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몇 년전 젤다의 전설: 야생의 숨결 이란 물건이 튀어 나와 뻔하고 흔해지던 오픈월드 게임판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지라 자타공인 오픈월드 장인 락스타가 수년간 빚어 내놓는 이 물건에 대해 게이머들 사이에선 굉장히 높은 기대치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만. 일단 레드 데드 리뎀션2는 젤다와 같은 '신선한 충격'과는 거리가 아주 먼 게임입니다.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어 보이구요. 추구하는 방향이 전혀 달라요.

 지금껏 락스타가 내놓은 게임들 중 천상천하 유아독존 수준으로 독보적인 스.토.리.중.심. 게임이고 자유도 같은 건 거의 없습니다. 오픈월드의 활용은 걍 심심풀이로 주어지는 수집 요소들을 제외하면 어디까지나 주인공 아서 모건의 이야기와 그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유저 몰입도를 증대시킨다는 목적에만 충실하도록 설계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이 게임을 구입해 볼 생각이 있으신 분들은 기대의 방향을 정확히 잡아 두시는 게 좋을 듯.



2. 대신에 그 '스토리'가 아주아주 훌륭합니다. 락스타 게임들 스토리가 다 그렇듯 이번에도 역시 기본적으로는 해당 장르 명작 영화들을 참고하고 장르 클리셰를 몽땅 가져다 붙여 놓는 방식으로 짜여져 있긴 합니다만. 일단 주인공 아서 모건의 이야기가 워낙 탄탄해서 중심을 잘 잡아주고 있는 와중에 '더치 갱단'의 동료 캐릭터들 같은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도 상당히 충실해서 메인 스토리의 감흥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 주고요. 캐릭터빨과 대사빨도 좋아서 정말 이야기 측면에선 그동안 스토리로 칭송 받던 거의 모든 게임들을 사뿐히 즈려밟고 간다는 느낌입니다.

 또 한 가지 인상적인 부분이라면 서브퀘스트들인데요. 심심풀이 개그 서브퀘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서브퀘들이 결국 아서 모건의 이야기, 심리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서 엔딩에서 더 큰 여운을 주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서브퀘 안 좋아하시는 분들도 어지간하면 다 플레이하면서 엔딩을 보는 편이 좋습니다. 어차피 2회차 플레이 할만한 성격의 게임도 아니어서 한 번에 최대한 처리해두는 게 좋기도 하구요.


 보니깐 각종 게임 어워드에서 자꾸만 갓 오브 워가 올해 최고의 스토리 게임 어쩌고 하며 칭송을 받던데 개인적으론 굉장히 황당합니다. 둘 다 엔딩 봤지만 이 둘은 그냥 아예 급이 다른 수준이라고 느꼈는데요. 아예 급이 달라서 레드 데드 리뎀션2를 후보에서 빼고 뽑은 게 아닌 이상에야 정말 납득 불가네요. ㅋㅋㅋ



3. 덧붙여 가진 게 돈 밖에 없는데 그 돈이 너무나도 많은 락스타 답게 미술 디자인, 음악, 음향 같은 부분은 정말 완벽함을 보여줍니다. 지금까지 해 본 오픈월드 게임들 중에 이렇게 풍광이 '리얼하게' 아름다운 게임은 본 적이 없네요. 바로 직전에 했던 어쌔신 크리드 오디세이를 보면서도 역대급 자연 풍광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게임은 그걸 또 사뿐히 뛰어 넘습니다. 레드 데드 리뎀션 1편의 4K 버전을 본 사람들이 요즘 게임 같다고들 칭찬을 많이 했는데 2편을 하다가 켜보면 고전 게임 같은 느낌.

 

 

4. 하지만 단점... 도 사실 많습니다.

 예를 들어 사실적으로 묘사된 '입체적' 지형 때문에 말 타고 달릴 때 땅바닥, 장애물을 보며 컨트롤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해서 1편처럼 시원시원하게 달리는 맛이 없습니다.

