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행길] 42. 자아를 놓아버리기...

2011.09.11 00:31

being 조회 수:6064

1.


어린 시절, 저는 혼자 교회에 다녔어요. 키우기 힘든 아이로 태어나서(태어날 때부터 시도 때도 없이 빽빽 울어대고 지독히도 민감하고 엄마한테 엄청 집착하는 아이 있잖아요.) 젊은 부모님을 참 고생시켰던 저는, 저 나름대로도 세상사는 게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변하지 않는 무언가, 절대적인 안정, 평화 같은 것들을 원했나 봐요. 이는 종교의 영역이지요. 그리고 한국에서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종교 공간은, 여기저기 널려 있고 생면부지의 어린아이가 가면 초코파이도 쥐여주고 친절하게 품어주는 교회에요. 그래서 모태신앙이 아니었고 가족 중 기독교인이 한 명도 없었음에도, 저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 제 발로 교회를 찾았어요.


돌이켜보면, 절대적인 무엇에 대한 생각은 아주 어릴 때도 가지고 있었어요. 세 살? 네 살? 유아 시절, 어머니가 슈퍼에 가셨는지, 집에 안 계셨어요. 막 잠에서 깬 저는 어머니가 사라진 것을 보고 하늘의 누군가를 (-_-) 향해 물건을 던지며 '엄마를 내놔'라고 패악을 부렸죠. 당시에도 저 너머의 무언가에 대한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교회에서 그걸 찾아보려고 했어요. 어린이에게 교회는 재미있는 곳이에요. 친구들과 놀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고, 선생님도 좋았고 여자 전도사님도 재미있었고, 목사님 설교는 좀 재미없었지만, 뭔가 경건한 분위기라던가 찬송가 부르는 것은 좋았어요. 그렇게, 수많은 이사 와중 자연스럽게 많은 교회들을 조금씩 다니며 다양한 개신교 문화를 접했죠. (굉장히 다양해요-_-) 하지만, 저는 교회에서 제가 찾던 무언가를 찾는 데 실패 했어요. 제가 어려서였을 수도 있고, 교회에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는 못하겠고, 단지 아직 때가 아니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혹여 찾았다 하더라도, 신에 귀의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죠. 사춘기시절, 신에 투신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던 와중, 노골적으로 이런 식의 생각을 했던 것이 기억나요. '진심으로 기독교인이 되고, 신에게 나를 투신하면, 나를 포기해야 하는 것 아냐? 내 맘대로 못하잖아. 불안해. 신을 어떻게 믿지? 신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것 보다 내가 혼자서 하는게 훨씬 잘할 것 같은데. 아니, 사실 내 맘대로 살고 싶은걸. 신에게 안 갈 거야. 혹 간다 하더라도 나중에, 실컷 즐기고 난 다음에. 언젠가.' 이렇게, 저는 명백히 의식적으로 '자아'를 위해 '신'을 밀어내었죠.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고 머리가 크고 학문들, 특히 자연과학, (그리고 도킨스-_-) 사회과학, 종교학 그리고 페미니즘의 세례를 받으며, 또 개신교와 타종교와의 공존이라는, 당시 저로서는 풀 수 없었던 씨름거리를 놓고 씩씩거리던 와중, 결국 종교에서 떨어져나갔어요. 그렇게 저는 신 대신 자아를 택한 후, 학문 가치관 새로운 개념들을 받아들이며 자아를 살찌워갔어요. 하지만 저는 현실 경험이 미천했고, 영특하지도 지혜롭지도 않았으며, 한 학문의 대가도 아니었어요. 그저 다양한 학문을 입문용 강의와 마구잡이로 읽어치운 교양서적과, 당시 내가 존경하던 사람들의 의견을 경험으로 검증하지도 못하고 비판적인 판단으로 걸러듣지도 못하고 제 머릿속에 맥락 없이 쏟아부으며, 제 자아는 속이 텅 빈 채 비정상적으로 부풀어가고 있었어요. 

 

 

2.

