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민공원 부지는 한때는 일본인들의 경마장이었고, 그 다음에는 일본군의 훈련장이었다가, 유엔 산하기구가 짧게 사용했던 시기를 거쳐, 꽤 오랫동안 미군부대가 들어섰던 곳이었다고 합니다. 시민공원으로 조성된지는 이제 5년 남짓 된 걸로 들었는데, 지역 근현대사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공공시설에 흔히 있는 각종 안내판을 읽고 있자면 이런건 누가 썼을까 가끔 궁금해질 때도 있는데.. 이 곳의 경우, 일단 야외 시설 안내문들은 의욕 없는 누군가가 썼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문장에서 성의가 별로 안 느껴져요.


['말굽거리(경마트랙)'. 이곳은 1930년대 일제 강점기 때 경마를 즐기던 장소로 마권판매소와 함께 유일하게 원형이 남아있는 곳으로 길이 1,200m 폭 15m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굉장히 규모가 큰 경마장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설계 당시 시설명은 "경마트랙"으로 트랙 전부를 보존하고자 하였으나 공원조성 계획으로 인해 일부 선형이 단절된 부분이 불가피하게 발생되었다.

그러나 경마트랙의 전체적인 형태와 느낌을 살리고자 "황토포장"으로 시공하여 최대한 원형에 가까운 분위기를 연출하였으며 100년 만에 부산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것을 기념하여 '말굽거리'라 이름을 지었으며 시민정서에 맞는 새로운 거리문화 창출과 역사의 장으로 기억되는 장소가 될 것이라 기대한다.]


이름이 말굽거리이지 공원 내부 길인데.. 무슨 거리문화를 창출하려고 그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반면, 역사관 내에 있는 설명문들은 그래도 뭔가 글쓰는 사람이 쓴 게 아닐까 하는 인상입니다. 적어도 말굽거리 적은 사람과는 동일 인물이 아닌 게 분명합니다. 

시대상을 재현해놓은 디오라마 앞에 나름의 감성도 느껴지는 설명들이 적혀 있어, 황석영 소설의 한 대목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마을 빨래터'. 캠프 하야리아 미군과 마을 주민과의 첫 만남은 '빨래감'을 통해서였다. 전쟁 당시 급수사정이 좋지 않아 군복 세탁에 불편을 느끼던 미군들이 하나씩 철조망 밖 주민들에게 빨래감을 맡기기 시작했고 마을 사람들도 벌이가 괜찮았기 때문에 이들의 거래는 부대 안에 세탁소가 생길 때까지 이어졌다. 한 벌에 100원(당시 쌀 한 되 가격)이었고 보통 10벌 정도 받아서 세탁했다. 우물이 없는 집에서는 도랑에서 물을 길어와 빨기도 하고 밤에 큰 개천으로 가져가 빨고난 후 주변에 널어 말렸다. 때로는 미군들에게 흰 세탁비누와 떨어진 군복을 받기도 했는데 흰 비누는 다른 곳에 팔고 군복은 그냥 못입고 염색해서 입었다.]   


['해피 뉴욕? 유 바이 램프?'. 부대가 들어서고 철조망이 생겼지만 마을 아이들에게는 엄격한 경계가 아니었다. 꼬마들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깡통과 베어링 등을 가지고 놀았고 먹거리도 얻을 수 있었다. 또한 미군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팔아 돈을 버는 재미도 알았다. 전쟁 초기 전기가 공급되지 못한 텐트에서 야영하던 미군에게 램프를 1달러에 팔았다. 이때 외친 소리가 "해피 뉴욕? 유 바이 램프?"였다. '해피 뉴욕'은 '해피 뉴 이어'란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것이었다.]


['노점상'. 미군부대 주변과 시내 곳곳에는 거리에서 미군부대 물품을 파는 노점상들이 있었다. 물건들은 부대 내에서 훔쳐오거나, PX를 관리하는 미군과 짜고 몰래 빼돌리거나, 또는 비교적 구매가 자유로운 양색시를 통해 구했다. 품목은 담배, C레이션, 커피, 옷, 라이터부터 라디오, 카메라, 전축까지 다양했다. 담배는 선호도가 높은 만큼 단속도 심해서, 70년대 범전동에서 담배를 싣고 택시로 가서 국제시장에 내리자마자 단속반원들에게 잡히는 경우도 많았다. 라이터도 작은 전기불이라하여 사람들이 신기해 했고, 부대에서 흘러나온 옷은 제법 잘 사는 여자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한편 토마토와 오렌지 같은 과일도 인기 품목이었는데 60년대 중반에 오렌지를 부대에서 가지고 나와 서면 태화극장 앞에서 15원에 팔면 하루 술값은 해결되었다. 무엇보다 가장 활발한 유통경로는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물건들이 남포동 국제시장에서 판매되는 루트였다. 은밀한 통로로 거래되는 이 거래는 부산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결코 적지 않았다.]



-역사관에서는 몇 개의 유서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일본군이 연합군 포로를 관리하기 위한 군속을 사실상 강제징용을 했는데, 부산 훈련소에서 훈련받은 3천여명이 동남아 각지로 파견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한국인 포로감시원 중 일부는 전범으로 몰려 재판을 받았고, 징역을 살거나 사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평양의 목단봉, 전남포 옥천대, 우산장을 걸은 지도 4년 전으로 옛 일이로구나. 동남아시아에서 군속으로 3년 일하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전남포의 사과 홍옥과 조국의 영광.

