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버드>가 뻐렁치게 좋았어요.

그레타 거윅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프란시스 하>를 다시 보았는데,

그러다가, 제가 가진 혐오를 발견하고, 부끄러웠고, 여러 생각이 들었고, 최대한 정리해서 써보려 합니다. (원래의 '혐오'라는 용어와는 다른 의미일지 몰라요)

...정제하려고 하는데 혐오적 표현이 다소 쓰일 것 같아 양해를 구합니다. 일종의 반성문이에요.



* <프란시스 하> 영화 내용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프란시스 하>가 나온 게 6년 전 (2012년)이네요. 친구는 영화 참 인상 깊었다고 좋아했는데, 전 너-무 싫었어요. 거의 째려보다시피하면서 꾸역꾸역 봤었던 기억이 나요.


1. 

제가 프란시스를 너-무 싫어했던 이유는, 당시엔 몰랐지만, 여성혐오였어요.

외모, 몸매, 목소리, 표정, 웃음소리까지도, (와... 이런 말 쓰기 너무 부끄럽습니다.) 제 맘에 안 들었던 거예요.

심지어, 청소를 잘 안 하는 것, 때리는 장난을 하며 '소란스러운' 모습도, 

뒤에 더 얘기하겠지만 가난하고, 가망 없지만 꿈을 꾸고, 하필 예술 분야인 모습까지도 

다 '너-무 싫었어요'. 


하지만 그땐 몰랐어요. 싫은 감정이 먼저 들었고, 그다음에 꼬투리를 잡았습니다. 실은 외모에 대한 불평은 꿀꺽 삼켜버리고, '음... 너무 우악스러워서 거북하더라' 이런 표현을 썼던 것 같아요. (저 말도 참..)


저는 그때도 지금도, 외모 강박을 쉽사리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페미니스트입니다.

최근에 '바디토크를 멈춰야 한다'는 걸 실천하기 시작했어요. 상대의 외모를 뜯어 관찰하며 나와 비교하고 부러워하고 평가하던 신경계를 뚝 끊어버리고자 노력해요. 그러자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 대화 내용에 더 집중할 수 있었어요. 한꺼풀 벗겨지는 듯 가벼워지는 느낌이에요. 앞으로도 계속 노력하려 합니다.


6년 만에 다시 프란시스를 마주한 순간에도 '윽', 오래되고 익숙한 관습적인 감정적 판단이 먼저 삐져나왔고, 곧이어 그런 저에게 'ㅎ' 코웃음을 쳤습니다.

이제야 그냥 인물로 볼 수 있었어요.


제가 여혐을 하고 있었던 거죠.


(덧.

옛날 인터뷰 기사 중, 하이킥 김병욱 감독님이었나... (이 글 쓰면서, 다시 원문을 찾아보려 했으나 검색에 실패했습니다ㅜ 워딩도 출처도 정확하진 않아요) '평범한 사람들의 리얼한 이야기를 다루는 드라마에서도 왜 주인공들은 미남미녀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길, '주인공이 못생기고 비호감이면 사람들이 자기를 그 인물에 감정이입하기를 싫어한다, 자신을 대변하는 주인공이 예쁘고 멋진 사람이길 바라지, 못나고 추하길 원하지 않는다'라고 했었어요.

이 기사를 보며 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고 한숨을 쉬는 한편, '아, 주제를 잘 전달하려면 이런 방법을 써야 하는구나!'라고 내면화하기도 했어요.)



2. 그렇게, 영화를 예전보다 편안하게 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중반 정도 되어서, 다시 또 '너-무' 싫은! 순간이 왔습니다. 프란시스가 레이첼의 지인들과 식사를 하며, (그 유명한, '무슨 일을 하세요? / 말하기 좀 복잡하네요 / 하시는 일이 복잡한가요? / 아뇨, 그 일을 진짜 하고 있는 건 아니라서요' 씬이에요.) 프란시스의 산만하고 민폐스러운 모습이 거슬려서 심장 끝에서부터 달아오르는 '너-무 싫은' 감정이 올라왔습니다. 이어지는 장면, 파리에 가서 친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밝게 연락을 하고, 그런데 혼자 초라한 모습도, 증오스러울 만큼 싫었습니다.


이때 느꼈어요. 이건 또 다른 혐오구나.

말하자면 바로 '가난 혐오' 같은 거요.


제가 이 영화를 왜 이렇게 싫어했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어요.

프란시스는 저와 접점이 많은, 저와 같은 종족이고, 제가(우리 종족이) 들키고 싶지 않아 하는 모습들, 치부, 약점을 너무 많이 드러내요. 그래서 전

당황스럽고, 부끄럽고, 

난 그걸 숨기려고 진짜 많이 애쓰는데, 거침없이 자꾸 드러내니까 화가 나고,

괜찮은 척 가식적이어야 하는 수고스러움이 기억나서 짜증 나고,

나를 혐오하고 자책하듯, 그 인물(=나)을 증오하게 된 거였어요.



