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반과 야채 참치.

2018.08.15 01:53

잔인한오후 조회 수:1234

1_ 먹는게 까탈스러워졌나 싶으면서도 긴가민가 하네요. 제가 사는 지역의 맛있는 음식들을 몽땅 나열할만큼의 기억력이 없기 때문이죠. 비슷한 규칙으로 이런 질문들은 골치아파요.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뭐에요?", "인생에 딱 책 한 권만 꼽아본다면?" 제 안의 기억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소거가 되거든요. 하루에 세 끼씩 먹는다면, 일주일 정도 사이에 조금 맛있었던 것 둘 정도, 두 달 내에는 하나 정도, 그 이상 넘어가면 기억도 잘 안 나요. 평생이라거나, 짧게 잡아 5년이라고 해도 뒤죽박죽으로 섞여 먹었을 때의 임펙트도 기억 안 나는 것들 사이에서 순위를 골라내야 하니까요, 다들 그런 식으로 차근 차근 정리가 가능한 걸까요?


그래서 보통, 책이나 영화나 가능할 때 떠올랐던 것들을 다 토해놓고 나중에사 맞춰보며 상당히 흥미롭게 봤는지 재미없게 봤는지 추리하는 식이죠. 심지어 리뷰를 쓸 때는 재미있게 썼던 것 같은데 헐겁게 남아 있는 기억으로는 정말 별로였단 식으로 남아 있을 때도 흔합니다. 그래도 음식의 경우, 이 지역에 놀러올 사람들을 위해 '내가 생각해도 누군가에게 맛있다고 추천할만 한 것'들을 잊지 않고 새겨놓으려고 노력해봅니다. 그런데 그렇게 충격적으로 맛있는 음식이 별로 없을 뿐더러, 대부분 잊어버립니다. 음식 별점을 로그함수를 취해 1점에서 5점을 준다고 할 때, 대부분 2점 대에 머무르고 가끔 가다 3점이나 있을까 말까 한달까요. 적어도 음식이 힘을 써서 살아남아야지 제가 친절하게 구는건 이상하잖아요.


그래서 맛있는 음식들이 여기저기 많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의심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그게 정말일까? 그리고 먹다보면 음식이 내게 주의를 기울여 맛있게 구는게 아니라, 내가 음식에게 주의를 기울여 맛있는지 아닌지를 민감하게 느끼게 되는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걸 정말 맛있는거라고 할 수 있을까? 맛이 정밀한 거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들요.


사실 그렇게 비싼 음식도 먹지 않으니, 탐색 범위가 문제인지도 모릅니다. 외식을 한다면 일인당 만원에서 삼만원 정도의 식사를 하니까 그런 걸로 미식거리를 찾는다하면 누구 코에 붙일 돈이냐 싶기도 하겠죠. 흠, 정리해보죠. 정말 맛있는 음식 찾기의 난도와 비례가 궁금한 겁니다. 즉, 로그함수 음식 별점으로 4점이나 5점 임펙트의 음식을 만나기 위해서는, 일주일 정도에 한 번, 혹은 1년 정도에 한 번, 아니면 평생에 열 번 정도인건지 궁금한거죠. 4점 정도면, 맛의 충격이 너무 강해서 아는 사람들에게 한 번씩 먹여보고 그 반응을 보고 싶으며 이 주에 한 번 정도는 강렬한 끌림을 경험하는 것 정도겠네요. 흠, 치킨.. 은 1.6점 정도 되지 않을까요.


2_ 맛있게 먹었던 음식들을 구체적으로 떠올려서 적어봐야겠지만, 처음 말씀드렸듯이 이미 희미해져버린 것들이 많습니다.


목살구이 집이 맛있어서 자주 찾는데 다른 곳과는 이런 식으로 다릅니다. 몰랐었는데, 고깃집 대부분 고기를 손질해서 내오는 방식들이 다들 미묘하게 다르더군요. 대패삼겹살도, 꽃삼겹살도 어떻게 썰었는지 영향이고, 칼집을 여러가지 방식으로 넣었을 때 고기가 구워지는 방식과 입에서 느껴지는 방식이 다르더라구요. 그 목살구이집은 스테이크 형태로 두툼하게 썰어주는데, 주문 할 때 고기를 꺼내 썰고 커다란 형태 그대로 구어 먹습니다. 제 입맛에 고기집의 고기는 양념 없이 고기의 질 그 자체로 승부하는게 맛있더라구요. 부드럽고 고소하고... 그리고 같이 먹을 냉면은 좀 맹한게 좋더군요. 너무 화려하면 고기 맛을 짓눌러서 쥐어박고 싶어요.