 

사회 모순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과 비판적 시선은, 특히 머리가 막 자라나는 대학생에게는, 분명 필요해요. 하지만 당시 저는 합리적 판단력, 비판적 논리력, 현실에 대한 동물적인 직감 같은 것을 직접 키워 나간 것이 아니었어요. 오히려 그런 것들을 이미 갖춘 타인이 소화해서 뱉어놓은 것을 어설프게 집어삼키다 체하고 설사한 것과 같았어요. 그래서 막 싹트기 시작한 제 자아에는 소화되지 못한 생각들이 덕지덕지 눌러붙게 되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가치관과 세계관의 프리즘은 얄팍하고 조잡하고 뒤틀려 있었어요. 그리고 그 '생각'들은, 애초 병들어 있던 제 자아와 결합하여 문제를 일으켰죠. 그것들은 제 내면의 갈등을 더욱 부추기고 확대시켰어요. 또 외부 세계를 직접 경험하며 최대한 있는 그대로 관찰하며 하나씩 알아간 것이 아니라, 앙상하고 소화시키지 못한 개념과 생각의 틀로 걸러낸 후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그 비틀린 인식에 암울한 내면의 색조까지 덧칠하며 받아들인 외부 세계는, 너무 우울하고 끔찍했어요. 인지행동치료에서는 이를 인지삼제라 해요. 자신에 대한 부정적 신념, 타인과의 관계와 세계에 대한 부정적인 신념. 그리고 나와 세계의 미래에 대한 부정적 신념. 전 나와 세계에 대해 암울해하다, 희망을 열정도 잃어버리고 있었죠.


 

그리고 주로 집어삼킨 가치관의 종류도, 그 당시의 저에게 문제가 되었어요. 전 피상적으로 집어삼킨 그 생각들을, 스스로 삶을 책임지는 것을 회피하는 핑계를 대는데 오용해버렸죠. 시대와 사회구조, 시스템에 대한 명확한 인식은 분명히 필요해요. 문제에 대한 인식이 선행되어야 개선, 혹은 혁명을 꿈꿀 수 있죠. 하지만 외부의 비판에만 몰두하다 보면, 자기의 내면을 관조하는, 고통스러운 일은 최대한 미루게 되어요.  더 큰 문제는, 저같이 나약한 정신 상태인 사람들은 외부를 핑계로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것을 회피하려 하기 쉽다는 거에요. 변화는 온전히 ‘개인’의 몫이에요. 국가가, 사회지원시스템이, 종교단체가, 친구와 착한 사람들과 가족들이 도와줄 수 있고, 도와주어야 해요. 하지만 그들은 조력자일 뿐, 결국 진정한 내적 변화는 삶의 유일한 주체인 개인이 이루어내는 것이죠. 우리는 우리 삶에 책임을 져야 하며, 저는 제 우울증에 책임을 져야 해요. 안 좋은 유전자, 부정적 양육 환경, 끔찍한 외부 사건, 그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그 자리에 선 것은 결국 나의 선택이었고, 그렇기에 그 자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것도 나 뿐이었어요. 삶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철저히 자각할 때, 오직 그때서야 적절한 치료와 외부의 도움, 사회적 지원과 건전한 시스템이 제대로 힘을 발한다고, 지금 와서 저는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당시 저는, 막 알게 된 ‘문화, 시스템, 상황의 영향력에 인간은 너무 나약하다. 진정한 개선은 사회와 시스템의 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라는 생각에 너무 몰입하여,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결국 내 삶은 ‘나’의 책임이라는 점을, 고의로 무시했어요. 그래서, 제대로 된 변화를 이루어내지 못한 채, 주저앉아 투덜대고 있었어요.  그 당시의 저는 저를 둘러싼 사회도, 저 자신도, 모두 다 무섭고 싫었어요


그렇게, 신보다 내가 더 잘할 것 같다는 같잖은 망상 속에 신을 버리고 선택했던 제 자아는, 어설픈 알음알이와 제대로 소화도 못한 가치관, 개념들로 속 빈 풍선처럼 부풀기만 했던 제 자아는, 현실과 나에 대해 불만족스러워하면서도 제대로 된 변화는 만들어내지는 못했던 제 자아는, 이상적 가치관과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속물적 욕망 사이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며 스스로 공격하다가 결국 자멸해버린 제 자아는, 저를  질질 끌어 우울증의 나락으로 던져 넣었어요.