3. 그런데, <소공녀> 역시 가난한 싱글 여성을 다루지만 그때는 이렇게 '너-무 싫다'는 화가 나진 않았거든요. 오히려 연민을 느꼈죠.

(심지어, <소공녀>에 대한 선입견은 '모델 비율의 힙한 패셔니스타 배우가 주인공이라니, 현실을 왜곡하는 인스타그램 필터 같은 영화 아냐?' 라며 얕잡아 보기까지 했었는데, 

이건 제가 <프란시스 하>의 외모가 예쁘지 않아 싫었다고 한 거랑 정반대잖아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건 비슷한데, 감정이입과 혐오는 어디서 나뉘는 걸까, 

무엇이 연민을, 무엇이 증오를 일으킬까.


차이가 뭘지 구분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너무 나 같아서 화가 난다는 건, 내가 이미 감정이입을 깊이 하고 있다는 것이고,

애쓰는 모습을 '민폐다'라며 보기 싫어한다는 건, 마치 주변 사람들에 감정이입한 듯 보이지만 실은

스크린 밖의 안전한 나를 옮겨서 내가 지금 그 불편한 식탁에 앉은 것처럼, 공기를 느끼고 있는 거예요. 

'어휴 진짜 짜증 나게 쟤 왜 저래'라는 반응은,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가 나를 야단칠 때 하는 말이고요. (그리고 그건 제가 너무나 두려워하는 일이고요)


내가 나에게 하던 단속질을, 내가 주인공에게 하고 있었고,

내가 나를 미워하듯 주인공을 미워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나는 그런 나를 가여워하기도 해요. '너(나) 지금 이렇게 애쓰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자 하염없이 안쓰러워졌어요.


분리하려 애썼지만 실은

연민과 증오는 한 덩어리일지 모른단 생각을 하게 됐어요.



4.

이 글에서 제가 쓴 '너-무 싫다'라는 감정, 그게 '혐오'가 아닐까 싶어요.

그냥 밉고 싫은 게 아니라 주체할 수 없게 분노가 일 정도의 증오인데,

타인에 대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내가 싫어하는 나의 부분', 자신에게 죄책감을 갖고 스스로를 처벌하고자 하는 뿌리 깊은 잠재의식에서 비롯되어, 타인에게서 비슷한 속성을 발견하는 순간 그게 밖으로 발화되는 게 아닐까.

('예쁘지도 않은데 행복해지려고 하네' '날씬하지도 않고 청소도 잘 안 하는 주제에 꿈을 이루려고 하네' 이런 죄책감들은 결코 논리적이지 않지만 스스로에게 깊은 '죄책감'을 남겨요.

제가 그걸 프란시스에게 하고 있더라구요.)


- 그래서, 혐오를 만들어내는 건 사회적인 관습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글에서 다 쓰기엔 너무 길고 제 생각은 부족하네요. 간단히 말하면.. '예뻐야 사랑받는다'라는 관습이 없었으면 '예쁘지도 않은데 사랑받으려고 하네'라는 혐오도 생기지 않았겠죠.

- 혐오가 발화되면 폭력적이죠. 겉으로 드러나니까 폭력이라는 걸 알게 되지만, (발화자 자신은 모를 수도 있죠 / 순간 '욱'하며 표출될 때 깜짝 놀라기도 하고요) 그게 실은 자기혐오에서 비롯된 거라 생각하면,  그 정도의 폭력을 스스로에게 얼마나 하고 있던 건지. 그 내면이 얼마나 쑤셔지고 있을지 맘이 아파요.

- '존재를 배반하는 정치적 결정(투표)'에도 이런 부분이 있지 않을까요.


- 어디선가 읽은 일베의 속성과 제가 얘기한 혐오가 맞닿아있는 것 같아서 나와 일베가 닮은 건가 하고 우울했습니다.

부단히 읽고 성찰하고 공부해야겠어요. 그렇게 되긴 너무 싫으니까요ㅜ


5. 글 마무리는 그레타 거윅으로 할까 해요. -.-

그러니까, 음, <프란시스 하>를 제대로 보려면 저런 선입견적 혐오들을 벗어나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것 같아요.
당시에 인상 깊게 봤다는 제 친구보다 저는 한참을 늦은 거구요. (속도가 중요하진 않습니다만)

<프란시스 하>는 이미 그걸 해냈고,
<매기스 플랜>은, 제가 생각지도 못 해본 '미혼 여성의 인공수정'을 아무렇지 않게 일상적으로 다루고 있었고, (그레타 거윅 각본은 아니지만서도)
<레이디 버드>는 또 한 세계를 그려내는데 너무 멋지게 해냈고,

그레타 거윅이 갖고 있는 새로운 눈이랄까요, 그녀의 세계관을 저도 닮아가고 싶어요. 자유롭고 싶어서, 다음 세계로 가고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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