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의 이야기...(안내자3)

2017.09.04 16:31

여은성 조회 수:620


 주말에는 꼭 일기를 쓰려 하는데...어제는 빌어먹을 북한 때문에 쓸 수 없었어요. 그야 이젠 일상이 되어버린 핵실험 정도에 주식이 떨어질 것 같지는 않았지만...나쁜 일이 일어날 확률이 10%를 넘어버리면 걱정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거든요. 다행히 별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예전에 쓰던 거나 마무리해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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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어디까지 썼더라~mn이 밖으로 나오라고 했고 나는 볼펜을 숨겨서 나갔다...까지였죠. 그때의 글 마지막에 썼듯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 볼펜을 써먹을 상황이 왔었다면 지금쯤 집행유예 기간이겠죠.


 어쨌든 밖으로 나갔어요. 목격자가 있는 편이 유리할 것 같아서 사람이 좀 없나 둘러봤지만 없었어요. 그리고...

 

 mn은 나를 보자 '한대 피세요 형님.'라고 하며 담배를 내밀었어요. 담배를 내미는 mn을 보며 조금 전의 상황을 되돌아봤어요. 밖으로 나오라는 제스처는 밖으로 나오라는 제스처가 맞았지만 입가로 주먹을 들어올려 보이는 제스처는 주먹질이 아니라 담배를 피우자는 제스처였던 거예요.



 2.'안 피워.'라고 하려다 '끊었어.'라고 대답했어요. 어렸을 때 핀...건 아니지만 대충 피는 척 한 시기는 있으니까 거짓말은 아니었어요. 그러자 그는 매우 빠른 속도로 담배를 비벼 껐어요. 피우시고 싶을 텐데, 냄새 맡게 해서 죄송하다면서요.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는 이유가 뭘까? 무슨 계산이라도 깔려 있는 걸까? 라고 생각하다가 그만뒀어요. 이 녀석들은 그렇게 계산적인 녀석들이 아니라 그냥 인식하는 대로 행동하는 녀석들이니까요. 이 정도면 간보기는 그만해도 될 것 같아서 여기는 이제 끝내고 제대로 된 곳으로 옮기자고 했어요. mn은 '쏘시는 거예요?'라고 물었어요. '말을 꺼낸 놈이 쏘는 거 아냐?'라고 대답해 줬어요.



 3.그 말을 듣자 mn의 광대뼈가 매우 빠른 속도로 올라갔어요. mn이 느물거리는 웃음을 거두니까 심지어는 약간 귀요미처럼 보이기까지 했어요. 뭐...내 기분도 좋아졌다...라기보다 유쾌해졌어요.


 하지만 예약을 하고 목적지로 가는 차 안에서 mn이 mw와 m1을 매우 비하적인 멸칭으로 불러대기 시작했어요. 기분이 다시 안좋아졌어요. 역시 이 녀석과 정말로 친해지는 건 무리겠다고 여겨졌어요. 나는 mw와 m1이 반격하기를 기다렸지만...그 둘은 그냥 가만히 있었어요. 아마도 그녀들은 이런 말을 듣는 게 일상화가 되어버렸기 때문이겠죠. 여기서 이런 말을 하는 건 그 셋에게 이상한 놈으로 보여질 것 같았지만 그래도 말해야 했어요.


 '쟤네들 그렇게 부르지 좀 마.'


 mn는 운전대를 잡고 있다가 나를 보며 이상하다는 듯 물었어요. '기분 나쁘셨어요?'라고요. 이번엔 연기를 할 것 없이 그냥 내 모습대로 대답했어요. '쟤네들 기분이 좆같을거아냐.'라고요. 그리고 뒷좌석을 돌아보고 mw와 m1에게 말했어요.


 '만약 니들 기분이 안 좆같으면, 그거야말로 좆같은거고.'


 

 4.휴.



 5.어쨌든 그들에게 감놔라 배놔라 할 입장은 아니었어요. 하긴 이건 다른 모임의 사람들에게도 그렇긴 하지만...다른 모임의 보통 사람들은 애초에 상대가 불편할 만한 짓을 안 하죠. 보통 사람들은 방 안을 미스트의 안개마을로 만들거나 음악을 맥시멈으로 틀어대거나 대화의 89%를 욕으로 채우지 않으니까요. 