 

 

 

3.


제가 양호한 상황이었다면, 허겁지겁 집어삼킨 가치관, 세계관 따위를 적당히 털어내거나 혹은 제대로 소화하려 노력하면서, 자아를 유연하고 탄력적으로 개선하는 것으로 충분했을지 몰라요. 심리치료를 받든, 스승이나 인생 선배들과 이야기를 하든, 어떤 식으로든 나를 사랑하는 능력을 기르고, 내면의 갈등을 직시하고 풀어내고, 부정적이거나 비현실적인 사고구조나 신념 따위는 날려버리며 더 건강한 나로 태어나면 되었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땅 속 마그마 같이 부글대는 내적 갈등과, 외부 세계의 복잡함과 끔찍함을 나름 인지하고 소화하려 노력하면서, 해결 할 수 있는 것은 해결하고 통제력 밖에 있는 것은 적당히 무시도 하며, 매일의 일상을 건강하게 일궈나가는 그런 탄력적인 자아를 만들었으면 되었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제 자아는 너무 많이 망가져 있었기 때문인지, 자아 개선의 길은 멀고도 험난했고, 꽤 진전은 있었지만 충분하지 않았어요. 표면적인 사고방식을 합리적으로 긍정적으로 바꾸고, 깊은 곳에서 날뛰는 부정적 스키마들을 조절해가며, 나를 사랑하는 연습도 해가며 조금씩 개선되어 나갔지만, 그러면서도, 혹은 그러면 그럴 수록 더 깊은 곳을 건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가진 내면의 고통은 결국 본능적인 두려움과 욕망에 뿌리박은 것이고, 죽음에 대한, 생존에 대한, 더 나은 삶을 성취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타인의 애정과 관심, 성공과 부에 대한 욕망 따위는, 아무리 내 자아가 건전해지고 유연해지더라도 형태를 바꾸어 끊임없이 나를 괴롭힐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 당시 저는, 제 자아가 저라는 생각을 더는 유지하는 게 힘들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자아의 가장 도드라졌던, 수많은 생각과 뒤틀린 감정들 때문에 너무 고생하고 있었으니까요. 자아를 개선하고 자시고 간에, 자아 자체를 싹 다 털어내 버릴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어요.

.

 

 

4.

 

많은 고등 종교들이 목표하는 것 중 하나는, 일상적으로 나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자아를 놓는 것이에요. 나보다 더 큰 무엇, 신이든 도든 무엇이든에 온몸으로 귀의하든, 나란 애초에 허상이라는 것을 철저히 받아들이든, 내 뜻이 아닌 신의 뜻에 무조건 복종하든, 핵심은 '나'를 놓는 것이죠.

 


이에 대해 쉽게 이야기 해 놓은 에크하르트 톨레의 책, <Now :  행성의 미래를 상상하는 사람들에게>의 일부를 옮겨봐요.

오랜 역사를 가진 종교와 영적 전통...많은 차이가 있지만...모두가 일치하는 두 가지 핵심적 통찰...

 

(생략)

첫 번째 부분은 인간 존재의 ‘정상적인’ 마음 상태는 기능장애 또는 정신이상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강력한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자각이다.

 

(생략)

흰두교의 핵심...그것을 ‘마야’ 즉 환상이라고 부른다....라마나 마하리시는 한마디로 말한다. 마음은 마야다...불교...붓다에 따르면 정상적인 인간의 마음은 ‘두카 dukkah'를 초래한다. 투카는 고통이나 불만족, 또는 단순히 평범한 불행으로 번역할 수 있다. 붓다는 그것이 인간 조건이 특징이라 보았다. 당신이 어디로 가든 무엇을 하든 당신은 두카를 만날 것이며, 그것은 모든 상황에서 빠르든 늦든 모습을 나타낼 것이라고 붓다는 말한다. 기독교의 가르침..인류의 정상적인 집단 무의식 상태는 ’원죄‘의 하나다. ’죄‘는 가장 오해되고 잘못 풀이되어 온 단어다. 신약성서에 사용된 고대 희랍어를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죄를 짓는 것은 인간 존재의 과녁에서 빗나감을 뜻한다. 그것은 부주의하고 눈이 먼 채로 사는 것을 의미하며, 그리하여 고통을 겪고 고통을 일으키는 것을 의미한다....’죄‘는 인간 조건 속에 본래부터 내재해 있는 기능장애를 가리킨다.’

