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떠오르는 것들.

2018.03.09 14:08

잔인한오후 조회 수:1499

1_ 최근 계속 생각나는 문장은 이거에요.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검색해서 맥락까지 다시 확인해봤는데,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차오르는 기쁨을 묘사하고 있더라구요. 계속 생각나는게, 돌들도 침묵하던 시절을 어떻게 보낼 수 있었는지 이해하기 너무 힘들기 때문이에요. 돌들이 소리지르는걸 매번 상상해봅니다. 굴러 떨어진다거나 쪼개진다거나 부딪친다거나 하는게 아니라, 그냥 그 자리에 묵묵히 있는데도 인간들이 무생물에게 소리를 지르게 하고 싶을 정도의 압박을 주는 상황을요.


2_ 제가 일생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반추해보게 되더군요. 초, 중, 고 시절.. 길고 긴 대학 시절.. 군대.. 얼마 되지 않은 직장 생활. 제가 아는 한에서는 성적으로 부끄러운 행동을 한 일은 없다고 말할 수 있어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긴 시절동안 성-보수적인 기독교인으로 살아왔었고, 대학교에서는 군대를 다녀온 후에 연애를 해야한다는게 누구나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인지 알았죠. (나중에서야 연애로 자원이 소모되는걸 용납 못하는 조직체의 인사적 이득행위라는걸 이해하게 되었지만요. 운동단체에서도 비슷한 규율이 있다는걸 알고 신기했습니다.) 그렇다고 전역해서 연애를 한 것도 아니지만. 남성으로서 제 인생동안 성적 문제에 대한 갈등을 일으킬 존재와 조우하는건 군대에서였을 뿐이라는게, 어떤 면에서는 무난한 삶을 사는데 매우 적은 자원이 든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3_ 저는 위계에 의한 (성)폭력과 그 대응에 대해, 남성들이 이해와 납득을 못한다는 것이 너무나 이해나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군생활 중 그런 것들을 경험해보지 않고서 빠져 나올 수 없기 때문이죠. (군 면제자를 제외하고서라도.) 2인으로 근무하는 초소 근무에서 다양한 선임들을 만나며 그 시간들을 때우기 위해 다양한 이야기들을 합니다. 거기에서 (첫번째) 성관계나 연애에 대한 성적 질문들이 가득합니다. 성 감수성이 떨어져 그런 것들에 무심한다 하더라도 폭력적인 행위를 꾸준히 경험하면서도 계속 그 자리에서 저항하지 않고 되돌아가는 경험은 어떨까요. 욕 먹을 것을 알면서도 어떤 공간으로 나오라면 차분히 나가고, 맞을 걸 알면서도 오침을 하러 생활관으로 돌아가고. 그 와중에 싫다, 아니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폭력을 당하고 싶어서 당했다는 말을 할 수도 없을 터인데.


다른 무엇보다도, 군대에서 가장 뼈저리게 느낀 것은 '내부자'가 되는 경험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원래부터 공정하게 나누워져야 했던) 권력이나 편의가 증진되고, 다들 시간이 흘러 그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그 구조를 계속 유지시키려는 욕망, 그리고 그게 파괴됨으로서 자신의 노후가 붕괴되는 것에 대한 극단적인 저항감,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외부의 개입으로 그 구조가 조금이라도 손상되는게 싫어서 자신의 '선'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가 꾸준히 성장하고, 어떤 수준까지 남용할 수 있는지 실험을 거쳐 왕이 되는 그런 과정을, 누구나 경험해봤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불이해와 비소통이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어째서 군생활을 자랑스러워하는지, 이념이나 관념적 자랑과 실제적 부끄러움과 염치는 양립하지 않는지 이해가 잘 가질 않습니다. 저는 국가적 복무를 수행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다지 별로 자랑스럽지 않지만, 그 과정 중에서 있었던 일 들 대부분이 부끄럽습니다. 아직도 '갈굼'이란걸 다루는 사람들에게 잘 못 하는데, 그 길고 긴 시간동안 말로 후임들에게 했던 일들이 떠오릅니다. 제 생각엔 부덕한 일을 수행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의 자기 합리화를 파괴하고, 삶의 일부분을 부덕한 일을 했음을 받아들이고 부끄러움을 느끼는게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그 자기합리화 기제가 온 삶을 덮기 전에요.


(불쾌한 사실 서술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읽지 않으셔도 됩니다.)


구체적인 일을 말하고 싶어서 이 글을 썼습니다. 사실 군대에서 전역한 직후에, 군 생활의 각각의 캐릭터들을 그대로 살려 소설로 (공개되지 않는다 해도) 꼼꼼하게 전부 기술하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있었지만, 당연하다시피 진짜 전역한 후에는 순식간에 시간들이 흘러가버리고 군에 대해 있었던 감정들도 삭혀 없어져버리기 마련입니다. 그래도 십여년이나 된 지금도 선연하게 기억나는 여러 사실들이 있습니다.


