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감성의 시대였습니다.

한총련이 아무런 명분 없이 연세대 캠퍼스를 점거하며 찬란하게 한심하게 운동권 시대의 종말을 알리자

사람들은 이미 십여 년 전, 혁명도 싫소, 대의도 싫소, 오로지 러브 앤 피스를 외치며 춤추며 떠나갔던 

마른 몸의 남자아이들과, 백주대낮에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워대는 여자아이들의 족적을 따라갑니다.

오즈의 성으로 향하는 노란 벽돌길처럼 전기기타와 거문고 소리가 괴이하게 뒤섞인 감성의 길.

밤에 쓴 편지같이 부끄럽지만 모세혈관을 간지럽히던 그 감성. 아아.. 선배.. 가슴이 마구 에려와요... 

그곳은 바로 홍대앞이었습니다


홍대에서 예술을 배우겠다며 전국에서 몰려든 고딩들이 에라이 예술은 모르겠다 술이나 배우던 때에

신촌에서 홍대로 걸어 온, 80년대에 좀 놀아 본 학번들은 어느덧 삼십 대 어른이 되어 

혁명과 대의의 깃발의 뒤켠에서 소중히 품어 온 그들의 유산을 전수합니다.

김원과 황경신이 페이퍼를 발행하고, 장산곶매에서 영화 만들던 장윤현이 신식 멜로 "접속"을 찍어내자

그야말로 전국의 모든 아이들이 모니터 앞에서 "뉴욕 헤럴드 트리뷴" 을 외치게 된 것이지요.

닉네임 그까짓게 뭐라고 라틴어 사전까지 뒤지며 조금 더 남들보다 있어보이기 위해 날밤을 새고,

싸이월드 상태 창에 "누나, 그 남자랑 자지 말아요" 라는, 심히 중의적인 19금의 문장을 써제껴도

그것마저 감성충만으로 포장해 주던 참으로 감사한 시절.


시인 장정일은 이십대를 가리켜 타자기, 턴테이블, 뭉크의 화집이 목말랐던 시절이라 했던가요?

바로 그 2000년대, 홍대를 거닐었던 아이들의 가방 속에는 세 가지가 들어있었습니다.

하루키의 소설, 엘리엇 스미스의 씨디, 그리고 캐논 디지털 카메라.

사진이라 하면 아직 수학여행 갈 때 슈퍼에서 사들고 가던 코닥 후지 카메라가 전부였던 시절에

홍대 앞을 거니는 아이들이, 이제 막 보급이 시작된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 웹에 올리던 

아리송한 B컷도 아닌, C컷마저 그 얼마나 감성 넘쳐 보였던가요? 


그리하여 사람들은 생각하게 됩니다.

쟤들도 찍는데 나라고 못 찍을 게 무엇이냐? 

저 씹다만 옥수수 같은 자식이 흔들린 사진 하나로 여자애들을 후리고 다니는 것을 보고만 있을쏘냐?

나도 이렇게 사랑스럽다고 내 꽃모양 손거울이 간증해 주는데 나라고 얼짝 각도로 한 컷 못 찍을쏘냐? 

아직 고가의 사치재였던 '디카'를 살 형편이 안 되었던 아이들이 역시나 여우와 신포도의 법칙을 적용,

"일반인은 폰카면 충분합니다" 지껄이는 개소리들을 뒤로한 채

드디어 이 땅에 디지털 카메라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그 아이들이 홍대 앞에 도착하였던 그때,

홍대에서 신나게 사진을 찍어댔던 사람들은 그 모던함과 익조틱한 매력에 그만 흥미를 다소 잃은 채

이미 새로운 흥미를 찾아 마포구를 벗어나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의 목초지를 결딴 내버린 후 표표히 다른 초원을 향해 양떼를 몰고 떠나는 유목민처럼

가까이는 강릉으로, 여수로, 부산으로, 멀리는 제주에까지 마수를 뻗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가운데 홍대 앞과 정확히 대척점에 서 있던 동네. 북촌이 있었습니다.