 

(생략)

두려움, 욕망, 권력욕...전쟁...광기...지구 행성 자체에 가하는 폭력...끊임 없는 갈등의 원인...(두려움, 욕망, 권력욕은) 타인과 자기자신에 대한 이해를 왜곡...모든 상황을 잘못 해석하며 자신의 두려움을 없애고 욕망을 더 만족시키기 위해 계획된 잘못된 행동들로 이끌려 간다. 그 욕망은 결코 채워질 수 없는 밑바닥 뚫린 구멍...하지만 두려움 욕망 권력욕...역시 기능장애가 만들어 낸 결과물...(그것을 내려놓으려는 시도는 실패)..더 좋은 인간, 더 나은 인간이 되려고 하는 노력...정교한 형태로 자신의 존재를 더 크게 만들려고 하는 시도..‘나’라고 여기는 이미지를 더 크게, 더 강하게 만들려는 욕망...

 

(생략)

두 번째 통찰, 인간의 근본적인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흰두교 가르침에서는, 때로 불교에서도, 이 변화를 깨달음이라고 부른다. 예수의 가르침에서 그것은 구원이며, 불교에서는 고통의 끝이다. 해탈과 견성도 이 의식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단어들이다....인류의 가장 위대한 성취는...자신의 기능장애, 자신의 정신이상을 자각한 데 있다...새로운 치료와 초월의 시작..

새로운 의식의 중심에는 생각의 초월, 생각 너머로 비상하는 새로 발견된 능력...자신 안에 생각보다 무한히 넓은 하나의 차원이 있음을 깨닫는 능력...끝없는 생각의 흐름을 자기 자신이라 믿었지만, 더 이상 그것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정의내리지 않을 것이다. ‘머릿속 목소리’가 내가 아니라는 자각은 얼마나 큰 자유인가.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그것을 아는 자다.

 

(생략)

 

 

5.

 

나 그 자체라 여기던 ‘자아’는 사실, 그저 육체가 태어난 후 발달시켜 온, 복잡한 개념 구조물이라는 것은 심리학자들이 먼저 이야기했어요. 분면 저도 그것을 배웠고, 머리로도 충분히 이해했어요. 그럼에도, 저는 그 두려움과 욕망 위에 감정과 생각이 뒤덮인 복잡한 덩어리를, 진정한 나 자체라고 착각하며 살아왔어요. 그런데 제 자아는 다른 사람들의 것에 비해 많이 병들었고, 그 덕에 우울증에 걸리고, 하여 치료를 위해, 혹은 너무 괴로워서, 나라고 착각했던 '자아'를 들여다보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이런 저런 종교서적과 영성서적을 읽으며, 또 몇 차례 직접 경험을 하며, 어느 순간 알게 되었어요. '어, 뭐야. 이건 내가 아닌데?'

 

'자아가 내 우울의 원천'이라는 것을 몸으로 알게 된 것은, 극심한 우울과 고통 와중 아무 신이라도 좋으니 제발 도와달라며 기도를 올릴 때였어요. 그러다 에크하르트 톨게가 극심한 고통 속에 일상적 자아와 그것을 보는 자신의 분리를 경험했다는 에피소드가 생각났죠. 그래서 저도 의식적인 분리를 시도했어요. 저 스스로 고통덩어리 그 자체를 밀어냈던 것 같아요. 그러자, 고통을 그득 담고 있던 나와, 그것을 지켜보는 제가 갑자기 분리되었어요. 그리고 그 순간, 우울감이 한 번에 사라졌어요. 그때 알았어요. 아, 자아가 정말 고통의 근원이었네. 심지어 그건 나도 아니었구나.

