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잡담...(한진그룹)

2018.07.09 03:53

안유미 조회 수:1177


 #.언젠가 썼던가요? 소위 명대사라는 건 독백보다는 어떤 질문에 대한 대답인 경우가 많다고요. 올 더 머니 원래 버전의 예고편에 이런 장면이 나와요. 한 소녀가 폴 게티에게 '당신은 부자인가요?'라고 묻고 게티는 이렇게 대답하죠. '이제는.'


 이 장면은 스페이시를 끌어내리고 플러머 버전으로 재촬영하며 편집한 모양인지 상영본엔 나오지 않아요. 이게 만약 영화에 나왔다면 '여윳돈이 없어.'와 함께 나에겐 2대 명대사였을 텐데 말이예요. '이제는...'




 ----------------------------------------------------




 1.요즘 고발자들이 퍼뜨린 한진그룹 일가의 녹취록을 듣고 있으면 두 가지 감정을 느낄 수 있어요. 짜증과 분노, 또는 분노와 짜증이죠. 나는 그들의 짜증과 분노가 어디에서 기원된 건지는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어떤 처방이 내려져야 하는지도 모르겠고요.


 다만 한가지 인상적이었던 건, 그들의 짜증과 분노가 엄청난 수준이라는 거예요. 어떤 계기를 통해 그렇게 증폭되어 있는지, 정말로 그럴 만한 계기가 있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엄청나게 증폭되어 있는 상태인 거죠. 그 자들은 일상적인 대화나 지시를 할 때조차 기관총을 쏘듯이 분노와 짜증을 마구 발사하잖아요? 심지어 총구의 방향조차 신경쓰지 않고 쏘는 느낌이예요. 그들에게 있어 개미 같은 존재일, 그냥 중간 관리자 급만 올라간 사람도 분노와 짜증을 맞춰야 할 상대에게 정확히 조준해서 쏘는 법을 잘 알아요.


 한데 그보다 훨씬 윗통에서 노는 재벌가 인간들이 오히려 스스로를 할퀴어 가며 감정을 발산한다...? 이건 이상하단 말이죠. 하긴 그야, 중간 관리자 급들은 표적을 잘 맞춘다기보다 잘못 맞춰선 안 되는 곳을 신경쓰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요. 


 

 2.늘 쓰듯이...나는 나를 똑똑한 편이라고 믿고 싶지만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내가 똑똑한가...똑똑하지 않은가...라는 사실은 실제론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나는 내가 될 수 있는 만큼 똑똑해지느라 꽤나 힘들었다는 사실...그 자체죠. 똑똑해지느라 힘들었던 나는, 똑똑해져야만 하는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똑똑해질 필요가 없는 사람으로 태어나는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곤 해요. 기본적으론 말이죠.


 그런 사람들을 몇 명 알아요. 거의 50살이 되어가고 아이가 둘쯤 있는데도 여전히 '건물주 아들'이나 'XX 아들'로 불리는 사람들 말이죠. 어떤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한심하다고 생각하겠죠. 한때는 나조차도 그렇게 생각했고요.


 하지만 50살이 다 되었는데도 여전히 '누군가의 아들'로 불리며 산다는 것...그건 그가 인생을 살아오며 고통받을 필요가 없었다는 뜻이거든요. 아무것도 되지 않으면 고통받을 필요도 없으니까요. 내가 알게 된 게 한가지는 있어요. 발버둥쳐서 무언가를 얻고 나면, 그건 발버둥쳐서까지 얻을 가치는 없었던 거라는 걸 깨닫게 된다는 거 말이죠. 그래서 스스로의 이름이 아니라 '누군가의 아들'로 불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마음도 가지게 됐어요.



 3.대부분의 사람들은 발버둥쳐서 무언가를 얻으면 보람을 느낄 거라고 생각하던데...글쎄요. 내가 이상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아니예요. 노력을 싫어하거든요.


 그야 사람들은 자신이 못 가져 본 걸 아쉬워하는 법이예요. 건물주 아들은 이렇게 얘기하죠. 자신이 빛날 기회가 없었다고 말이죠. 뭐 그 말은 맞아요. 어둠 속에서는 약한 빛만 내도 제법 빛처럼 보이잖아요. 하지만 휘황찬란한 곳에서는 제법 밝은 빛을 내도 이게 빛인지 뭔지 알 수가 없단 말이죠. 더 강력한 다른 빛들에 가려져서 안 보이는 법이거든요.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게 하나 있죠. 불꽃을 한번 일으키는 것과 계속 타오르게 만드는 건 천지 차이라는 거요. 어떤 남자가 나를 '작가님'이라고 부러워하길래 너무 한심해서 사실대로 말해 줬어요.


