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오인, 번노티스 캐릭터 잡설

2019.10.20 21:01

노리 조회 수:877

퍼오인을 다시 달렸습니다. 제가 보자마자 다시 한번 달린 미드는 번노티스와 퍼오인, 두 가지에요. 

둘 다 너무 재밌게 봐서. 


번노티스의 남주와 비교했을 때 존 리스의 캐릭터는 다소 얕지 않나 싶네요. 존 리스는 삶의 목적이 필요한 사람이고, 번 노티스의 마이클 웨스턴은 자신이 '좋은 사람'임을 확증해 줄 '대의'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좁혀 말하면 '나는 아버자같은 사람이 되지 않겠어!'에 가깝습니다. 이 둘의 가족 관계를 잠시 보면, 존 리스는 가족이 없습니다. 어릴 때 아버지가 죽었거든요. 양어머니 밑에서 자랐다는 식으로 묘사되고 말뿐 친모에 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반면, 마이클 웨스턴은 이보다는 훨씬 복잡해요. 가정폭력을 일삼던 아버지와 생존자인 어머니와 남동생이 있죠. 웨스턴은 그런 가족에게서 도망치는 방법 중 하나로 입대를 선택합니다(존 리스가 입대한 배경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어떤 사고를 쳐서 교도소가는 대신 입대를 선택했다고 암시되는 게 다에요). 


퍼오인의 기계가 존재하지 않았을 경우 존 리스는 죽었을 거라고 나옵니다. 인물의 어두운 면에 질려서 연인이 떠나고 이후 죽었을 거라고요. 그런데 문제는, 이 인물의 어두운 면이 무엇인지 잘 알기 어렵습니다. 마이클 웨스턴의 경우 래리와의 유사부자 관계를 통해서 마이클의 갈등과 어두운 면을 충분히 조명합니다. 존 리스는 어둡다기 보다는 왜 살아야되는지가 뚜렷치 않은 허무주의적인 인물에 가깝습니다. 텅 비어있죠. (고약하게 말하자면) 존 리스에게 고급 양복이 필요했던 이유.


번노티스에서 감탄했던 것은 가정폭력 생존자들의 얘기를 첩보물 서사에 녹여냈다는 것입니다. 웨스턴은 전략 수립과 위장 잡입에 특화된 사람으로 나오는데, 가끔 플레이어가 모자를 때면 가족들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시즌 5에서 웨스턴과 그 어머니의 놀라운 롤 플레잉이 있죠. 모험극과 동시에 가정폭력 생존자 어머니와 아들의 가족극이 펼쳐집니다. 남주 어머니인 매들린 웨스턴은 정많고, 눈물많지만 무엇보다 강한 사람입니다.(담배도 겁나 많이 피고^^) 이 쇼를 보고 매들린 웨스턴 역의 샤론 글레스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샤론 글레스는 80년대 여형사 버디물인 캐그니앤레이시로 유명하더군요(퀴어애즈포크에도 나옴). 캐그니앤레이시는 페미니즘 쇼로도 많이 회자되던데 매들린 웨스턴 캐릭터 설정이 작가의 의도인지 샤론 글래스라는 배우의 캐스팅이 영향을 주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매들린 캐릭터에 점수를 많이 주고 싶은 게, 강렬한 직업(능력쩌는 첩보요원이라든가)이 없는 평범한 인물임에도  강함과 매력을 충분히 보여준다는 거에요.


-커플링에 대하여

퍼오인의 루트와 쇼도 무척 매력적이죠. 다만 굳이 그 설정까지 가야했을까, 사랑보다 찐한 시스터 후드여도 충분치 않았을까 싶더군요. 보면서 유쾌하지만은 않았던 것이 왜 그 반대의 성립은 이다지도 보기 어려운가 라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존 리스는 해롤드 핀치를 에로스적으로 사랑하면 안되었던 것일까요? (당신과 세상을 연결해주는 사람은 제시카가 아니라 핀치랍니다;) 루트와 쇼의 관계가 눈요기로만 그치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소 뜬금없기도 했고요. 게이 첩보요원은 어디에 있습니까. 음.. 찾아보니 벤 위쇼 주연의 런던 스파이가 있군요. 


