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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나쁘진 않은데 이상할 정도로 평이합니다. 아주 흔한 공식들을 가져와서 쉽고 편하게 만들겠다는 "공정과정"이 도드라지네요. 영화를 정치적 의도만 가지고 과연 괜찮다고 평가해야 되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 좀 듭니다. 어찌보면 같은 계열의 <국가부도의 날>보다도 더 밋밋합니다. 저는 사실 <국가부도의 날>도 그렇게 좋아하진 않아요. 그런데 <블랙머니>를 보고 좀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래도 그 영화는 유아인이라는 걸림돌에도 불구하고 꽤 잘 뽑은 드라마라는 걸 좀 깨달았어요. <블랙머니>는 정말이지 그 흐름이 눈에 보일 정도로 뻔합니다. 특히나 마지막 장면은 음... 전 낯뜨거웠어요. 


저는 이제 이런 식의 "시민각성"영화에 큰 기대를 걸지 않습니다. <노후 대책 없다>의 출연진이 관객과의 대화에서 했던 이야기가 생각나요. 세월호 시위 나가느라 벌금만 몇백만원을 뚜드러 맞은 펑크 밴드의 모 멤버, 영화 속 주 출연멤버가 그런 질문을 받았어요. 현실에서의 시위가 세상을 바꾸는 힘과, 이렇게 영화나 문화적 매체들이 세상을 바꾸는 힘 중 어떤 게 더 크다고 생각하냐고. "역시 쇠파이프질이 영화보다는 더..." 그는 사실 영화가 무슨 힘이 있겠냐는 표정으로 그 말을 하긴 했습니다. <도가니> 같은 경우도 있겠죠. 그런데 그 수많은 실화 소재의 고발영화들은 얼마나 세상을 바꿨던가요. 제가 제일 우려하는 것은, 이런 식의 영화감상이 그 자체로 "정의구현"같은 느낌을 준다는 데 있습니다. 이런 영화들은 현실을 재미있게 알린다는 장점은 있지만 그 자체로 부조리에 대한 투쟁심과 분노를 해소해버리는 역기능도 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 벌어져야 할 싸움을 스크린 안의 캐릭터에게 다 위임해버리면서 뭔가를 한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영화의 가장 큰 목적은 카타르시스를 주는 건데 이런 식의 사회고발영화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는 것은 현실의 문제를 픽션에서 해결한다는 뜻이기도 하잖아요. 론스타 대한은행 매각 사태를 이 영화를 통해 안다는 것이 영화가 원하는 만큼의 각성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있어요.


<더 킹>, <내부자들>의 계보를 잇는 사회정의 엔터테인먼트 영화의 계보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위악적 인물들로 악의 유흥을 어설프게 즐기는 두편의 영화보다는 훨씬 더 정직하고 성실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굳이 그 두 어설픈 위악 영화에 빗대면서 칭찬을 해야할까, 그런 생각도 듭니다. 아차, 충무로를 헐리웃에 비교하면 안되죠... 아담 멕케이를 함부로 기대하다니! 그리고 전 정지영 감독의 영화들을 아직 무서워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남영동 어쩌구 그 영화. <1987>로 민주화 열사 고문 장면들에 심하게 데었기 때문에 그런 장면들이 나오는 영화는 아무리 위대해도 좀 보기가 꺼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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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배우는 조한철 배우였습니다. 어디서 봤다 했는데, <국가부도의 날>에서 주인공 한시현을 보좌하는 이대환 역으로 분했었죠. 한국의 경제위기가 어떻게 발생했는지 그 주범을 밝히는 비슷한 성격의 영화들에서 전혀 다른 진영에 속해있는 캐릭터를 맡았다는 사실도 재미있었습니다. <국가 부도의 날>에서 한시현에게 신발을 신겨주는 장면이 꽤나 인상깊었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그렇게 챙기는 장면은 로맨스로나 기능하게 마련인데 이 영화는 남자 부하가 여자 상사를 챙기는 건조한 장면으로 나왔거든요. 반대로 조한철 배우가 <블랙 머니>에서는 철저하게 남성적 사회의 우두머리로 나옵니다. 저는 마동석 배우가 소비하는 억세고 능청스러운 근육질 마초를 정말 안좋아하는 편인데, 반대로 이렇게 샤프하고 마른 남자들의 사무적 마초에는 좀 꽂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의뢰인>에서 박희순 배우의 검사 캐릭터도 참 섹시하다고 생각했죠. 검사들을 진두지휘하는 장면들이 꽤나 매력있더라구요. 캐릭터나 상황이 아니라, 리더십을 표한하는 마른 중년 남성의 매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아마 이 영화의 주인공인 조진웅이 상대적으로 유아적이고 철없는 캐릭터를 밀어붙이는 탓에 더 대조적으로 도드라진 것도 있을 거에요.