 '이봐 아저씨. '작가가 되는' 것과 '작가로 살아가는' 건 천지 차이야. 작가가 되어서 작가로 살아가는 거? 거기엔 노동뿐이라고. 1년이든 2년이든 3년이든 이야기를 마무리지을 때까지 매주 마감 일을 해야 해. 뭔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마감이 몇 시간 안 남았을 땐 이야기를 만드는 게 아니라 이야기를 때워내야 할 때도 있다니까? 그러다 보면 한가지는 확실히 깨닫게 되지. 난 이딴 노동따위나 하며 살려고 태어난 게 아니라는 걸 말야.'



 4.휴.



 5.그래요. 그게 작가든 변호사든 피아니스트든 뭐든간에 직업은 낭만적일 수 없거든요. 무언가가 실제로 된다면, 그때부터 앞에 놓여진 건 낭만이 아니라 노동과 노력뿐이예요. 이야기를 지껄이기 싫을 때도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고 피아노를 치기 싫은 기분일 때도 피아노를 쳐야만 하죠. 그러다 보면 이런 기분이 드는 거죠. 


 '어? 내가 이렇게 피아노 치는 걸 싫어했었던가? 이상하네. 난 분명 피아노 치는 걸 좋아했었는데.'라고요.




 6.그러나 요즘은 관점이 약간 달라졌어요. 위에 쓴 금수저들에게 안된 점이 그 점이긴 하니까요. 그들이 처음부터 부자였다는 사실...그 자체가 말이죠.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뭐야? 언젠 금수저인 게 좋은 거라며?'라고 하겠죠. 그건 맞아요. 하지만 그들의 가엾은 점도 바로 그거거든요. 그들은 '부자가 되는'기분을 느껴보지 못할 거라는 거죠. 그들은 부자가 될 기회를 처음부터 박탈당한 거예요. 왜냐면 그들은 원래부터 부자였으니까요. 이미 부자인 사람들은 '부자가 될' 수가 없거든요. 언제나 부자였기 때문에 그들에겐 자신이 부자라는 사실이 일상이니까요. 


 그야 거기서 돈이 더 많아질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건 부자가 되는 것과 거리가 멀죠. 돈이 더 많아져봐야 '부자에서 더 큰 부자'가 될 뿐이거든요. '가난한 상태에서 부자가 되는'것을 느껴볼 기회는 평생 없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사실 그들은 부자가 어째서 좋은 건지 심층적으로는 알지도 못해요. 뭔가 얄팍하고 피상적인 우월감, 안도감만을 가지고 살 뿐이지 정확히 어떻게 어떤식으로 좋은 건지는 모르는거죠.


 

 7.하지만 가난했었다가 부자가 된다면 그건 엄청나게 좋은 거거든요. 


 이건 내 분석이긴 하지만, 인간은 원래 그렇게 디자인되었기 때문이예요. '내가 어떤 사람이기 때문에' 신나는 기분을 느끼는 건 분명한 한계가 있어요. 어떤 것이든 시간이 지나면 일상화되고 일상에 편입되면 감흥도 없어지니까요. 정말로 좋은 건 이거죠. '내가 어떤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신나는 기분을 느끼는 거요. 


 왜냐면 이것만큼은 한 개인이 아무리 똑똑해도, 아무리 상상력이 좋아도, 아무리 공감 능력이 대단해도 절대 느낄 수 없는 거거든요. 어떤 끔찍한 악몽으로부터 깨어나서 다행이라는 느낌...그 느낌을 느껴 보려면 일단 악몽을 꿔 봐야만 하니까요.


 

 8.여기에는 과학적인 이유도 있겠죠. 당신이 가난한 상태에서 인생을 시작했다면 뇌의 성능과 흡수력이 가장 좋았던 시기...그런 어렸을 때의 대뇌 피질에 가난이라는 개념이 다각적으로, 철저하게 심어지게 되니까요. 가난한 사람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절대로 잊을 수 없는 기억과 감정이 뇌에 깊숙히 새겨지죠. 가난한 사람이 먹어야 하는 아침식사...가난한 사람이 맞는 여름방학...가난한 사람으로 맞아야 하는 크리스마스...그런 것들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단 말이예요. 소설책 따위를 통해 알게 되는 게 아니라 '진짜로' 알게 되는 거죠.


 게다가 유아-소년기의 뇌의 특수성에 의해 그 시기는 물리적으로 같은 시간이라도 체감상으로는 매우 긴 시간처럼 느껴지거든요. 나는 그것을 '1번 레이어'라고 불러요. 포토샾에서 첫번째로 깔린 레이어는 아무리 작업물이 발전하고 덧씌워지고 레이어와 필터가 얹어져도 첫번째 밑그림이니까요. 그 1번 레이어는 노인이 되어도 미약하게나마 남아있겠죠.


