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의 이야기...(결벽)

2017.09.11 05:11

여은성 조회 수:793


 1.언젠가 썼던가요? 몇년 전에, 대학 시절부터 알던 누군가(이하 29)와 식사를 했던 얘기요.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하는데 카드기에 카드를 긁다가 계산원이 그만 카드를 바닥에 떨어뜨려 버렸다는 일 말이죠.


 계산원이 내 카드를 바닥에 떨어뜨리자 29는 핀이 뽑힌 수류탄을 발견한 정찰병처럼 재빠른 동작으로 뒤로 물러났어요. 폭발에 휘말리지 않으려는 동작이었어요. 내가 폭발할 거라고 생각한 거겠죠. 계산원도 29의 신속한 동작에 저 사람 왜 저러나...하고 갸우뚱거렸던 것 같아요. 


 당연히...나는 폭발하지 않았어요. 하하! 말도 안 되는 거죠! 카드가 바닥에 떨어진 정도로 폭발하다니, 그런 일에 일일이 화를 내며 살면 사회 생활을 어떻게 해요? 나는 계산원에게 물티슈를 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물티슈로 카드를 닦은 후...부러뜨리고 쓰레기통에 넣는 대신 지갑에 넣었어요. 29는 이 모든 과정을 놀랍다는 듯이 바라봤어요. 가게를 나오자 29가 물었어요.


 '은성아, 너 괜찮은거야?'


 라고요. '하아, 요 몇년 간 재사회화하느라 힘들었다고요.'라고 대답할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그러는 대신 그냥 다른 대답을 했어요. 


 '너희 인간들은 그 동안 나에게 속은거예요. 사실 내겐 결벽증이 없거든요. 카드가 바닥에 떨어지면 파기하고 은행에 새로 발급받으러 가던 건 그냥 심심해서 결벽증이 있는 척 연기해봤던 거였죠.' 


 

 2.그 일이 있고 얼마 후 금요일, 어딘가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어요. 직원 둘과요. 하지만 그 날은 의리-이런 말 정말 싫어하지만-로 가준 거였어요. 그래서 재미없었어요.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인간은 그렇게 만들어져 있잖아요. 새로운 좋은 것이야말로 좋은 거지 익숙한 좋은 것은 익숙한 것일 뿐이니까요. 옆에 있던 자가 이대로는 너무 재미없으니 진실게임이라도 하자고 했어요. 그래서 '야한 질문을 하고 싶으면 그냥 야한 질문을 하면 되잖아.'라고 대답해 줬죠. 그러자 그 직원은 웬 뜬금없는 소리냐고 했어요. 그래서-


 '진실 게임은 어차피 그런 걸 물어보려고 하는 거잖아. 그러면 그냥 야한 걸 물어보면 되는 건데 말이야. 왜 중간에 귀찮게 진실게임을 끼워넣는 낭비를 하는지 이해가 안 가. 진실게임같은 쓸데없는 짓거리를 뭐하러들 하지?'


 라고 설명해 줬죠. 그러자 직원은 야한 질문도 하지 않고 진실게임을 하자고 하지도 않고 그냥 조용히 입을 닫았어요. 그리고 몇 분 후 다시 입을 열었어요. 그럼 진실게임말고 네가 재미있어할 만한 게임을 하자고요.


 

 3.나는 누군가 밥을 사준다...특히 내가 먹고 싶은 걸 제대로 사준다고 할 때 늘 먼저 물어봐요. 가격의 상한선이 무제한인건지 아니면 있는 건지요.


 그리고 매우 유감스럽게도, 상한선이 있는 거라면 네가 생각하는 가격의 상한선을 말해 달라고 하죠. 그럼 그 안에서 식당을 찾아 보겠다고요. 


 사람들은 왜 그런 걸 물어보냐고 꽤 이상해하는데 이건 당연한 거잖아요. 사실 누군가 밥을 살 때 정말 중요한 건 그게 어떤 문화권의 음식인지, 서울 어디의 식당인지가 아닌 거예요. 어차피 서울은 어디에서 어디로 가든 30분이면 가기 때문에 접근성이 중요한 도시가 아니죠. 그러니까 얼마짜리 식당인지가 중요한 거예요. 누군가 밥을 사 준다는데 내가 가고 싶다고 해서 아무 식당에나 막 들어갈 순 없으니까요. 그래서 상대가 내게 사 주려는 식사 가격의 상한선을 물어볼 수밖에 없어요.