이 배우 발성이 참 좋습니다. 목 쪽에서 울리는 목소리를 내는데 그게 검찰부장 같은 캐릭터를 연기할 때 아주 효과적으로 어필하더군요. 약간 비열하게 파인 쌍커풀(?)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몸선도 매우 날렵합니다. 한국영화를 보면 주연배우들보다는 조연배우들을 발견하는 기쁨이 더 커요. 이 배우가 앞으로도 다양한 캐릭터들을 맡길 기원합니다. 배나오고 너무 처진 아저씨들이 고압적으로 나오는 것보다는 그래도 좀 날씬하고 차가운 아저씨들이 신경질적으로 구는 게 더 매력은 있으니까요. 제 기준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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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제가 <블랙 머니>를 보며 깨달은 사실 하나는, 남자들이 양복을 입고 떼거지로 우르르 몰려다니는 영화는 그 내용과 진의가 어떻든 무조건적으로 갱스터 영화의 문법을 따라한다는 사실입니다. 전 그 쪽 영화를 많이 보진 못했지만 한국 영화들은 미국 영화보다는 야쿠자 영화에서 레퍼런스를 더 따온 게 아닌가 추측합니다. <매트릭스>같은 영화에서도 양복을 입고 권위자로 활약하는 스미스 요원 같은 경우 집단의 힘보다는 개인의 히스테리가 더 강하게 그려지잖아요. 집단의 힘을 이렇게 통일된 양복으로 그리는 건 상대적으로 집단주의가 강한 동양 쪽의 사회적 무의식이 아닌가 싶은데... 어쨌든 이런 연출은 상당히 촌스럽습니다. 충무로는 언제나 되어야 깡패 영화의 이미지 최면에서 좀 벗어나게 될까요? 정의로운 개인의 안간힘이 조직 전체로 이어져서 통일된 군체집단을 이룬다는 이 철없는 집단주의는 왜 이렇게 깡패처럼 그려지는 걸까요? <신세계>만 보더라도...으음... <바람> 같은 청소년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떼거지 유니폼의 환상이 왜 이렇게 권위 자체로 표현되는 걸까요? 민중의 각성을 바라는 이 영화는 미쟝센의 형식에서 주제를 배신하고 있습니다. 그게 아무리 대중적인 작법이라 하더라도요. 미국은 아무리 유치해도 슈퍼히어로 장르로 개개인의 각성과 활약을 그리고 있는데 한국은 아직도 옷 갖춰 입어! 돌격! 같은 이미지로... 의식의 통일과 단체의 힘은 오히려 파편화된 개개인이 그 안에서 개인의 형식을 유지할 때 더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을까요? 퀴어 퍼레이드처럼? 특히나 조진웅을 보좌하는 박수사관 같은 캐릭터를 보면 이 영화의 검찰은 그냥 단정한 양복을 입은 조폭입니다. 혈기 넘치는 돌격대장 아래에, 조금 촐랑거리고 날쌘돌이 이미지를 맡은 부하 캐릭터는 영락없이 갱스터 영화의 그것이잖아요. 허성태 배우의 캐스팅도 영락없이 그런 종류고. (곽도원이 안나온 걸 그나마 감사해야 할까요...?)