 그렇기 때문에 어렸을 때 가난해 뒀다가 커서 부자가 되면 감동할 기회가 많은 거예요. 그냥 걷다가도 갑자기 '와 씨발! 이거 대단한데! 내가 더이상 가난하지 않다니?! 아니...가난하지 않은 게 아니라 심지어 부자라니? 아멘! 할렐루야!'뭐 이러는 거죠.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뇌가 말이죠. 가장 민감했던 시기에 받은 자극은 평생 가거든요. 그러니까 어렸을 때 가난했다가 부자가 되면 가난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평생 동안 신이 날 수 있는 거죠. 신난다...라기보다는 안도감일 수도 있겠네요.



 9.하지만 부자인 것이 디폴트인 사람들은 글쎄요. 원래부터 부자인 사람들...그들에게 있어 부자라는 건 사건(event)이 아니라 정체성(identity)일 뿐이란 말이예요. 사건을 겪는 게 아니라 초기 정체성으로 부여되어 버렸기 때문에 부자인 게 뭐가 어떤식으로 좋은 건지 그들은 존나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죠. 무엇과 비교해야 할지 반대쪽 저울에 올려놓을 퍼즐조각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요. 가난한 상태에서 부자로 전환되는 걸 겪을 기회조차 없으니까 부자가 '되는 기분'도 평생 느껴볼 기회가 없고요. 가난했다가 부자가 되는 event를 겪어보지 않으면 부자라는 코끼리를 다면적으로 관측할 수 없게 되죠.

 

 그리고 전에 썼듯이 그렇거든요. 너무 많은 리소스는 나아가야 할 방향이 새겨진 나침반을 희미하게 만들어 버려요. 그래서 지나치게 부자인 상태로 태어나서 스스로 무언가가 되어 보지 못했거나...디폴트에서 벗어나 본 경험이 없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인 거죠. 그런 자들은 마음이 울적하거나, 분노가 들거나 짜증이 일 때 그걸 잘 제어하지 못할 거예요. 기분을 나아지게 할 만한 마법의 주문이나 쐐기(totem)가 없으니까요. 그런 자들은 총을 쏠 때 총구의 방향도 신경쓰지 않고 총을 쏘며 살게 될 수도 있겠죠.



 


 -------------------------------------


 



 ps1-한진그룹 녹취록이 계속 나오는 걸 보고 평소에 생각하던 걸 써봤어요. 써놓고 보니 평소에 하던 소리와 완전 반대되는 소리네요. 지난 몇년동안 '인생은 금수저로 태어나는 게 최고야.'이라고 지껄이곤 했는데 말이죠. 


 ps2-위의 대사는 예고편에서 '지금은'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제는'이 더 나은 것 같아서 그렇게 읽었어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3891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2302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0682
123168 프레임드 #425 [2] Lunagazer 2023.05.10 94
123167 축구 이적설 나오는 것 보다가 [2] daviddain 2023.05.10 181
123166 요즘 본 영화들에 대한 짧은 잡담... [7] 조성용 2023.05.10 673
123165 메시 아버지가 이적설 일축 daviddain 2023.05.09 164
123164 이번 주의 책 짧은 잡담. [8] thoma 2023.05.09 363
123163 프레임드 #424 [4] Lunagazer 2023.05.09 116
123162 퀘이크 리마스터 (2021) catgotmy 2023.05.09 154
123161 [웨이브바낭] 돌프 룬드그렌의 호러!!! '돈 킬 잇: 악마 사냥꾼'을 봤습니다 [8] 로이배티 2023.05.09 356
123160 비윤리적 농담. [13] 가봄 2023.05.09 719
123159 윤통 1년 뉴스([尹대통령 취임 1년] “경제산업 정책 잘했다” 51%...“못했다” 20% 불과 등) [3] 왜냐하면 2023.05.09 581
123158 빌보드 순위 19위 예측 - 피프티 피프티 분홍돼지 2023.05.08 381
123157 [영화바낭] 망한 선택 두 편, '카크니즈 vs 좀비스', '웨더링' 잡담 [2] 로이배티 2023.05.08 204
123156 아이고~ 아조시~ 이게 머선129? 앞으로 이거 우짭니까? [3] ND 2023.05.08 615
123155 에피소드 #36 [4] Lunagazer 2023.05.08 96
123154 프레임드 #423 [4] Lunagazer 2023.05.08 100
123153 (스포)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3] 보고 왔습니다 [8] Sonny 2023.05.08 634
123152 A small light 디즈니 시리즈 [6] Kaffesaurus 2023.05.07 342
123151 [웨이브바낭] 스티븐 소더버그표 심플 스릴러, '키미'를 봤습니다 [8] 로이배티 2023.05.07 419
123150 소닉 매니아 유튜버 플레이 catgotmy 2023.05.07 130
123149 프레임드 #422 [4] Lunagazer 2023.05.07 115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