 어쨌든 그들이 뭔 짓을 해도 담배 좀 나가서 피라거나...음악 좀 꺼 달라거나...욕의 수위와 빈도를 좀 줄여달라는 요구는 할 수 없었어요. 내가 그들에게 맞춰야 했죠. 덕분에 그날은 오랜만에 담배 냄새에 쩔은 옷을 입고 돌아가야 했어요.


 그렇게 종종 그들과 어울렸어요. 멤버 구성이 불어나긴 했지만 그 셋은 거의 나오곤 했어요. mn이 나오는 요일과 시간대로 mn의 본업을 추리해보려 했지만 도저히 알 수가 없었어요. 처음엔 이 체격이면 보안업체 쪽이 아닐까...싶기도 했지만 온몸에 가득한 문신 때문에 그건 아닐 것 같았어요.


 나는 일년 내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 물어봐요. 내 생일파티에 오지 않겠냐고요. 물론 뜬금없이 처음 만난 사람에게 그렇게 말해봐야 성공률은 낮지만 상관없어요. 말하는 건 공짜잖아요? 공짜 복권을 긁어보듯이 처음 만난 사람들에겐 '8월에 생일파티에 올래요?'라고 말하죠.


 하지만 그들에게는 생일파티에 대한 말을 꺼내지 않았어요. 당시는 아직 쌀쌀할 시기였는데 내가 이들을 8월까지 볼 일은 없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내가 아는 사람들과 이들이 섞이는 자리는 만들지 않기로 마음먹고 있었어요.



 6.왜 그런 마음을 먹었는지...그렇게 작정하고 선을 그었던건지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이 녀석들이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끔찍한 짓을 했기 때문에? 그건 내가 아는 착하다는 사람들도 사실 다 그래요. 사람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끔찍하게 대하니까요.


 아니면 이 녀석들이 양아치라서? 그것도 별로 이유는 안 되고요. 하여간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몇 주일 정도 볼 줄 알았던 그들을 생각보다는 오래 보게 됐어요. 두어 달 정도. 


 그들과 만나면서 알게 된 건, 내가 내가 원하는 만큼 강철같은 녀석은 아니라는 거였어요. 그럴 마음을 먹어도 사람과 만나면서 완전히 선을 긋는 건 힘들었어요. 아무리 그들을 만날 때는 다른 캐릭터를 내세운다고 해도...그들이 내게 흘러들어오는 걸 막을 수는 없거든요. 그건 나를 약하게 만들고요. 이건 꽤 문제예요. 여자의 경우엔 상관없지만 남자의 경우에는 너무도 껄끄럽다는 걸 알게 됐어요.



 7.뭐 사실 그래요. 가게의 남자 실장이나 남자 사장들도 양아치예요. 여기서 양아치는 딱히 편견이 담긴 표현은 아니예요. 그냥 인간으로서의 카테고리를 나누는 나의 분류법이예요. 양아치에겐 양아치 나름의 세상을 상대하는 방법이 있으니까요. 화류계에서 일하는 남자들은 양아치였거나, 사장이나 실장까지 올라간 지금도 양아치인 편이죠. 


 이건 내 관찰에 의한 편견일 수도 있겠지만, 세상은 그렇거든요. 양아치가 아닌 척 하고 있다가 어떤 상황, 어떤 순간, 어떤 장소에서 그동안 잘 숨겨왔던 양아치를 내보내면 쉽게 이득을 볼 수 있어요. 그들은 자신 안의 양아치를 꺼낼 상황이 오면 바로 꺼내서 써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 두죠. 그래서 '한 번 양아치였던 자식들은 양아치를 완전히 그만두는 법이 없구나.'라고 믿게 됐어요.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실장이나 사장의 스킨(skin)을 쓰고 있어요. 깔끔한 옷을 입고 깔끔하게 머리를 정리하고 기계식 시계를 차고 정해진 시간에 출근을 하는 생활을 해내고 있죠. 20년 전엔 범생이였던 초식동물들에게 굽신거리는 연기를 할 줄도 알고요. 


