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는 없습니다만... 다 보고 나니 한 달 후에 시즌 2가 나온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있네요. ㅋㅋ



 - 뉴욕의 참 아늑하고 편안해 보이는 중고/고서 전문 서점의 훈남 매니져 '조'라는 양반이 주인공입니다. 조는 자신의 서점에 들른 손님 '벡'에게 첫눈에 반하지요. 미녀일 뿐만 아니라 명문대 출신에 글쟁이가 꿈이라 책을 사랑하는 조와 잘 맞는 구석이 많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녀만이 바로 자신의 운명의 상대라는 확신을 갖고 조는 어떻게든 벡과 가까와지고 또 연인이 되고자 애를 쓰지만 벡의 갑부 애인, 갑부 베스트 프렌드 등등이 그 앞길을 막아섭니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절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여...



 - 네 뭐 되게 고루한 시작입니다만. 이 드라마의 포인트는 주인공 '조'가 문자 그대로 미.친.놈.이라는 겁니다. 요즘 많이들 쓰는 표현으로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싸이코패스 스토커'라고 할 수 있겠죠. 다만 이야기를 보다보면 이 양반이 '싸이코패스'의 개념에 들어맞는 인간이 맞는지 좀 애매합니다. 캐릭터가 상당히 괴상해서 단순한 한 두 단어로 정리하기가 어려워요. 어쨌든 감정이 괴상하게 뒤틀려 있고 도덕 관념이 안드로메다에 가 있는 위험한 인간이 오만가지 범죄 행위를 저지르며 사랑을 쟁취하려 애를 쓰고 있으니 대충 '싸이코패스 스토커'라고 퉁쳐도 설명에 큰 문제는 없겠죠.


 근데 뭐 여기까지는 그냥 평범(?)한데...

 의외로 그렇게 진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기에 몇 가지 포인트가 더 추가가 되거든요.


 보통 이런 이야기에서 싸이코패스 범죄자는 아주 꼼꼼하고 치밀하며 머리도 좋고 유능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조는 늘상 쏟아내는 어마어마한 수다와 지식 자랑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르며 수습도 놀랍도록 허술해요. 위기 상황에서는 나름 임기응변을 잘 해내는 편이긴 하지만 애시당초 겪을 필요가 없는 위험에 매번 스스로 걸어들어가는 짓을 반복하니 똑똑하단 소릴 해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위험한 놈이긴 한데 멍청하게 위험한 놈이고, 그런 주제에 자존감은 쓸 데 없이 높아서 자신이 위험한 바보짓을 저지르는 와중에 나레이션으로 끊임없이 말도 안 되는 합리화를 해댑니다. 그래서 불쾌하고 위험하고 더러운 놈이 궁서체로 진지한 태도로 무시무시한 짓을 저지르고 있는데 그 풍경 자체는 종종 코믹해집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보통 이런 이야기에서 타겟이 되는 여성 캐릭터는 순수하고 결백하고 평범하지만 기본 개념은 잘 잡혀 있고... 뭐 그런 식인 게 룰이잖아요. 그런데 이 드라마의 그 분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허세 쩔고 멍청한 와중에 이기적인 속물입니다. 물론 본인은 자기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주인공도 거기에 맞장구를 쳐주지만 실상은 별로 그렇지가 않아요. 심지어 벡의 친구들도 본인이 없는 자리에선 다들 벡을 까는데 듣다 보면 틀린 말이 하나도 없구요(...) 결국 이 이야기에서 벡을 좋게 보고 높이 평가하며 진심으로 아껴주는 사람은 지구상에 조 하나 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조가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조가 사람 보는 눈이 없고 멍청한 데다가 어차피 벡에게 자신의 환타지를 투사하는 중이라 벡의 실체가 어떻든 별로 신경을 안 쓰기 때문입니다. 


 종합적으로, 상황 설정이 이렇고 나오는 인간들이 이렇다 보니 이 시리즈는 나름 꽤 독특한 로맨틱 코미디(...)가 됩니다. 뭐 이것보다 잘 만든 스릴러, 잘 만든 로맨스야 수백 수천편이 있겠지만 어쨌거나 '이거랑 비슷한' 이야기는 거의 본 기억이 없어요. 그래서 꽤 맘에 들었습니다.



 - 근데 보통 이렇게 튀는 기본 설정으로 승부하는 이야기들은 대체로 초반이나 중반을 넘기고 나면 설정의 약빨이 떨어지게 마련이잖습니까. 이 드라마도 예외는 아니어서 전체 10화 중 4~5화쯤 넘기면 슬슬 자극이 떨어지고 이미 나온 상황들의 변주가 이어지면서 질리기 시작합니다. 근데 그런 시점이 올 때마다 적절하게 이야기를 한 번씩 꼬아주고 캐릭터의 새로운 면을 하나씩 보여주고 하면서 시청 포기를 막아요. 그게 어떤 것들인지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언급하지 않겠지만, 타이밍도 상당히 좋고 내용도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이라 꽤 잘 먹혔어요. 분명히 나름 능력이 되는 작가가 만든 이야기라는 느낌을 받았네요.