 

또 한창 인지치료를 하면서, ‘부정적인 생각을 인지, 평가한 후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바꾸'는 훈련을 지속적으로 받았어요. 이를 위해 우선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집요하게 관찰해야 하죠. 그러면 자연히, 관찰되는 생각과 관찰하는 나 사이에 거리가 생겨요. 그러면 자연스래 알게 되지요. 내 자신이라 여겼던, 자기 멋대로 날뛰며 인생을 복잡하고 우울하게 만들었던 그 생각이, 그저 관찰되고 교정될 수도 있고, 심지어 쓸모없으면 버릴 수도 있는, 그냥 '나에게 딸린 생각'이었을 뿐이라는걸. 그럼 나는? 생각과 감정을 관찰하던 그 녀석이겠죠.

 

일상적 자아와, 관찰하는 나의 분리 경험은 명상 상태에서 특히 강해졌어요. 제가 접했던 명상은, 불교의 위빠사나 명상이고, 그 명상은 해탈로 가는 수행방법으로 붓다 자신이 고안해 낸 것이에요. 그리고 원시불교 교리에서, 수행자는 해탈로 향해 가는 와중, ‘자아가 있다는 유신견'을 완전히 제거하게 된대요. '나'라는 것이 환상일 뿐이라는 것을 머리로 뿐 아니라 '경험'으로 안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이 명상법의 다양한 효과 중 하나는 '자아를 놓게 하는' 효과인 것이죠.

 

 

그래서인지, 형편없이 짧은 명상 경험 와중에도, 저는 자아가 그것을 보는 제 자신이 분리되는 경험과, 분리된 자아가 저를 반격하는 것을 '목격하는' 경험을 몇 번 하게 되어요. 위빠사나 명상의 기본은 자신과 세상을 알아차리는 것이에요.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평범한 의식 활동에 동원되는 일상적 주의와, 그 주의 사용 방식을 비판단적이고 수동적으로 알아차리는 순수한 상위주의가 동시에 발동하는 형태라고 해요. (자세한 것은 김정호 심리학과 교수님이 쓰신 <마음챙김 명상 멘토링>을 참조.) 그러니까, '알아차림'은,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비판단적으로(개념을 동원하여 선악 판단을 하는 것을 자제한 채) 또 수동적으로 (무언가를 교정하려는 의도 없이)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 알아차림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도록 하는게 위빠사나 명상의 기초에요.

 

그런데 나를 가만히 바라보면, 알아차리는 나와 일상적인 자아 사이에 틈이 생겨요. 당연히, 관찰은 관찰 대상과 관찰 주체 사이의 거리가 있어야 성립하니까요. (이 부분이, 인지치료와 위빠사나 명상이 접점을 이루는 부분이죠.) 그렇게 거리가 생기고, 자아를 관찰하다 보면, 다양한 경험들을 하게 되어요. 우선 나와 딱 붙어 나 자체인 줄 알았떤 생각, 감정, 욕구의 덩어리와 바라보는 나 사이에 살짝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것이 확실히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어요. 또 그 자아는 하나의 무엇이 아니라, 다양한 덩어리들이 복잡한 방식으로 얽혀있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돼요. 가만히 보면 이 생각 저 사고 이 가치관 저 덩어리 서로 싸우고 찍어누르고 뭔가 복잡해요. (스키마 치료에서는 이 덩어리들에 대놓고 이름을 붙이죠.) 또 자아는, 자기 나름의 규칙에 따라 활동해요. 스스로 생존하고, 강화하고,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목적을 가져요. 그리고 그 규칙은 사실 관찰하는 나의 안위와는 크게 상관 없어요. 이 것들은 불교 문헌에, 또 각종 영성 서적들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명상을 하면 그냥 직접 경험하게 되는 것들이기도 해요. 아, 이건(자아는) 분명 내가 아닌데? 근데 이거 또 난동피우네.

 