 직원이 물어본 게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어요.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아무 게임이나 막 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물어봤죠. '수위의 상한선'이 어디까지냐고요. 직원들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대체 뭔 소린지 잘 모르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말해 줬죠.


 '여긴 이상한 가게가 아니잖아. 그 점을 존중하기 때문에 너무 위신 떨어지는 일은 시키고 싶지가 않아. 그러니까 '수위의 상한선'을 정해 달라고. 수위의 상한선 안에서 게임을 찾아 볼께.'


 직원들은 어차피 오늘 매상은 다 올렸고 자신들도 일보다는 편하게 놀고 싶은 거니 그런 건 신경쓰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어요. 그렇게 말해 주다니...그런 친절한 마음 씀씀이가 너무 고마웠어요. 그래서 대답했어요.


 '하지만 아직 한 팀이 남아있고 여긴 룸이 없으니까 저들이 지나가다가 볼 수도 있어. 이런 고상한 가게에서 그런 술자리 게임을 하는 게 눈에 띄면 너희들의 위엄이 떨어지니까 쟤들이 가면 하자고.'


 직원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어요. '알았어, 쟤네들 20분 안에 보내고 올께.'



 4.휴.



 5.그 한 팀이 갔어요. 갔다...기보다는 직원들이 이런저런 드리블을 해서 빨리 가도록 만든 거지만요. 물론 그들은 가기 전에 직원들에게 나가서 고깃집이나 노래방이라도 가자고 하는 무의미한 시도를 10분 정도 하는 것도 빼먹지 않았고요. 직원들은 그들을 잘 보내고...그들과 같이 있던 직원들도 전부 모였어요. 직원들이 모이며 말하는 걸 들었어요. '뭐? 은성오빠가 게임을?' '우와, 대박 사건.'뭐 이런 말들이요. 왜 내가 게임을 하는 게 대박 사건인건지 이해가 안 됐어요. 난 게임을 좋아한다고요.


 직원들 중 리더가 '지금 마시는 건 벌주로 쓰기엔 너무 좋은 술이어서' 라는 핑계를 대며 이건 키핑을 하고 게임의 벌주로 쓸 만한 술을 새로 시키자고 제의했어요. 뭔가 장삿속 같긴 했지만 분명 조리에 맞는 말이어서 연수가 낮은 술을 새로 시켰어요. 그리고 이제 게임을 시작......하려다가 한 가지 깜빡한 질문이 있어서 물어봤어요.


 '여기 혹시 병 걸린 사람 있어? 그러니까 옮는 병 말이야. 있으면 좀 빠져줘.'


 그러자 아까 전의 리더 직원이 대답했어요. 넌 지금 병이 옮는 걸 신경써야 할 정도의 게임을 하려는 거냐고요. 어이가 없어서 외쳤어요. 


 '이봐! 아까전엔 분명 수위가 무제한이라고 했잖아!?'


 하고 외치자 직원은 '하고 싶은 게임을 하라'고 했지 '수위가 무제한'이라고 한 적은 없다고 했어요. 정말 어이가 없어서 눈물이 날 것 같았어요. 저 두개의 말은 같은 말이잖아요? 하지만 그들이 빼는 것 같아서 그냥 게임 따윈 그만두자고 했어요.



 6.리더는 그럼 대체 무슨 게임을 하려는 건지 들어나 보자고 했어요. 나는 게임을 설명했고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최종 제안을 해왔어요. 지금 시킨 술을 한병 더 시켜 주면 가게 문을 닫고 하는 걸로 하자고요. 지나가던 누군가가 갑자기 들어올 수도 있으니까요.


 이건 좀 별로였어요. 매상을 올리려는 돼먹지 않은 수작 같았죠. 조금 심술이 나서 '대신에 모조리 다 마셔야 돼. 다 못 마시면 돈 안 낼 거니까 안 남길 자신이 있으면 가져와.'라고 했어요.


 

 7.곧 알게 됐어요. 이건 그들을 매우 과소평가한 말이었어요. 게임의 벌주라서 희석하지 않은 원액을 마시는 건데도 그들은 원액을 비타민워터 마시듯 마셔댔어요. 심지어는 맥주잔(...)에 담아서도요. 결국 한 병을 더 시켜야 했어요. 직원 중 누군가가 '일하러 나온 게 아니라 호빠에 와서 돈주고 마시는 기분이야.'라고 하자 모두들 정확한 비유라고 했어요. 


 어쨌든 그럭저럭 재미있게 시간을 보냈어요.



