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 드라마이구요. 시즌 1, 2가 있고 '블렛츨리 서클: 샌프란시스코'라는 속편... 이라기보단 외전에 가까운 시즌이 또 있습니다. 그 중에서 제가 본 건 제목대로 시즌 1, 2까지인데... 딱히 스포일러는 없게 쓸 계획입니다.



 - 2차 대전 중 영국의 어떤 장소(...가 바로 '블렛츨리 파크'죠)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비추면서 시작됩니다. 이 분들은 극비리에 활동하는 암호 해독 팀이에요. 독일군이 날려대는 암호 통신문을 감청해서 해독을 하고 있고, 그 와중에 여성 4인조가 호흡을 맞춰서 결정적인 해독 공식을 찾아냅니다. 덕택에 연합군은 독일군의 부대 이동을 독일군보다 먼저 알 수 있게 되었으니 이 분들이 전쟁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거죠. 신이 난 4인조는 성공을 자축하며 '우리 절대로 평범하게는 살지 말자'며 서로의 꿈을 이야기하다가... 9년 후. 그냥 다 평범하거나 궁상맞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절의 런던은 여자만 노리는 연쇄 납치 살해범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구요. 제 버릇 개 못 준 4인조 중 한 명이 라디오로 듣던 뉴스들 내용을 토대로 범인의 패턴을 분석해 보려다가 벽에 가로막히고, 자기 혼자 힘으로는 어렵다는 걸 깨닫고서 왕년의 용사들을 불러 모으게 되는데...



 - 매우매우매우 노골적인 페미니즘 스토리죠. 

 배경이 1940년대에요. 아, 종전 9년 후니까 50년대 초반이겠군요. 뭐 아무튼 시절이 시절이다 보니 영국이든 뭐든 당연히 여성들의 삶은 억압과 무시의 연속이죠. 연합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우리의 천재 4인방 역시 전쟁이 끝나자 찬밥 비슷하게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시대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리즈 시절의 능력을 감춘 채 (애초에 국가 기밀 프로젝트였어서 어디가서 말했다간 바로 끌려가서 처벌당한다는 설정이긴 합니다.) 조용히 평범한 모습으로 살고 있구요. 그러다 결국 위에서 말한 사건을 계기로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하나로 연대하여 이 모든 억압과 혐오를 다 이겨내고 지들이 세상의 왕인 줄 아는 남자놈들이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낸다는 이야기입니다.



 - 시대 배경 선택이 아주 기가 막힙니다.

 일단 워낙 옛날이다 보니 과학 수사 같은 건 흉내도 내지 않던 시절이죠. 그러니 주인공들이 모여서 퍼즐 미스테리 속의 탐정처럼 머리를 굴리고 수수께끼를 풀고 직접 돌아다니며 증거를 수집하고 하는 일들이 그렇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2차대전 당시 영국의 극비 암호 해독팀'이라는 소재도 아주 좋아요. 주인공들의 천재성에 대한 알리바이도 되고, 또 '그런 능력에도 불구하고 찬밥'이 되어 산다는 이야기 속 설정에 대한 알리바이도 되구요. 결정적으로 과거 회상 장면마다 나오는 영국의 암호 해독 기계가 아주 간지나고 멋집니다. ㅋㅋ


 그리고 뭣보다도 주제와 아주 잘 어울려요. 21세기 드라마에서 이런 페미니즘 메시지를 담은 이야기를 만들다 보면 아무래도 남자 캐릭터들이 조금이라도 빌런스런 성격으로 보이게 마련이고, 그렇담 보는 사람들 입장에선 '에이, 쟤는 그냥 나쁜 놈이잖아? 요즘 멀쩡한 남자들은 안 저래.'라고 생각하고 넘기게 마련이지 않겠습니까. 근데 그게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하면 얘기가 달라져요. 예를 들어 주인공 중 한 명의 남편은 아주 좋은 사람입니다. 인격적으로나 능력으로나 주인공을 대하는 태도면에서나 나무랄 데가 없어요. 21세기 남성이라고 해도 이 양반만큼 자기 배우자를 존중하고 잘해주기는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죠. 그런데 어쨌거나 이 사람은 50년대 사람이고, 그렇게 훌륭하고 완벽한데도 불구하고 그 시대의 낡은 사고 방식을 아주 살짝 고수하는 것만으로 주인공에게 족쇄가 되어 버립니다. 굉장히 거부감 들지 않는 방식으로 교훈을 주는 거죠.