존 리스와 해롤드 핀치, 두 주인공의 세상과의 연결점, 삶의 구원과 희망의 여성상이 다소 전형적이라는 점도 실망스럽습니다. 세상 순진, 야들야들한 여성들만 필생의 연인이 될 자격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다른 여성 캐릭터들은 그렇게 멋지게 그려놓고서! 그렇습니다. 퍼오인에는 루트, 쇼, 조이, 그리고 카터가 있죠. 


앞서 존 리스 캐릭터에 대해 툴툴댔지만 저 자신을 보면 존 리스라는 인물에 가깝습니다. 그냥 좀 날 때부터 비어있는 사람도 있는 거죠. "우리는 평범한 삶을 누리지 못할거야." 존 리스며 마이클 웨스턴이며 흔히 드라마 속 첩보요원들이 한탄하듯 말하지만 평범한 삶이든 아니든 삶의 목적이 뭐 대단한 게 있겠나요. 평온한 나날입니다. 결핍된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딱히 없어요.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지루한 건 못참고, 귀찮은 건 싫고, 야망은 없습니다. 남은 인생, 짧게 짧게 목표를 잡아 그저 시간을 잘 보내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큰 목적없이는 목표 달성이 열심히 되지는 않더군요.  번호가 뜨지 않아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존 리스가 이해되는 밤입니다. 바낭도 다 했고..;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3903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2327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0731
123188 나겔스만이 토트넘 감독 후보에서 아웃/감독 찾기 47일 [3] daviddain 2023.05.13 151
123187 [웨이브바낭] 저렴한 장르물 셋, '마더 앤 머더', '프레이: 인간사냥', '극장판 카케구루이3' 잡담 [2] 로이배티 2023.05.13 286
123186 참 이상하고 신기한 태국정치 [2] soboo 2023.05.13 541
123185 오셀로를 읽었습니다 [6] Sonny 2023.05.12 273
123184 주말에 읽을 책. [2] thoma 2023.05.12 264
123183 프레임드 #427 [5] Lunagazer 2023.05.12 104
123182 남호연 개그맨이 뜨나봅니다 [1] catgotmy 2023.05.12 509
123181 녹수가 길동이 한테 [2] 가끔영화 2023.05.12 182
123180 검사와 피의자 [1] 왜냐하면 2023.05.12 239
123179 [웨이브바낭] 그래서 HBO 시리즈 버전 '이마 베프'도 봤습니다 [10] 로이배티 2023.05.11 462
123178 '면도날', 애플티비+'유진 레비 여행 혐오자 -' [2] thoma 2023.05.11 299
123177 외로움에 대해 [3] catgotmy 2023.05.11 303
123176 재미로 해보는 여러분의 플래이 리스트는? [7] Kaffesaurus 2023.05.11 393
123175 프레임드 #426 [4] Lunagazer 2023.05.11 107
123174 넷플릭스 신작 비프 추천(온전히 이해받는 것에 대해) [6] 가봄 2023.05.11 533
123173 술 한잔 안마시고도 필름이 끊기는 신기한(아님) 무서운 경험말고 하늘 사진들 [12] soboo 2023.05.11 563
123172 바티칸 엑소시스트를 보고 [2] 라인하르트012 2023.05.10 307
123171 [영화바낭] 장만옥이 짱입니다. '이마 베프' 영화판 잡담 [4] 로이배티 2023.05.10 474
123170 짬짜면은 누가 처음 생각해냈을까요. [9] Lunagazer 2023.05.10 508
123169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읽었습니다 [9] Sonny 2023.05.10 35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