 지금 한창 나이에 은혜를 모르는 영국, 네덜란드 포로 때문에 세상을 떠나가는구나. 이 슬픔을 누구에게 말할까. 하지만 나는 행복하다. 신성한 천주교의 신자다. 

구세주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나는 조금도 그들을 욕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사랑을 주장하셨는데, 평화로운 세상에 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을 따라 전쟁터에 나간 것이 신성에 벗어난 죄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동포여, 조국의 자유 독립을 이루어 한국을 스위스 중립국과 같이 전쟁을 모르는 영원한 평화 국가로 건설하십시오.

조국이 독립하는 데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더 바라는 거 없이 나는 영원한 삶을 사는 천국으로 갑니다. 

김 군도 천주교를 믿고 신성한 신앙생활을 하세요. 

그리고 전도하세요. 1946년 10월 21일. 창이 형무소 사형감방. 전남포 장수업.


평안도 출신 육군 군속. 1946년 11월 22일 싱가포르 장기형무소에서 사형]


[너무나도 분주한 일생이었다. 26년간 거의 꿈속에서 지내왔다. 

불꽃처럼 사라져 버렸다. 이 짧은 일생동안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완전히 자신을 잊고 있었다. 모방과 허무함의 연속이다. 

왜 좀 더 살지 못했는가. 비록 어리석고 불행한 삶일지라도 나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지식이 무엇인가, 사상이 무엇인가.

적어도 내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이 남에게서 빌린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 것을 내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니. 

이 얼마나 가련한 일인가. 친구여, 형제여, 자신만의 사상을 가지시오. 지금 나는 죽음을 앞두고 내 것이라곤 거의 없다는 사실에 실망하고 있다. 다시 한 번 고향 생각을 해 보지만 잘 정리되지 않는다. 

아니, 부모님과의 끈이 점점 끊어져 가고 있는 듯하다. 

내 인생 최대의 고통이다. 이 방을 나갈 때까지가. 

그것도 이제 거의 끝나고 얼마 남지 않았다. 자, 힘내자. 

9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느긋하고 유유히 울려 퍼진다. 

아버님, 어머님 감사합니다. 누님, 아우야 행복하기를 바란다. 

1번 열차 출발! 장하다. 장하다. 나도 그렇게 하리라. 앞으로 2,3분이다. 

나도 저렇게 만세를 외치리라. 왔다. 때가 된 것 같다. 이것으로 이 기록을 마치려 한다. 

세상이여, 행복이 가득하라. 조문상. 


개성출신 군인 군속. 1947년 2월 25일 싱가포르 장기형무소에서 사형.] 


[저는 1943년 경에 태면철도를 건설하기 위해 타이완의 톤찬이라는 곳에서 영국군 포로 250명을 관리했었습니다.

식량 및 위생시설 부족으로 1명이 병들어 죽은 일에 대한 책임을 물어, 전쟁이 끝난 후 전쟁포로의 대우에 대한 법규 위반으로 기소되었습니다.

싱가포르 영국군 군사재판에서 1946년 7월 23일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저의 죽음에 대해 여러분은 슬프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제가 어리석어 여러분께 걱정을 끼쳤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행복을 빌며, 기분 좋게 하늘로 떠나 환생하여 항상 여러분 곁에 있을 것입니다. 

사형 집행을 받을 전날 밤, 꿈에서 형수님이 빨간 웃옷에 노란 아래옷을 입고 계신 모습을 보았습니다.

다음 세대에 다시 태어나 이 원한을 풀 수 있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형님, 도와드리지도 못하고 걱정만 끼쳤네요. 남동생아, 나의 마음을 이해해주고 건강하게 지내라. 언제나 나는 지켜보고 있다.

형수님,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다음 생애의 저라고 생각하세요. 행복하시길 빕니다.

아버님, 어머님, 제가 사랑하는 부모님, 매일 천지신명께 기도해주시는 그 은혜에 보답도 못하고 죽어가는 불효의 죄를 용서해주세요.

비록 저의 몸은 땅 밑에 있어도 영혼만은 꼭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할 것을 잊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의 행복을 빌며, 동양 평화를 위한 사람으로서 떳떳하게 떠납니다. 천광린.


서울 출신 육군 군속. 1947년 1월 21일 싱가포르 장기형무소에서 사형.] 



-얼마전에 본 영화 스윙키즈가 생각이 나는데, 한국전쟁 당시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탭댄스를 배우는 북한 포로 이야기입니다. 흥행은 별로였던 것 같은데, 평은 나름 좋아서 찾아본 영화였어요. 

전쟁과 이데올로기의 대립이라는 무거운 배경에 춤을 접목시킨 공들인 영화더군요. 주인공인 엑소 디오도 근사하고요. 중국인 포로 댄서로 나오는 김민호의 존재감도 상당합니다.

근데 왜 끝까지 집중하기가 힘들었는지 모르겠어요. 요즘의 제 집중력 저하의 문제인지, 영화 구성 자체가 실제로 엉성한 탓인 건지 판단이 잘 안되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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