 - 추리물로서는... 꽤 근사하기도 하고, 적당히 좀 부족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일단 추리 과정 자체는 꽤 머리를 굴리는 내용들이 많고 따라가는 재미도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네 여성들의 특기들(패턴 분석, 초인적 암기력, 외국어와 행동력, 정보 수집력... 으로 각각 특화되어 있습니다. 무슨 히어로물인 줄. ㅋㅋ)이 발휘되면서 착착 손발을 맞추는 것도 보기 좋구요. 스릴도 꽤 강해요. 이 네 명 중에 강인한 신체 능력 내지는 전투 기술을 갖춘 사람이 한 명도 없고 남자들은 아예 끼어들지도 않기 때문에 주인공들이 조금이라도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굉장히 긴장이 됩니다. ㅋㅋ


 다만 경찰에게도 말 안 하고 개인적으로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범인을 잡게 하려다 보니 종종 꼼수가 끼어듭니다. 뭔가 막혔다 싶으면 마당발 캐릭터가 옛날 동료들 찾아가서 '아 쫌!!' 하면 필요한 데이터가 딱 떨어진다든가... 하는 패턴이 종종 튀어나오구요. '혹시나 해서 건드려봤더니 역시나였다'는 식의 전개도 적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의 전개를 충실하게 그려줘서 용서가 되긴 하는데, 그래도 반칙은 반칙이죠.



 - 영국 드라마를 본 후에 '연기가 좋았다'는 평을 적는 건 이제 좀 지겹네요. 왜 그런 걸까요? 혹시 영국 사람들의 말투나 표정 같은 게 애초에 '명연기'에 최적화 되어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런데 배우들 연기 이전에 일단 캐릭터들이 다 좋아요. 각자 캐릭터가 확실하고 거기에 적절히 어울리는 배경 사연이나 사정들이 배정되어 있어서 보다보면 그분들 처지에 충분히 몰입이 됩니다. 특히 주인공격인 '수잔' 캐릭터와 그 가족들 이야기는 마지막까지 꽤 울림이 있습니다.



 - 비주얼도 훌륭해요. 기본적으로 사극이잖아요. 고증의 충실도를 평가할만큼의 지식 같은 건 제게 없지만 어쨌든 그냥 보기에는 옛날 분위기를 아주 잘 살렸고 또 그게 굉장히 보기 좋습니다. 미장센도 늘 꼼꼼하게 신경써서 화면을 멋지게 잡는 편이구요. 스케일 큰 액션 같은 게 나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냥 늘 보기 좋습니다. 일단 영리하고 똑똑하고 정의로운 영국 아줌마들 넷이 간지나게 차려 입고서 예쁜 잔에다가 차를 담아 마시며 영국 악센트로 수다를 떨고 있는데 보기 좋지 않을 리가... (쿨럭;)



 -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상당히 잘 만든 여성 탐정물입니다. 보기도 좋고 듣기도 좋구요. 노골적인 교훈을 상당히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잘 녹여서 전달하는 이야기이기도 해요.

 분량도 짧아서 (두 시즌이 있고 시즌 1은 45분짜리 에피소드 셋, 시즌 2는 넷 밖에 안 됩니다) 후딱 달리고 정리하기도 좋네요.

 어지간하면 재밌게들 보실 거라는 믿음을 갖고 비교적 맘 편히 추천합니다. ㅋㅋㅋ



 사족으로.


 - 시즌 1은 에피소드 셋이 모두 하나의 사건인데, 시즌 2는 에피소드 1, 2가 사건 하나이고 3, 4가 전혀 다른 사건 하나입니다. 근데 이야기상 시즌 2의 에피소드 1, 2까지가 완결이고 3, 4는 보너스 에피소드 같은 느낌을 줘요. 왜 이런 식으로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좀 튀더라구요.

 시즌 3은 전혀 기약이 없는 가운데 주인공들 중 두 명만 나와서 미쿡으로 가 활약하는 내용의 '블렛츨리 서클: 샌프란시스코'가 나와 있습니다. 근데 본편은 두 시즌 에피소드 다 합해서 7개 밖에 안 되는데 이 '샌프란시스코'가 혼자서 에피소드 여덟개에요. 왜죠. ㅋㅋㅋ



 - 저 빼고 다들 아시겠지만 '블렛츨리 파크'는 실제로 영국이 운영했던 독일군 암호 해독팀이 활동했던 곳이고 거기 멤버 중엔 그 유명한 전설의 레전드 앨런 튜링이 있었으며 이 분이 블렛츨리 파크에서 활동했던 이야기는 이미 '이미테이션 게임'으로 영화화까지 되어 있고 뭐 그렇습니다.



 - 넷플릭스 수사물 치고는 보기 드물게 15세 관람가입니다. 특별히 야한 장면도 안 나오고 잔인한 장면도 안 나와요. 온가족의 수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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