 또 위에서 이어지는 이유로 이동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좀 피곤해요. 1편처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막 달려도 되는 평원 지역이 좀 많았으면 좋았을 텐데 이번작의 배경은 계속 산, 언덕, 절벽, 숲, 강의 연속이라서. 그냥 보기엔 예쁜데 달릴 땐 살짝 갑갑한 느낌. 락스타도 이런 문제를 의식했는지 자동 운행(...) 기능 같은 걸 넣어두긴 했는데 이게 가다가 짐승이나 강도의 습격을 받아도 무반응으로 달리다 죽어 버리는 일이 많아서;

 또 현상수배 시스템은 나름 재밌는 요소이긴 한데 가끔 기준을 알 수 없이 사소한 상황에서도 막 걸려 버려서 귀찮을 때가 많았구요.

 또 미션마다 특정 조건 몇 개 이상을 충족하면서 클리어했는가를 따져서 등급을 주는 시스템이 있는데... 이런 거 넣지 말고 걍 미션 수행에 자유도를 좀 더 줬음 어땠을까 싶더라구요. 대부분 한 번에 충족하기 어려운 빡센 조건들인데 가뜩이나 미션 자유도가 없는 게임에 이런 것까지 넣어 두니 신경 안 쓰고 하면서도 갑갑한 느낌이.

 그리고 가장 아쉬웠던 게 이거에요. 미션 수행의 자유도. 예를 들어 메인 퀘스트를 진행할 때 GTA 4 같은 경우엔 그냥 툭. 하고 주인공을 던져 놓고 '뭘 어떻게하든 목표 죽이고 경찰 따돌리렴' 이라는 식의 퀘스트가 많고 그래서 상황에 따라 본인 뜻대로 루트를 만들어나가는 경우가 있었는데 레데리2의 경우엔 굉장히 세세하게 주인공의 행동을 정해 놓고 딱 그대로만 따르길 요구하거든요. (그렇죠. '영화적 연출' 때문입니다 =ㅅ=) 그래서 종종 갑갑함을 느꼈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근처 높은 건물 올라가서 저격하고 싶어도 옆에서 동료가 '따라와!' 라면서 닥치고 돌격해대면 무조건 따라가지 않으면 바로 미션 실패... 뭐 이런.


 근데 저는 정작 사람들이 많이 지적하던 '느리고 불편함'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었습니다. 루팅 모션이 갑갑하다는데 게임 하다 보면 굳이 여기저기 샅샅이 털어가며 아이템 먹어야할 이유가 없기도 하구요. 주인공 움직임의 느림은 걍 현실의 인간 수준인데다가 오히려 디테일해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기도 했구요. 걍 빠른 이동 수단으로 갈 수 없는 외진 곳에서 미션이 연달아 일어날 때 이동이 지루하더라... 라는 것 정도만 아쉬웠네요.

 


 5. 암튼 뭐 간단히 요약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레드 데드 리뎀션2는 락스타가 오랜 세월 돈을 폭포처럼 들이 부어 만든 호화판 블럭버스터 게임입니다. 그 돈을 헛되이 쓰지 않은 고로 하는 내내 눈과 귀가 즐겁고 심지어 담고 있는 이야기도 신선할 건 없지만 훌륭하구요. (개인적으로 조연들 죽거나 각종 이유로 퇴장할 때마다 이렇게 아쉬움을 느꼈던 게임이 거의 없었네요.)

 참신한 아이디어나 이후의 게임판에 영향을 줄 부분 같은 것 없는, 평범한 스토리 & 연출 중심 1자 진행형 액션 게임이지만 전체적인 완성도가 워낙 높아서 그냥 입다물고 즐기게 만드는 물건입니다. 개인적으론 '아캄 나이트' 이후로 이렇게 호사스럽고 화려한 돈맛(...)이 느껴지도록 잘 만들어낸 블럭버스터 게임은 처음이었네요.

 위에서 언급했던 의도된 불편함들, 그리고 초반의 느릿하고 지루한 진행으로 인해 초반엔 의외로 실망스런 느낌이 있습니다. 그리고 굳이 그런 불편을 십여시간(...)을 버텨야 하냐... 라는 부분에서 사람마다 생각이 달라질 거구요. 뭐 '강력 추천' 같은 건 하지 않겠지만 저의 경우엔 그 시간을 버텨내고 얻은 보상이 썩 마음에 듭니다. 그러니 잘 했어요 락스타. 즐거운 한 달이었습니다.



사족.

엔딩을 보고 나니 주윤발이랑 장국영 생각이 나더라구요.

스포일러가 될까봐 자세한 설명은 못 하겠지만 암튼 많이 생각났습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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