저는 3소대에 배속 받았는데, 1소대는 폭력이 자행되는 곳이었죠. 9시부터 12시까지 오침을 하는데 그 잠을 잘 때 어두운 방에서 선임들이 후임들을 눕혀놓고 마구 패는 소리를 신병 대기할 때 3일은 들었습니다. 모포를 덮어놓고 살을 치는 소리를 어느 소대로 갈지 결정이 되지 않을 때 들었던 그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네요. 커튼을 쳐놓은 창문 틈새로 빛이 연하게 들어오고, 근무를 서지 않아 어두운 방에 정자세로 앉아있는 옆에 자고 있는 사람들 틈에서 말이죠. 그 소대에 배속 받은 동기들은 똑같이 맞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 했지만요. 그런데 매번 거기로 가서 그렇게 자야 했겠죠.


저는 군생활 중에 맞은 적은 별로 없지만, 생활관 중앙에서 15대인가를 맞았던건 확실히 기억이 납니다. 이유까지도요. 당시 소대의 분위기가 안 좋았는데, 침상 아래의 슬리퍼가 정렬되있지 않아 정렬하라고 문ㅇㅇ 일병이 지시를 하죠. (사실 이름까지도 정확히 기억이 납니다.) 침상 위에서 등을 구부려 아래를 보는데 목에서 군번줄이 티셔츠 바깥으로 스르륵 빠져 나옵니다. 그걸 보고 '내려와서 슬리퍼를 정리하지 빠져서 위에서 고개를 숙여서 정리하고 있다'는 조로 제대로 맞았죠. 그다지 아프지 않다고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던 기억이지만, 어디에도 보고되지 않고 누구도 그런 사실을 다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경험들이 저만 있는 경험일까요?


군대에서는 샤워를 다 함께 한 샤워실에서 합니다. 거기서 취사병 선임이 가끔 같이 씻었는데, 개 중 가끔 성기를 손가락으로 툭툭 튕겼죠. 굉장히 싫어하는 티를 내도 가끔 그랬습니다. 그 사람은 나중에 제대 직전에 영창에 가게 되는데 제가 그런걸 고발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녀석이 그렇게 더러운 녀석일지 몰랐다','혹시 너도 그런걸 알고 있었냐?'라는 말과 어디를 만졌다는둥 하는 이야기를 들어서 한 사람한테만 그런게 아니구나라고 추측할 뿐입니다. 요즘 왜 그 당시에 말하지 않았는지, 그 당시에 고발하지 않았는지 묻는 사람들은 흡사한 구조의 이런 경험이 없었던 것일까요? 불쾌한 경험 이후에도 계속 마주해야 하고, 은폐하고, 피하지 않았던 그런 경험을 한 번도 접하지 못한 것일까요?


자잘한 폭언, 욕설 같은 것들은 너무나 익숙해지고 당연시 되어서 심지어는 인터넷에서 농담처럼 쓰입니다. 거기에 대한 감수성을 다시 살려내고, 부끄러워하고 염치를 가지게 되어야 같이 가는게 아닐까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마지막 군대 이야기 하나 더.


저는 지저분한 이야기를 살아있는 존재에게 직접 들어본 건 군대가 처음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오프라인 사람들에게 생각 날 때마다 매번 했던 이야기입니다. 제게는 너무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초소에서 2명이 근무를 서다가 뒤에 이어 온 2명과 교체할 때 들은 이야기지요. 선임-후임 이렇게 묶여 나가는데 선임들끼리 이야기할 때 후임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였습니다. 자기가 이번에 휴가를 나가는데 무언가를 다시 구해줄 수 없겠냐고, 지난번에 무언가를 쓰면서 들킬뻔 했다고. 그건 수면제였습니다. 바닷가에 놀러가서 여성에게 먹이면 재울 수 있고, 지난번에 재미를 봤다, 유리잔에 맥주와 섞으면 너무 티가 나니 꼭 맥주 캔에다 섞고 약간 취했을 때 쓰단 맛을 모를 때 먹여라, 더 구해줄 수 없느냐, 이런 이야기였습니다.


처음 들었을 때는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가 잘 안 되었는데, 되뇌니 이해가 가더군요. 군대에서 연예인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들었으면서 한국에 강간 문화가 존재하지 않는다는건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그 때 너무 큰 충격을 받고, 동생과 아는 여성 분들에게 꼭 이 이야기를 하게 되는 사람이 되어버렸었습니다. 그것도 시간이 흐르고 사람을 안 만나다 보니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 같네요.


저는 그래서,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해를 못하는 것에 대해서 말이에요.


