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을 했어요.

2018.05.26 11:50

applegreent 조회 수:1829

지난 주 월요일에 좀 큰 수술을 했어요. 토요일 날 퇴원하고 집에 온지도 벌써 일주일이 되었네요.

병원에 있을 때는 약 기운에 계속 잤는데 집에 오니까 병원 침대만큼 편하지가 않아서 그런지 잠을 자는게 힘들어요.

수술 후 3-4주 간은 앉아서 자야하는데 

침대에 배게랑 쿠션을 많이 대어서 경사를 만들었지만 그래도 역시 삼단계로 나눠져서 경사를 조절할 수 있는 병원 침대만은 못하거든요.

결국에는 소파에 쿠션을 여기 저기 쌓아서 소파 구석에 몸을 고정시켜서 그런대로 자고 있어요. 

소파 구석에 몸이 딱 맞으면 너무 편하고 아늑해서 고양이들의 기분을 알 것 같아요.

캘리포니아에서 도와주러 여기까지 왔던 언니는 가고 월요일부터는 완전히 혼자 지내고 있어요.

아, 3.5킬로 나가는 눈치 없는 할머니 개랑요.


이번 수술이 6번째 수술인데 아마 한번 더 해야할 것 같아요. 

이런 일이 생긴게 4년 째인데, 그 바로 전에 저는 10년 넘게 쉬지 않고 일을 해왔다는 사실에 분개하면서 

어떻게든 한달을 아무 일도 안하고, 돈 걱정 안하고 쉬고 싶다고 매일 매일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병에 걸린 걸 알았어요. 

그래서 항암 치료 받는 6개월 동안 회사를 때때로 완전히 쉬고, 때로는 반나절씩 일하면서 

와, 나는 운이 정말 좋네. 이렇게 정말 쉬고 싶을 때 쉴 수도 있고...이 기회에 하고 싶었던 일을 다 해야겠어! (단편 소설도 쓰고, 대학원 시험 준비도 하고...) 그랬는데 막상 항암을 하면서 마음 편하게 쉬게 되지는 않더라구요. 

그 후에도 수술을 5번하면서 짧게는 이틀, 길게는 한달씩 쉬었는데 역시 제가 항상 바라왔던 이상적인 휴식은 아니었어요.

치료와 수술을 같이 해줬던 남자 친구에게 고마우면서도 가끔은 모든 감정이 너무 버겁게 느껴지기도 하고, 

계속되는 수술에 체력이 많이 떨어지기도 하고...자주 병가를 내야되는게 걱정스럽기도 하고...

그런데 계속되는 수술에 체력이 더 많이 고갈되고, 밤에 자다가 열에 잠이 깨면 바로 찬 물을 가져다 주던 남자 친구도 없고, 

회사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하고 있는 지금,  

저는 이상적인 휴식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아요.


아침 8:45에는 언니가 아침 10시에 시작하도록 맞춰놨다던 룸바가 청소를 하느라고 돌아다니느라 잠이 깨요.

언니가 냉장고 안에 꽉꽉 채워놓고 간 음식을 꺼내서 아침을 먹고, 강아지 배변 시키고, 밥을 주고...

인터넷에서 신문을 조금 읽다가 피곤해지면 소파 구석에 껴서 잠을 자요. 강아지는 제 발밑에서 자구요. 

일어나서 또 배가 고파지면 수퍼에서 한 입에 먹기 쉽게 잘라놓은 수박이랑, 초밥, 소다, 아이스크림을 배달시켜서 먹고...

잘 먹어서 기분이 좋아지면 또 소파 구석에 끼여서 책을 읽어요.

거의 30년 전 쯤에 읽었던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이 갑자기 생각나서 전자책으로 한국어본을 다운받아서 읽기 시작했거든요.

기억했던 것보다 더 좋았어요. 훨씬. 

특히 안느가 사랑에 대해 말하는 부분. 사랑은 각각 독립적인 감각의 경험이나 기억이 아니라는 것. 항상 다정함과 배려가 있어야 하며, 그 사람의 부재를 느끼는 것... 사강은 18살에 이미 이런 걸 알았다는 거잖아요. 저는 40이 넘었는데도 몰랐는데!

너무 놀란 나머지 아마존에서 같은 책을 골라서 전 남자 친구한테 한권 보내고, 저는 어떤 미소를 읽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오늘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다 읽었습니다. 저는 한번 관심이 생기면 그 사람의 모든 저서를 한 번에 다 읽어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데, 사강은 이 쯤해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왠지 더 읽으면 실망하게 될 것 같아서요. 그런데 어떤 미소의 번역이 너무 이상해서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이런 번역을 내버린거야하는 마음에 프랑스어가 배우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로제타 스톤 불어 버젼에 등록해서 그저께부터 밤마다 한시간씩 온라인으로 듣고 있어요. 어제는 봉쥬의 발음을 제대로 못해서 랩탑에 입을 가까이 대고, 로제타 스톤이 만족할 때까지 25번이나 봉쥬를 되풀이했어요. 


저는 싱글이기에는 나이가 많은 편이고, 항상 결혼을 하고 싶어했지만, 막상 결혼이 가까워지면 그 관계를 벗어나곤 했었어요. 

온갖 구실을 대서 헤어지고, 그 후에는 앞으로 남은 평생을 혼자 지내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오늘 밤도 두렵지 않은 건 아니예요. 

그렇지만 나는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냈다라고 말 할 수 있어요. 

살면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날들이 많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이제는 그런 날들이 더 많아질 것 같아서 기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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