이 영화는 여러모로 시의부적절합니다. 미투와 각종 시위로 페미니즘 이슈가 한창일 때 여성의 무고로 억울한 남자를 주인공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 조국 장관을 향한 압박수사로 검찰의 횡포가 다시 한번 부각된 지금 검찰을 정의로운 조직으로 그리려 한다는 점, 서글서글한 열혈 주인공의 때늦은 분기탱천을 계기로 삼는다는 점, 갱스터 영화의 문법을 빌려 인물들의 결탁과 욕망으로만, 즉 나쁜 놈과 억울한 놈의 이분법으로 도식화한다는 점, 어딘지 아저씨스러운 능청과 뻔뻔함 등 여러가지로 영화가 좀 올드합니다. 정지영 감독이 이 영화를 그렇게 그린 의도를 모르는 바 아닙니다. 검찰 조직은 이 영화를 보고 최후의 양심이라도 각성하라는, 일말의 신뢰를 호소하는 거죠. 그래도 너희 나쁜 놈 아니잖아, 할려면 할 수 있잖아, 정신 차려야 하잖아 같은 감정적 호소로 영화 전체의 톤이 조진웅의 캐릭터에 기대고 있는데 그게 과연 현실이랑 맞아떨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건 <더 킹>의 후반부 실수를 그대로 반복하는 거죠. 저는 늘 충무로에 멜빌 감독의 사무적 태도가 깃들기를 좀 소망합니다. 장 삐에르 멜빌이 영화 한가득 쿠세를 집어넣긴 하는데, 그 쿠세는 영화 전반에 깔린 사무적이고 건조한 태도에서 비롯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냥 일이니까 하고, 좀 찔리지만 어쩔 수 없다는 체념 아래 하고, 의미보다는 책임에 몰두한 집중력들이 부딪히면서 생기는 불꽃 같은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왜 한국영화는 이렇게 심장박동을 영화 전체에 깔려고 하는 걸까요? 이게 영화를 나이들어 보이게 합니다. 왜 이렇게 신파를 못버립니까? 네 제가 너무 거장들과 실력파 감독들의 결과물을 빌려서 영화를 깎아내리고 있군요...


뭐 어쩌겠습니까? 김지운 감독은 심지어 개화기 독립운동군들의 싸움마저 조직폭력배들의 뒷골목 싸움으로 장르치환을 했었는데? 송강호와 이병헌과 공유를 데리고 와서 하는 게 니 내 쪽으로 넘어온나, 저 놈들 아주 나쁜 놈들인 거 모르나! 하는 가슴 뜨거운 의리 이야기를 했는데요. 한국 영화의 조폭중독은 언제나 되어야 좀 나을까요? 왜 이렇게 충무로는 개인은 조직의 머리 아니면 가슴으로 치환될 수 밖에 없으며 결국은 조직 전체를 대표하거나 그 안에 흡수되어 소멸되고 마는 게 낭만이라는 보수적 관점을 버리지 못하는 걸까요? 하기사 그 점에서 박찬욱과 봉준호 만큼은 좀 예외적일 수 있습니다만... 지겹습니다. 다시 한번 <용순>의 신준 감독이 GV에서 했던 말을 곱씹어요. "저는 앞으로 검사와 조폭이 등장하는 영화는 절대 시나리오를 쓰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의 소신이 한국영화계에에 더 깃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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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작품인가? 그렇다고는 못하겠어요. 추천하느냐? 추천도 못하겠습니다. 이 영화의 목적을 실천하는 것은 꼭 영화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외환은행 론스타 매각 사태로 검색하는 게 여러모로 시간절약하는 길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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