 8.거의 해가 뜰 때쯤 되서야 자리가 끝났어요. 한여름이었으면 이미 밝을 시간이었죠. 리더가 중간에 퇴근할 사람은 가라고 했지만 어차피 토요일은 쉬는 날이어서 아무도 퇴근하지 않고 전원 끝까지 놀게 됐어요.  


 뭔가 기분좋게 끝나나 했는데...술에 떡이 된 듯한 어린 직원이 날 가리키며 외쳤어요.


 '나 이 사람한테 할 말 있어요.'


 얼굴을 보니 어린 직원은 분하고 속상한 표정이었어요.



 9.어린 직원은 내가 이 가게에 처음 왔을 때의 얘기를 꺼냈어요. 내게 과일을 먹여 주려고 했는데 내가 짜증냈던 일을요. 그러고보니 정말 그런 일이 있긴 있었어요. 이 직원이 '자신이 먹던 포크로' 과일을 집어서 먹이려 해서 꽤나 짜증을 냈었거든요. 그 일을 아직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것 같아요.


 어린 직원은 내가 그때 지나치게 정색을 하고 짜증을 내서 너무 속상했었다고 했어요. 그러다가 갑자기 소리질렀어요.


 '오늘 보니까 오빠 결벽증 아니잖아요! 그땐 왜 그렇게 유난을 떨어가지고 사람을 무안하게 만들었어요!'


 라고요. 나는 그냥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어요. 왜냐면 사실대로 말해봐야 안 믿을 거니까요. 1년 전의 네가 본 나도 나고 지금 보는 나도 나라는 걸 말이예요. 다 큰 어른 인간이 1년 사이에 그렇게 휙휙 바뀐다는 걸 말해봐야 거짓말로밖에 안 들릴 테니까요. '울어야 할 사람이 있다면 나야. 요 몇년 간 오뚝이처럼 일어나느라 제일 힘들었던 사람은 나였다고.'라고 말하고 싶었지만...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것 같아서 그만뒀어요. 그냥-


 '그땐 어쩔 수가 없었어...그래야만 했었어.'


 라고 짧게 대답했어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4821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379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1730
123326 2010년대의 미국 대중음악 [2] catgotmy 2023.05.31 253
123325 북한에 대해 [5] catgotmy 2023.05.31 413
123324 오랜만에 안반가운 위급재난문자 [10] 예상수 2023.05.31 742
123323 [게임바낭] 플랫포머 게임 둘 엔딩 봤습니다. '플래닛 오브 라나', '서머빌' [1] 로이배티 2023.05.30 232
123322 Peter Simonischek 1946-2023 R.I.P. [1] 조성용 2023.05.30 153
123321 오늘 마지막 글: 윤석열은 죽을때까지 간호 못받았으면 좋겠네요 [2] 예상수 2023.05.30 548
123320 프레임드 #445 [4] Lunagazer 2023.05.30 105
123319 우주는 어떻게 끝나는가 [3] catgotmy 2023.05.30 267
123318 요즘 본 영화들에 대한 짧은 잡담... [3] 조성용 2023.05.30 513
123317 크리에이터, 거미집, 킬러 오브 더 플라워문, 미션 임파서블: 데드레코닝 파트1 새 예고편 예상수 2023.05.30 239
123316 점심시간을 빌려, 한달만에 잠깐 쓰고 갑니다:비뚤어진 어른들 [4] 예상수 2023.05.30 465
123315 ‘다음 소희’ 없도록…경기도의회, 현장실습생 안전보장조례 입법예고 [1] 왜냐하면 2023.05.30 183
123314 버호벤의 <캐티 티펠>/안데르센/<늑대의 혈족> daviddain 2023.05.30 177
123313 [웨이브바낭] 세상의 모든 영화 감독 지망생들에게 바칩니다 '달은... 해가 꾸는 꿈' [18] 로이배티 2023.05.29 626
123312 Yesterday, Ditto, I am, DibloVI,지브리스튜디오 애니 그리고 수영 [4] soboo 2023.05.29 281
123311 '큐어' 짧은 잡담 [11] thoma 2023.05.29 429
123310 외로우니까 좋네요 [6] catgotmy 2023.05.29 411
123309 누구일까요? [5] 왜냐하면 2023.05.29 208
123308 뻔뻔한 유베/레비/컨퍼런스 리그 [2] daviddain 2023.05.29 135
123307 프레임드 #444 [4] Lunagazer 2023.05.29 8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