2005~6년 북촌은 아직 개똥이 굴러다니고, 골목에 할마씨들이 나와 앉아 옹기종기 이야기나 나누시던

그야말로 조용하고 평범한 주택가에 불과했습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청와대에 인접해 높은 건물이 하늘을 가리지 않았고, 집들이 온통 기와집이었다는 것.

그 유명한 수제비 집은 인근에 근무하는 공무원들의 밥집이었고, 

지금은 주말이면 발디딜 틈이 없는 정독 도서관 앞 화동 길에는 

나이 팔순을 넘기신 이발사 아저씨께서 두유를 마셔가며 머리를 잘라 주시던 이발소나 겨우 있더랬습니다.

그 아름다운 길을 걷고 있노라면 마치, 우리가 아까운 줄 모르고 함부로 버리고 온 

너무나 그리운 우리의 모습들이 전시되어 있는, 살아있는 민속박물관을 걷는 것 같았어요.


홍대 앞에서 사진을 찍던 아이들은 기쁨에 춤을 추며 그 풍경을 사진에 담아 웹에 올립니다.

영문을 모른 채 젊은 친구들의 방문이 반가워 활짝 웃어 주시던 할머니들의 얼굴, 

60년대의 어느 날에 시곗바늘이 멈춰버린 듯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눈물 나게 아름다운 골목들.

그때, 그 아이들은 정녕 몰랐던 것이지요. 셔터를 마구 누르는 자신들의 검지손가락질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동네에서 그 할머니들을 몰아내고, 그곳에 중국인 관광객들과, 옷장사들을 들이게 되는

불행의 씨앗을 심고 있었다는 것을요.

그리고, 그때 그곳에 캐논 자동카메라를 든 이십대 중반의 저도 있었습니다.

달아주는 댓글들과, 감탄사에 고무되어 함부로 렌즈를 들이대었던 나날들. 무신경한 셔터질들.

흔히 빽통이라 불리는 대구경 망원 렌즈를 장착한 찍사들이 등장하고, 

마을버스나 정거하던 돈미약국 앞을 관광버스들이 점령했을 때 비로소 저는 심장이 덜컥 내려 앉았습니다.

아... 내가, 우리가 어마어마한 짓을 저질러 버렸구나

제가 그 아름다운 동네 북촌을 망쳤습니다. 저는 죄인 입니다.


기사 하나를 읽었습니다.

북촌의 상권이 죽어간다고. 그 상권을 되살려야 한다고.

그 동네의 진짜 모습을 기억하는 저는 감히 말 합니다. 그 동네는 죽어가는 게 아니라,

비로소 자본의 폭풍을 다 견디고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거라고. 


젠트리피케이션의 원인이 지대의 상승이라지만, 

저는 그 이전에 새로운 흥미라는 목초지를 찾아 유목민처럼 떠도는 힙스터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젊은 예술가들이며, 문화의 첨병인 그들이 어느 마을에 공방을 열고, 가게를 열어 놀이터 삼으면

힙스터를 추종하는 힙스터들이 그들을 쫓아 그 거리로 몰려들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는 흔한 이자카야와 옷가게가 들어서기 마련이지요.

그리고 마침내 올리브영이 입점을 하면 목초지의 황폐화는 완성이 됩니다.


힙스터들은 옛날 신촌과 홍대를 지나, 상수와 합정을 거덜내고,

북촌을 거쳐 서촌으로, 이제는 다시 공업사나 있던 익선동을 점령 중이라고 합니다.

지대가 싼 곳에 놀이터를 여는 것이 잘못은 아니니 따질 일은 아니지만, 

제 스스로 한 동네를 망치는데 일조했던 사람, 그래서 그 동네가 어떻게 망가지는 지를 목격했던 사람으로서

그들의 이동이 불안하기만 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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