기를 쓰고 한 방을 날리지만, 홈으로 들어오기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아웃이 되고 맙니다. 그러자 둘째 아들은 백만달러짜리 수표를 네 개로 찢은 뒤 이제 25만달러가 됐네, 하면서 조롱합니다. 이를 보고 있는 아버지 로건 로이는 하인의 자식에게 격려하면서 넌 잘 뛰었다고 말해주고, 생일선물로 받은 파텍 필립을 그 아이가 볼 수 있는 탁상 위에 두고 옵니다. 정확한 모델 명은 모르겠지만, 이 시계 비싼 건 한 25만달러 되죠. 여기서 이 아버지가 둘째 아들을 관찰하고 있고, 두 아들 다 리더로서 부족하다는 걸 파악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아버지가 뇌일혈을 당하자, 세 자식은 모두 당황합니다. 오후 여섯시 반까지 후계 상황을 발표해야하는데, 아무도 제대로 된 계획을 갖고 있는 사람이 없어요. 그리고 이 병원이 정말로 최고의 병원이냐, 이 의사가 최고의 의사냐, 우리 아버지가 최고의 대접을 받고 있는 것 맞느냐며 히스테리를 부립니다.


어찌어찌 큰 아들이 임시로 CEO 자리를 맡기로 했는데, CEO 자리를 맡자마자 실무진이 나쁜 소식을 전해옵니다. 회사의 빚이 3조 달러고, 주식을 담보로 잡히고 만든 빚인데, 주식 가격이 130달러 이하로 떨어지면 은행은 자동으로 주식을 팔아서 원금을 챙기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돈은 아버지 로건을 믿고 대출해준 거라서, 만일 현재 리더가 리더십이 없다고 시장이 판단하면 주식을 내려갈 거고, 그러면 은행은 빚 청산을 원할 거고, 그러면 망하게 된다, 라는 내용이죠. 시장은 리더십의 부재를 금방 판단하고 손절에 나섭니다. 


사람들은 톱의 권력이 무한하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은 권력은 잡은 그 순간부터 부서지기 쉽다고 하죠. 큰 아들 켄달이나 둘째 아들 로만은 자기에게 주어진 특권에 익숙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권력을 누릴 수 없죠. 이 드라마를 빨리빨리 보면서 sonnet님의 포스팅이 떠오르더군요. 


노이스타트의 핵심주장은 대통령의 권력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약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르고 달래고 빌고, 이번에 이거 하나 해주면 다른 것으로 보상하겠다고 약속하는 등 끊임없이 타협하고, 대통령이 반대파들에게도 유용한 정치적 도구임을 입증하면서 자기 정책이란 마차에 여러 세력들이 올라타도록 설득한 후 목적지까지 갈 때까지 합승시킨 승객들이 열받아 뛰어내리지 않도록 끊임없이 관리하면서 어렵게 어렵게 끌고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p.s. 루퍼트 머독의 미디어 제국 뉴스 코오퍼레이션을 모델로 했다는 루머가 있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에서 새어머니 마시아는 동구권 출신의 미녀인 걸로 되어 있는데, 루퍼트 머독의 전 아내인 웬디 덩은 중국 산동성 출신의 키가 후리후리한 미인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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