 주말에 그들을 사적으로 만나서 추리닝을 입고 껄렁껄렁하게 나온 그들에게 밥을 얻어먹어도 나는 여전히 손님이고 그들은 여전히 사장인 거예요. 100번을 만나도 절대 '그냥 아는 사람'이 될 수 없는 거죠. 물을 내가 떠오거나 상추쌈을 내가 리필해 오는 일 따윈 없어요. 내가 건방져서가 아니라, 그들이 내게 그럴 틈을 안 주거든요. 


 '나는 그 녀석들과도 잘 거리를 뒀으니까 이 마포구 패거리와도 선을 잘 그어낼 수 있어.'라고 여겼지만 그렇게 잘 되지는 않았어요. 위에 썼듯이 나는 그들의 손님이 아니라 '그냥 아는 사람'인 거니까요.


 

 8.여러분은 이 말을 믿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전에 썼듯이 그래요. 몸의 대부분에 문신이 있는 떡대든 실형을 살고 나왔다는 양아치든, 그들이 야만성을 발휘하려고 하면 나는 그들을 처리할 수 있어요. 그들을 '타자화하는'게 가능한 동안에는요. 왜냐면 그들이 물리력을 정말 잘 구사하는 녀석이었다면 그걸로 이미 큰 돈을 벌고 있을 거잖아요. 주먹질로 큰 돈을 벌지 못할 정도의 수준까지라면 나의 의외성이 그들의 물리력보다 언제나 한발쯤 앞선다고 자신하는 편이예요. 


 하지만 그들이 꾸깃꾸깃한 지폐를 꺼내서 복권 몇만원어치를 한번에 사는 걸 볼 때...자기네 미용실에 오면 펌을 싸게 해드리겠다고 할 때...다 놀고 나서 순대국은 먹여 드리고 보내고 싶다고 말할 때...24시간 설렁탕집에 앉아 그들의 엄마 남편(그들 표현으로)에게 매일 얻어맞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할 때...택시를 타고 가려는데 '은성 형'의 택시비를 내주겠다며 택시기사에게 2만원을 건넬 때...뭐 이럴 때마다 그들을 타자화하는 회로를 유지하기가 힘들단 말이죠. 왜냐면 그런 접촉을 할 때마다 그들을 물체로 여기는 대신 인격체로 여기게 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야 그게 나와 그들 사이를 가깝게 만들게까지는 하지 않아요. 하지만 햇빛을 쬐거나 비를 맞듯이 그들의 감정을 느끼게는 만들거든요. 그들의 무언가가 마치 열기처럼 내게 복사되거나 마치 비처럼 젖어들면서 스며드는 거죠. 


 그렇게 그들을 타자화하지 못하게 되고 인격체로 여기게 되면 그들에게 미안하게 여겨질 일 같은 건 도저히 저지를 수가 없게 되는 거고요. 이게 나를 약하게 만드는 일인 거죠. 그래서 남자 마이너스 인간은 정말 껄끄러운 존재들이예요. 남자 마이너스 인간은 정말 정말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절대 알고 지내지 않기로 했어요.


 내가 그들과 친해지는 건 곧 그들을 이길 수 없게 되는 거라는 걸 잘 알게 됐어요. 


 

 9.하긴...이건 누구든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그게 누구든, 누군가와 친해지는 건 그 누군가를 이길 수 없게 되는 거라는 걸 경험하게 됐거든요.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그래요. 그래서 누군가와 지나치게 가까워지는 건 경계하고 있어요.


 왜냐면 누군가를 이기는 것과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것...둘중 하나만을 고른다면 전자를 골라야만 하니까요. 여러분도 그렇...죠? 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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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이 안내자인데 '안내자에게 안내받은 사람'만 나오고 정작 제목의 '안내자'는 끝까지 안 나왔네요. m1과 mw는 뭘 하는 인간들인지 아예 설명도 안 됐고요.


 원래는 있었던 일들을 쓰려고 했는데 그냥 말았어요. 일기에 있었던 일을 쓸 때는 있었던 일을 쓴 후 그걸 메타포 삼아서 나의 감상이나 느낌을 쓰곤 하는데, 그들과 있었던 일은 그냥 있었던 일이어서요. 감상을 쓸 만한 게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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