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을 읽었습니다.

2018.08.09 12:25

일희일비 조회 수:1787

고 노회찬 서거 이후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네요. 아직도 '고'를 붙이는 것이 이상하기만 합니다...


억지로 마음을 돌리려고 집안에 굴러다니던 <내 이름은 빨강>을 집어들었습니다. 일단 번역은 준수합니다. 여성 화자나 비인간 화자일 때는 존댓말을 쓰고 남성 화자는 반말인 경우가 많은데, 한국어 자동패치가 아니라 터키어에 원래 있는 존댓말/반말일 것 같네요. 


16세기 후반 오스만 제국의 세밀화을 배경으로 한 추리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을 붙인 이유는 전혀 서스펜스가 없기 때문이지요.

60개 가까운 챕터로 되어 있는데 1인칭 화자가 계속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1장은 살해당한 영혼, 2장은 전체의 주인공인 카라, 3장은 개 그림이 자기 입장에서 말을 하는 겁니다. 어린이(오르한) 1인칭 서술에서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기시감이 들었습니다.

원래 이스탄불에 살던 카라는 24살 때 12살 어린 사촌(그러니까 12살이었던 -.-;;;) 세큐레를 사랑하게 되어 사랑고백을 했다가 이모부에게 쫓겨나서 12년 동안 동쪽에서 책 만드는 일(말하자면 편집장)을 하다가 이스탄불로 돌아옵니다. 세큐레는 결혼해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남편은 전쟁 나가서 4년간 소식이 없고, 남편 동생이 엄청 껄떡대서, 친정에 애들 데리고 돌아와 있는 상태. 세큐레 아버지인 카라 이모부는 술탄의 비밀스러운 명령으로 비밀스러운 세밀화 책을 만들고 있는데 그 책을 만드는 세밀화가 한 명이 살해당했습니다. 살인범은 다른 세밀화가 3명 중 하나인데 나중에는 세큐레 아버지도 살해합니다. 카라는 살인범으로 몰리는 오해를 겪기도 하고 세큐레와 우여곡절 끝에 결혼합니다. 


세밀화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자주 나오고, 이미 국제 도시였던 이스탄불의 먹거리나 화려한 의상, 세분화된 자영업 등 골목골목 면모도 꼼꼼하게 그렸습니다. 이슬람의 세밀화는 원래 신의 기억인 완벽한 모상을 재생하여 그리는 것이 목표인데 당시 베네치아의 원근법과 사실적 초상화에 충격받은 술탄과 화가 일부가 전통에서 벗어난 그림을 그리려고 하고, 복고파는 이런 움직임을 독신죄라고 보는, 예상 가능한 갈등이 나옵니다. 하나도 긴장되지 않아서 몰입에 좀 문제가 있었습니다. 1권은 그래도 꼼꼼히 읽다가 2권 중반부터는 휘리리릭 사건 전개만 봤네요. 세밀화의 전통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도 나옵니다. 세밀화가들은 하도 눈을 혹사해서 말년에 대부분 눈이 먼다고 하는데, 이 눈이 먼 상태에서는 오직 신의 기억인 완벽한 그림만 머리 속에 남아 있어서 가장 행복한 상태라서 세밀화가들은 눈이 멀기를 바라기도 했고 눈이 멀지 않으면 남보기 좀 쪽팔려 하기도 하고 그래서 일부러 자기 눈을 찔러 멀게 했다고 합니다. 그림이 그림으로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이야기의 일부여야 하므로 어떤 책의 삽화로서만 의미가 있는데, 그 옛 이야기들도 액자 형식으로 나옵니다. (찾아보니, 레일라와 메즈눈이라는 광적인 사랑 이야기는 나중에 영국으로 전해져서 셰익스피어가 거의 그대로 베껴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썼다는 설이 있네요.)


제가 느낀 문제는... 이런 세밀화와 이스탄불 묘사가 자연스럽다기보다는 자격지심으로 과시하려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슬람 세밀화가 이렇게 대단하단다. 16세기에 느이 나라엔 이런 대도시 없었지?' ('봄 감자가 맛있단다. 느 집엔 이런 거 없지?')

취향에 맞으면 한 줄 한 줄이 다 흥미진진하겠지만 저는 좀 지루하기도 하고 갑툭튀인데 괜히 있어 보이는 듯한 경구나 우화를 멋부리려고 집어넣은 것 같더군요.


1인칭 화자가 계속 바뀌는 서술 형태도 그래요. 어차피 전지적 작가 시점이면서 1인칭인 척 하는 걸 뻔히 아는데(...) 작가가 날로 먹으려는 것 같아요. 게다가 1인칭 화자가 계속 바뀌는데 말투와 성격이 다 똑같아요!! 다들 속을 좀 숨기고 있고 속에 없는 말을 하고 계속 이리저리 재면서 현학적인 말을 늘어놔요. 그래서 화자가 바뀌어도 다 똑같은 화자로 느껴져요.  살인 용의자 셋도 각자 자기 서술 파트가 있는데 셋이 누가 누구인지 구분이 안 되니 도무지 추리를 할 수가 없어요. 아니, 애시당초 추리를 할 단서가 없어요.... 그래서 긴장감이 0입니다. 카라가 범인으로 몰렸다가 풀리는 부분도 서스펜스가 없습니다..


세큐레 캐릭터도 짜증납니다. 속으로는 좋으면서 겉으로는 싫다고 하는, 여성혐오가 투영된 모습이에요. 중간중간 똑똑한 모습과 실전에 강한 모습을 보여주긴 하지만, 속에 없는 말을 떠보려고 하는 장면이 끝없이 나와서 읽다가 질리더군요. 


예상했던 대로 화가가 스스로 눈을 멀게 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심리상태가 도통 감정이입이 되지 않아서 작위적으로 느껴졌네요. (제가 서편제 식의 예술지상주의를 워낙 싫어하기도 하고요.)


중세 이슬람 사회가 성적으로 꽤나 개방적인 문화였구나 싶기도. 세큐레가 애가 둘이고 이혼도 못 한 상태인데 주인공이나 다른 인물들 중 아무도그 점을 문제삼지 않아요. 아니, 그냥 아무도 신경을 안 써요. 세큐레와 결혼하면 그 애들의 아버지가 되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요.


엄마가 아이의 냄새를 맡고 머리와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는 묘사가 많이 나옵니다. 친밀하게 느껴져서 좋았네요. (반면 아이가 말을 안 들어서 뺨을 때렸다는 묘사도 많이 나옵니다..-.-;;)


저로서는 so so. 구성도 그렇고 담고 있는 가치철학도 그렇고 그다지 감탄스럽지 않습니다. 터키어로는 숨막히게 아름다운 문장인 걸까? 왜 이렇게 높은 평가를 받았는지 모르겠네요. 어쩌면 서구에서 오리엔탈리즘을 투사해서 (터키도 유럽에 들어가긴 하지만) 고평가를 한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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