그러다, 그 자아가, 명상하는 저를 괴롭혔어요. 자신을 관찰하는 알아차림의 힘이 약해지면, 그래서 내가 자아와 다시 밀착되면, '죽자!!'는 말을 반복해대요. 그러다 다시 알아차림의 힘이 강해지고 자아가 나에게서 떨어져나가고 점점 힘이 약해지는 것 같으면 '살려주세요!!'하고 속삭였어요. 이건 것이 자학이나 공포 같이 감정으로 다가온 것도 아니고, 살아서 움직이는 생명체가 내지르는 사념같은 형태로 왔어요. 상담선생님께 이 이야기를 하니 '내가 과학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 같구나.'하기도 하시고, '소리로 들리더냐?' 걱정도 하셨지만 (환청은 정신분열 증상 중 하나이기 때문에, 환청이 경험되면 우울증보다 정신분열증 진단이 나올 수도 있었던거죠.) 다행히 음성이 아닌 사념의 형태였죠. 명상선생님은 그게 불교에서 말하는 '마라.'라고 하셨지만, 불교에 무지하던 당시 저는 '마귀라는? 무서워. 미신같애.' 했던 기억이 나요. 당시에는 그 목소리를 처리도 못한 채, 그저 가만히 알아차리다가 말았어요. 그나마, 다시 명상을 하지 않게 되면서 그 소리들은 사라졌고요.

 

시간이 흐르며 불교교리에 익숙해지고, 또 각종 영성쪽 이야기와, 심층심리 치유 과정등에 비슷한 경험들이 등장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저 나름의 생각을 정리 할 수 있었어요. 내가 미친게 아니었어. 그건 알아차림의 힘이 강해져서 더이상 나에 붙어 나인냥 기생하며 생존할 수 없게 된 자아가, 생존의 위기 앞에 내지른 비명 비슷한거였겠지. 부처가 해탈한 후에도, 종종 마귀의 형상으로 부처를 공격했다는, 또 40일의 금식을 한 후의 예수를 시험에 들게 했던 마귀와 흡사한. 그건 진정한 나를 공격하는 가짜 나, 자아였어.

 

자아의 힘은 참으로 막강해서, 명상을 해서 정신상태가 좀 맑아지려 할 때 마다 기가막힌 꼼수들로 번번히 저를 진창으로 집어던졌어요. 가끔은 내가, 그 자아가 나라고 생각하고 계속 인생을 살고 싶어하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요. 하지만 일부러 눈 감고 다시 잠들어 살다 보면 우울증이 또 재발해서, 결국 다시 명상을 해야겠구나, 자아를 떨쳐내야 하는구나, 알게 되지요. 우울증이 계속 재발하지 않았다면 전 분명 명상을 외면했을 거에요.  사실 명상은, 상당히 귀찮고 힘들거든요. 나라고 착각했던, 정작 들여다보니 생각보다 더 끔찍한 모양새를 하고 있는 자아를 계속 깨어서 지켜본다는 건, 사실 굉장한 고문이에요. 피곤하고 고통스러워서, 자꾸 눈을 감아버리고 싶어요. 하지만, 눈 감고 살다 보면 다시 재발하는 우울증. 그럴 때면 다시 눈을 뜨기 위해 낑낑대야 했어요. 이런 경험 와중에 저는 확신하게 되었어요. '알아차림을 놓지만 않는다면, 우울증은 재발하지 않겠구나.' 뭐, 알아차림이 자아를 놓게 하는 좋은 방법이고, 모든 심적 고통은 자아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니, 나름 당연한 일이겠지만.

 

 

 

6.

 

많은 종교, 영성 전통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전해요. '우리는 모두 집단적으로 미쳐있다. 인간이 겪는 심리적 고통의 근원은 모두 자아가 나라는 환상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제 우울증 역시, 그놈의 자아 때문에 생겼음을 알았어요. 그렇기에 우울증에서 해방되려면, 나아가 고통에서 더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자아를 놓아버려야 했어요. 그리고 이는 여전히 종교, 영성의 전문 분야에요. 사실 자아, 나를 놓는 것은 모든 고등종교의 목적 중 하나에요. 그들은 '자아를 놓고' 초월, 해탈, 구원에 이르기 위한 교리체계와 계율등 구체적인 길을 마련해 놓고 있죠. 저는 그 중 초기불교가 마련해놓은 위빠사나 명상을 운 좋게 접하게 된 것이고요.