이번에 약간 놀랐던게, 이렇게 먹고 다니던 초창기에 정말 맛있게 먹었고 다른 사람들이 놀러오면 같이 먹으러 가고 싶었던 냉면-고기집을 뜨거운 여름이 다가온 기회에 다시 갔는데 별로 맛이 없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집을 멀리서까지 놀러온 친구들에게 권했다면 그건 참 끔찍한 일이겠군 했습니다. 고기가 구워져서 나오고, 냉면을 얼음 그릇에 담는다는 특이성은 있는데, 고기맛이 달달하고 기름기가 흠뻑 있습니다. 그렇다고 냉면도 조용한게 아니라 자기 맛을 다른 방식으로 (아마도 신맛 베이스) 어필하니 달고 시고 서로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이해할 수 없고, 재작년의 자신이 무슨 맛에 이걸 맛있게 먹었는지 이해를 하기 힘들었습니다. 아마도 단 고기가 그저 맛있었겠지요.


목살구이 집의 고기는 두둠하게 고깃살 질감을 느끼게 해주면서 입안 가득 고소한 맛을 채워서 순식간에 고소함이 적응되어 못 느끼게 됩니다. 그럴 때 면과 국물을 마시면 적당한 수준의 신 맛이 고소함을 떠오르게 만들고, 목 뒤로 넘겨줘 다음에 고기를 먹을 때까지 입 속을 디폴트로 만들어줍니다. 매우 시거나 맵거나 달거나 하여 고기맛을 왜곡시키지 않구요. 정직한 고기맛과 보조해주는 국물맛이 교차하는. 흠. 배가 고파지네요.


양식을 잠깐 생각해보면 피자와 파스타와 리조또를 한 종류씩 시켜서 먹는게 떠오르는데, 저는 파스타를 좀 좋아하네요. 파스타도 2점 대를 넘어서게 만드는게 어려운 느낌인데, 서울에서 먹었던 라구 파스타가 계속 기억에 남습니다. 면을 얼마나 쫄깃하게 만들고 소스를 너무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지만 특정한 포인트는 살려서 질리지 않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넓적한 면이 탱글탱글하게 씹히고 잘 다졌지만 그렇다고 가루는 아닌 고기가 약간 짭짤 쌉싸르한 소스와 함께 했던 것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 파스타를 만나기 전에 얼마나 많은 뷔페의 토마토 파스타와 크림 파스타, 프렌차이즈 양식점의 해산물 파스타와 비프 파스타 등등을 지나쳐왔는지요.


3_ 이런 이론을 생각해봤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자신이 둔감한 맛을 즐긴다.'


저는 단 걸 좋아하고 쓴 걸 싫어합니다. 젤리나 단 음료수 같은걸 덮어 놓고 좋아하고, 요즘엔 좀 빠지긴 했지만 음식도 달면 무조건 좋아했었습니다. 양념 불고기 무제한 뷔페 같은 곳에 가서 비위도 좋게 (아마도 질이 그렇게 좋지 않기 때문에) 아주 달게 양념이 버무려진 고기를 잔뜩 구어먹곤 했었죠. 이렇게 무식하게 단 맛을 좋아할 수 있는 이유는 제가 단 맛에 둔감하기 때문일 겁니다. 양적으로만 그 맛을 즐길 수 있지 질적으로는 즐기기 어려운 혀라서요. 단맛에 민감했다면 이런 식으로 단맛을 소비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제 애인의 경우, 매운 맛을 매우 좋아하는데 저는 매운 맛을 별로 안 좋아합니다. 빨갛기만 하면 대부분 좋아하고 (다른 맛의 경우에는 상당히 까다로워요) 가끔 스트레스 받을 때 떡볶이나 쫄면, 기타 화끈하게 매운 것들을 좋아합니다. 은근하게 매운 류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역시 이것도 양적으로 적당히 늘릴수록 좋아하는 것이고, 저의 경우 위장이 영향 받는걸 민감하게 느끼고 매운 맛의 종류들을 적당히 구분할 수 있기 때문에 한 방향으로의 매운 맛은 좋아하질 않습니다. 고추장맛이라던가. 은근하게 여러 방법으로 매운 것은 좋아하지만요, 매운 카레라던가.


