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전 시대에 만들어진 영화를 봤습니다. 일본 애니의 여성 캐릭터 대상화는 오래된 이슈이지만, 이러한 논의가 '더' 수면 아래에 있던 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을 지금 보니, 어떻게 해도 변호해줄 여지가 없어 뼈마디가 냉랭히 식어가는 느낌이었어요. 


그나마, 2018년의 상영관 안에서 민망함이 감도는 게 느껴졌다면, 그 정도가, '더디다 더디다 해도 그래도 세상이 발전하긴 하나보다' 라는 작은 성과일까요. 

이제부터 만들어질 컨텐츠들은 이제 '이렇게까지 대놓고' 그러진 못하겠지...? 라는 생각도 하였으나

이 시대의 발명품이 고작 <너의 이름은>이라면 아직 아연하지요.



2. 작품이 창작된 구시절과, 장르의 성향을 백번 감안해서 참고 보려는데, 이거 원 문제되는 게 줄줄이 이어지자, -> '와, 아주 대박이여, 몇 개나 되는지 어디 한 번 세볼까.' 하다가 -> 집계가 너무 빨라져 이러다 세 자리가 넘어갈 것 같아서 금방 관뒀습니다. 그냥 '여성 캐릭터가 나오는 장면 전체!' 라고 하면 될 것 같죠. 


나중엔 꺅 소리 지르고 싶을만큼 '엄마 쟤 흙먹어..!' 싶은 장면이 너무 많아서ㅋㅋㅋ어두운 극장 안에서 입을 쩍 찢으며 기함을 토했어요.



3. 이야기 속에서 여성 캐릭터가 이렇게 거듭 대상화, 평면화, 신비화되는 이유가 도당체 뭘까. 

아마도 여성 작가의 부재, 지위와 일차적으로 관련이 있을 것이고

그 사회 속의 어떤 젠더 남성은 어떤 젠더 여성들을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겠죠.

뭐, 진부할만큼 당연하고 반복되는 이야기지만요.



4. 불편한 신발을 신고 걷다보면 조금씩 짜증이 생깁니다.

처음부터 불편할 수도 있고, 처음엔 느껴지지 않았는데 조금씩 불편함이 몸에 쌓이고 쌓여서 자기도 모르게 ('왠지 모르게') 예민해져있기도 하죠.

그러다가 누가 어쩌다 스치며 건드렸는데 그 순간 홱!! 본인도 놀랄만치 꽥 '신경질'이 터져나오는, 비슷한 경험이 (성별을 불문하고) 있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참아온 역사와 시간을, 상대방은 모르죠. 

모르고, 갑작스러운 분출만 단편적인 사건으로 보이겠죠. 그러고 말하겠죠. "힉, 히스테리!"


런닝맨에서 유재석 씨가 자주 얘기하는, "미인들에겐 기본적으로 짜증이 있어...ㅎㅎ" 라는 농담에 대해서도, (예능을 다큐로 받아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봐요.


누가 이 사람에게 불편한 신발을 신겼고,

불편함과 고통과 짜증, 억울함을 솔직히 토로하지 못하고 참게 했는지, 

그 범인을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4-1. 그렇죠. 단지 신발에 대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5. 정치적 올바름을 탑재하지 않은 영화를 보거나, 그런 상황 속에 있다보면,

앞으로 또 다가올, 이 다음의 얼척없는 상황에 당황하고 상처받지 않도록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되고, 그것은 마치 자갈밭에서 지뢰를 피하며 걷는 것과 같아서

필요 이상의 긴장을 하게 됩니다.


(여자 선생님의 몸에 대해 반복적으로 맥락없이 불쑥 불쑥 음담패설을 주고 받던 영화가 다음 쇼트에서 주어를 생략한 채 '둥그냐, 납작하냐,'라고 말을 꺼냈을 때, 관객이 성적인 농담을 떠올렸다면 그건 결코 관객 개인의 음란마귀 때문이 아닙니다. 결코.)


뻔뻔한 지뢰를 자갈로 믿었다가 배신당하는 일이 한 번이라도 쌓이게 되면

무고한 자갈을 지뢰로 오해하는 일도 생깁니다.


하지만, 하나의 지뢰가 있는 자갈밭은

하나의 자갈이 있는 지뢰밭과 다름 없으며, 

더 중요한 건

누군가는, 단 하나의 지뢰도 신경조차 쓸 필요없는 풀밭을

맨발로 걷고, 뛰놀고 있다는 거죠.




* 언급한 영화는 <쏘아올린 불꽃, 및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 입니다. 영화 자체가 중요하진 않아서 주석처럼 덧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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