4_ 저는 지금까지 듀게에 쓴 글 중에 하나 정도 밖에 지우지 않았습니다. 아주 행정적인 글이었을 꺼에요. 다만 딱 하나 제목과 내용을 교체한 글이 있죠. 그건 아주 잠시, 10분 정도 내용과 제목을 유지하다가 변경되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제 삶의 어떤 부분을 지탱하는, 절벽 위의 말뚝처럼 사용해왔습니다. (크롤링이 될 것도 각오하고 썼었죠.)


요즘 이런 상황에서 그게 떠오르길래 찾아보니 벌써 2013년 3월 30일, 새벽 4시 49분으로 그 조차 5년이나 되었더군요. 오랜 기간입니다.


아마 제목은 이런 것이었을 겁니다. '저는 성폭행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내용은 썼었을 수도 쓰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전 아주 오랫동안 여성에 의한 남성의 성폭행에 대한 감수성이 자라날 사회를 기다려왔습니다. 사실 지금도 그렇게 썩 좋은 시기는 아닙니다. 저는 언제나 제 이야기가 기술 자체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마타도어가 될 것을 두려워해왔습니다. 또한 저는 제 경험에 의해 제가 특정한 자격을 갖는 것도 진절머리나게 싫었습니다. 다만, 지금 글을 쓰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만 같아서 그렇습니다. 사실 아직도 제 경험에 대해 제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지 알지 못하며,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과 달리 그런 실제적이고 억압적이며 물리적으로 강제적인 행위는 없었으니까요.


초등학생도 안 되었을 때, 중학생 정도 되는 누나가 철 자물쇠로 방문을 잠구고, 삽입을 시도했었습니다. 찰나인지 길었는지 모를 시간이 누나의 부모님이 부르자 청바지를 빠른 속도로 추스려 입고, 방문에 걸린 철 자물쇠를 재빨리 뺐던 광경이 기억납니다.


당시엔 어떠한 개념도 없었지만, 갈수록 어떤 일이었는지 알게 되었죠. 하지만 아무도 남성이 여성에게 성폭행을 당했을 때 어떠한 감정과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다양한 서사에서 운이 좋고 행복한 일처럼 서술됩니다. 남성향이나 여성향 둘 다요. 저는 거의 희석되었지만 설명하기는 어려운 썩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지고 있고, 그 사람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기도 했습니다.


최근에 그 사람을 봤는지 안 봤는지 모호한 일이 있었습니다. 동생의 결혼식이었고, 이미 그 지역을 떠났지만 부모님의 지인과 지인의 자식들로서 결혼식에 한 무리가 참석했었죠. 그 중 한 사람일거라고는 알았지만 얼굴이 너무 달라져 넷 중 하나인데 누가 그 이름을 가지고 있는지 조차 확인하지 못 했습니다. 사실, 별로 확인하고 싶지 않았던 거죠. 너무 달라져버린데에 이미 기억을 할거라는 기대 자체를 버리게 되더군요. 그 전까지는 전화해서 물어볼까 고민했었는데, 그 모호한 만남으로 제가 알고 싶지 않다는걸 알게 되었습니다. 알아서 뭐에 쓰겠어요.


혹자는 삽입이 됐는지 안 됐는지를 물어보더군요, 고소를 위해서는 그게 확실해야 한다구요. 그게 제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이 이야기를 갑자기 하는 이유는 처음에 쓰긴 썼습니다. 그에 더해서, 왜 그 당시에는 싫다는 말을 하지 않았나, 그 이후에는 왜 하지 않았나, 왜 법적인 처벌을 원하지 않나, 왜 법적인 처벌을 원하나, 여타 등등 여타 등등에 대해 이해 못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이해해 보라고 써 보았습니다. 저는 수많은 사실들이 실제적으로 존재하나 그것이 공증화 되지 않은 상황 자체가 매우 불편하고, 공증화 되어가는 고통에 몸서리 칠지언정 차라리 존재할 거면 공증되는게 좋다고 생각하며, 그에 공감하는 취지로 글을 써 보았습니다.


애초에, 과거에 존재하는 사실이 말해지는 것 자체가 불편하다면, 과거에 존재하는 사실은 어떻게 합니까? 과거의 사실을 비존재로 바꿀 수 있습니까?


아마도, 이런 질문을 듀나의 영화낙서판에서 던지는 행위는 대상을 잘못 찾고 약간 바보같은 행위일 것입니다. 그래도 제가 글을 쓸 수 있는 곳은 여기 밖에 없으니까요.


5_ 잃을 것이 더 적으면서도, 아니 잃을 것이 더 적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말을 하기 바랍니다. 한국에 살면서 당사자로서의 자신을 발견하지 못할 사람은 없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염치와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6_ 저는 잘 살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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