 

종교, 영성, 심리쪽 서적들을 읽으면서 서서히 알게 된 사실은, 자아에서 벗어나서 고통을 소멸시키고, 신에게 구원받고,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고, 저 너머로 초월에 이르는 길은 굉장히 다양하다는 사실이에요. 하나의 신, 여러명의 신, 자연과 도. 연기법. 우주의 원리. 그리고 또 재미있는 것은, 영성과 자아의 초월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일견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다양한 전통과 가르침을 이리저리 순회하며 동시에 접하고, 그런 와중에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아 무던히도 헤맨다는 것이었어요. 많은 가르침이 있고, 다 심오해보이고, 가끔 다 사이비같아 보이기도 하죠. 그런 이들에게 어느 이상의 경지에 오른 스승들이 다들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어떤 길이든, 종국에는 결국 하나이다. 수많은 길 중 선택하게 된 자신의 길을, 부디 끝까지 걸어가라. 영적 발전의 길에 다른 사람의 성취를 곁눈질 하는 것 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자신이 선택한 길에 진심으로 자신을 던지고, 머리로만 이해하고 말로만 떠드는 것이 아니라 부디 온 몸으로 '행하라.'

 

그래서 저는 우선 제 손에 걸린 위빠사나 명상법과, 그것의 기반이 되는 초기 불교 교리를 쭉 따라가보기로 했어요. 아직도 '종교를 다시 가지게 되었다!!!'고 하기는 꺼려지지만, 그 가르침에서 하라는 대로 행하고 그 결과를 경험하며, 두 눈 똑바로 뜨고 확인해보려고요. 그 길이 맞는지. 아, 하지만 여전히 기독교 계열 신비주의 서적에 혹하는 저를 보고 있자면, 난 아직 기독교 문화권이 좋은 것일까 싶기도 하고요. 음, 뭐 상관 없죠. 어떤 길을 선택하든, 결국 제가 해야 할 행동에는 큰 차이가 없어요. 자아를 버리고, 타인과 공감하며, 황금률을 삶의 준칙으로 삼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감사하며, 살아있는 모든 것에 친절하고, 부디 선하게 살라.

 

이렇게, 자아를 움켜쥐고 떠났다가, 다시 영성과 종교 언저리로 돌아왔어요. 내가 신보다 더 잘할 것 같다며 신을 발로 뻥 차는 불경을 저질렀던 녀석이, 세상에 나가 좌절하고 얻어터지며 더러운 바닥에서 구른 끝에, 결국 항복하고 백기 투항한 기분도 들고. 직접 경험하니, 성경의 돌아온 탕아는 참으로 적절한 비유네요. 다 그놈의 자아와, 우울증 덕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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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339 [악마를 보았다]를 보고... [26] taijae 2010.08.11 6280
123338 (질문) 단백질 보충제 먹으면 살찌나요 [6] 불별 2012.04.19 6278
123337 첫날밤 아내에게 '업소여자 같다.'고 했다가,, [18] 고인돌 2011.09.15 6278
123336 산고추에 대해 아시는 분 계신가요? [3] 해삼너구리 2010.08.03 6278
123335 가인의 뒤를 이을 눈화장 마스터(사진 다수) [11] 윤보현 2010.08.28 6275
123334 한우 설렁탕의 비밀 [21] 자본주의의돼지 2013.02.26 6273
123333 이효리 웨딩사진 [12] JCompass 2013.09.03 6272
123332 강남과 강북의 차이 [6] 봄날의곰 2010.06.03 6272
123331 지금 삼성역 상황 사진 [15] chobo 2010.11.11 6271
123330 너무 충격이 큽니다 [28] ssoboo 2020.07.10 6270
123329 김연아의 이번 갈라쇼는 [11] 닥터슬럼프 2013.03.18 6270
123328 진중권의 확인사살.. [6] 마르세리안 2012.10.28 6270
123327 친구 진짜 별로 없는사람? (양심적으로) [41] 사람 2010.08.20 6270
123326 김연우가 매우 매우 좋습니다. [4] 지루박 2010.09.19 6270
123325 베네딕트 컴버배치 키가 184나 되네요 [12] magnolia 2013.02.01 6269
123324 [바낭]자꾸 헬스장에 관심가는 분에게 눈길이.. [31] 은빛비 2012.04.25 6268
123323 김연아 "금·은메달보다 나란 선수를 기억해달라" [18] 마당 2014.02.21 6267
123322 외부에서 보는 듀게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39] Kaffe 2010.10.09 6267
123321 정말 무서운 공포 영화는 없는가 [29] 사냥꾼 2014.07.06 6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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