 대사빨도 나름 괜찮습니다. 소위 '명대사' 같은 건 없지만 각 캐릭터들의 성격을 상당히 직관적으로 잘 드러내줘요. 그리고 늘 정신 없이 쏟아지는 조의 나레이션은 이 드라마의 백미죠. 주인공의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내서 이 인간이 얼마나 공허한 놈인지를 잘 드러내줌과 동시에 계속해서 웃음(...)을 줍니다. 대체로 그냥 웃어서는 안 될 상황이 좍좍 이어지는데 어쩔 수 없이 웃겨요. 불쾌하고 위험한 내용을 소재로 삼고 있어서 호불호는 크게 갈리겠지만 이 드라마는 코미디로서도 대체로 준수합니다.


 또 한 가지 괜찮은 점은 이 이야기가 주인공의 입장에 이입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성장 과정에서 겪은 학대라든가, 전 여자 친구의 부정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어느 정도 주인공 캐릭터에 바탕을 깔고 설명을 붙여 주긴 하지만 그걸 알리바이 삼아 주인공을 합리화하려는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아요. 여기서 주인공에게 험한 꼴을 당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좀 크게 혼나봐야할'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그런 일'까지 당해야할 사람들은 아니거든요. 

 이건 아주 큰 장점입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주인공에게 냉정하게 굴어주는 덕에 오히려 불쾌함이 많이 줄어들거든요. 어차피 누가 뭐래도 주인공의 행동들은 절대 용납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만약 이 이야기가 주인공에게 연민을 보였다면 불쾌해서 끝까지 보기 싫었을 거에요.



 -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뻔한 듯이 시작해서 뻔한 듯이 흘러가지만 계속해서 소소하게 예측을 벗어나는 잘 짜여진 이야기입니다. 대체로 뜨악 소리가 나게 불쾌하면서도 동시에 웃기고 심지어 가끔은 정말로 로맨틱해서 보는 사람 당황스럽고 불편하게 만들기도 해요.

 중반 이후로 잠시 루즈해지지만 딱 10화로 끝나는 이야기이고 마지막 두 화 정도는 흐름상 상당히 몰아쳐주기 때문에 한 번 꽂히면 금방 끝낼 수 있습니다.

 불쾌하고 긴장되면서 웃기고 가끔 로맨틱하기까지 하는 잡탕 장르인데 그게 상당히 조율이 잘 되어 있어서 스릴러, 로맨스, 코미디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아마 그럭저럭 재밌게 보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꽤 재밌게 봤어요. 애초에 기대치가 낮기도 했지만요. 하지만 변태남이 로맨스를 가장해서 죄 없는 여자를 스토킹하는 이야기이니 여성분들은 저와는 소감이 굉장히 다를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드네요.




 - 또 여담으로.

 다 보고 나면 '이거 결국 스노브들 까는 이야기인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책벌레에 '순수 문학'을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남녀를 등장시켜 놓고 시종일관 괴롭히고 놀려 먹는 이야기니까요. 원작 소설이 있는 작품인데 당연히 원작 소설도 장르 소설일 테니 정말로 그런 의도가 조금은 있을지두요.



 - sns의 위험성에 대한 교육 자료로 써도 될만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특히 여성들 입장에서요. 주인공이 sns니 인터넷이니 이런 거 다 싫어하는 구식 책벌레로 설정이 되어 있는데 맘에 드는 여자 스토킹을 위해 sns는 아주 대차게 잘 써먹거든요. 또 벡과 벡의 친구들을 통해 계속해서 sns의 부정적인 면모를 부각시키기도 하구요.



 - J. D. 샐린저의 친척으로 설정된 캐릭터가 하나 등장하는데 긍정적인 부분이라곤 거의 찾아보기 힘든 캐릭터인 데다가 '그 집안'에 대해서도 계속 빡세게 디스를 해대서 이래도 괜찮나? 싶었습니다. 실존 인물이고 당연히 그 가족, 후손들이 살고 있는데 대놓고...

 근데 생각해보니 이 양반, '보잭 홀스맨'에 아예 고정 캐릭터로 소환당해서 문학따윈 다 죽었어 이젠 티비의 시대다!! 라고 외쳐대고 있거든요. 그게 괜찮다면 이 정도야 뭐.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요.



 - 주인공의 직업이자 취미인 고서 관리 및 수선에 대해 깊이는 아니지만 꽤 자주 보여줍니다. 괜히 재밌더군요. 당연히 그게 스토리와 깊이 연결되기도 하구요. 이런 거 좋아요. 굳이 등장 인물을 전문직으로 설정해 놓았다면 전문적인 구석을 뭐라도 보여줘야 현실감이 살죠.



 - 위에서 주인공의 멍청함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이 이야기 속의 그 시점까지 멀쩡히 살 수 있는 건 사실 운빨의 영향이 가장 큽니다. 하지만 작품의 분위기상 그게 거슬리지는 않아요. 주인공이 정말 유능해서 본인 능력으로 다 헤쳐나오는 이야기였다면 오히려 더 불쾌해져서 재미가 떨어졌을 것 같거든요. 어디까지나 이건 주인공들을 놀려 먹는 재미로 보는 드라마라서. ㅋㅋ

 어쨌든 시청자와 두뇌 회전 게임을 하는 스릴러는 아니니 그런 쪽으론 기대하지 마시길.



 - 개인적으로 결말이 아주 맘에 들진 않았는데. 그래도 끝장면은 좋더군요. 그게 뭔지 설명은 못 하지만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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