다른 분들도 그런지 궁금해요. 자신이 그것을 자세하게 구분할 수 있기 때문에 즐기는지, 양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둔감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좋아하는지 말이죠.


4_ 처음에 말했듯, 저는 맛에 대한 기억력이 거의 없습니다. 애인의 경우, 가끔 어떤 맛이 막 떠오를 때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혀에서 그 맛이 느껴지는 체험을 하는 겁니다. 머리 속으로 뭔가를 보거나, 듣거나 하는 경우는 있습니다만 맛을 떠올리는 경우는 없어서 제가 미맹인가 싶기도 하면서도, 매번 놀랍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저는 TV에서 음식 방송이 나올 때 거의 영향을 받지 않고, 미식 프로를 봐도 거기서 나온 부류의 음식을 따로 먹으러 간다거나 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는데, (아마 누군가 자세하게 글로 설명하는게 더 효과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광고나 프로가 영향을 받는 사람을 만나보게 되니 마케팅의 유무 효과가 실제 있겠구나 하는 바보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떻게 그렇게 즉흥적이지만 확고하게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건 매우 좋은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뭘 원하는지 잘 모르겠어서 답답했던 경험을 해본 사람들이라면 다들 동감하겠지요.


자주 듣는 말이 '무슨 맛인지 알 것 같다'인데, 저만 이런 능력이 없는 걸까요?


5_ 최근에 야채 참치가 먹고 싶어져서 찾아다녔는데 큰 식자재 가게에 닭가슴살 캔과 고추 참치 캔, 그냥 참치 캔 이런 건 있는데 야채 참치만 쏙 빼서 없더군요. 울화통 터지게도 심지어 짜장 참치 캔(이런거 누가 먹는 겁니까)도 있는데 야채 참치 캔이 없어서 너무 슬펐습니다. 여기저기 찾다가 왠지 모르게 참치 류가 얼마 있지도 않은 편의점에서 2+1 행사를 하는 야채 참치를 3개 사왔답니다. (사실 1개만 사와서 금방 먹어버리고 왜 2+1로 사지 않았을까 후회하며 다시 샀습니다.)


오늘 그렇게 햇반을 돌려 야채 참치와 함께 아주 맛있게 밥을 먹으며 맨 위의 생각을 했습니다. 주변 음식점들에 물려버려서 뭘 제대로 먹고 싶지도 않은 이 시점에서, 햇반과 야채 참치 캔을 까서 아주 맛있게 먹고 있다? 과연 나는 까탈스러워졌다고 말할 상황인가 싶은 것이요. 햇반을 처음 사서 돌려먹기 직전까지는 인스턴트의 맛을 매우 무시했는데, 집에서 지금까지 제가 했던 어떤 밥보다도 햇반이 맛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에 빠졌습니다. (보통 햇반보다는 밥을 잘 하나요?) 다들 햇반은 그저 그런 맛이라고 먹고, 거기에 더더욱 야채 참치는 같이 먹지 않는걸까 싶었습니다. 저는 특히 야채 참치의 고소하고 야채맛이 담긴 기름을 좋아하는데, 이런걸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을까 어디서 이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막막해졌습니다. (기름을 먹어보게 된 것도, 어떤 참치 제조인의 신문 기사 내용 중 '참치 캔을 만들 때 식용으로 먹을 수 있는 기름을 마지막에 넣는데 그걸 다 버려버린다는 사실에 너무 슬펐다' 비슷한 걸 봤기 때문일 겁니다, 그 전엔 저도 대부분 버렸어요.)


여튼간 야채 참치와 햇반을 먹으며 맛있음을 느끼면서 다른 음식들을 이러쿵 저러쿵 평가하는건 너무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글을 쓰게 되었군요. 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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