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회사에서 다양성을 지원한다는 정책을 발표하고 여러모로 그룹활동을 장려하고 있습니다. 다양성이란 아무래도 마이너리티 그룹을 말하는 것이겠죠?

첫번째로 게이 레즈비언 그룹이 발족했고 그룹 발족식을 할 때마다 사무실 전체 사람들을 초대해 배경설명과 활동 장려를 합니다. 그룹에 가입하기 위해서 반드시 본인이 그 그룹의 성격에 해당하는 멤버일 필요는 없습니다.

두 번째로는 여성 파워 그룹이 발족식을 가졌습니다. 

세 번째는 중국인들이 주최가 되어 '범아시아 체험'이라는 그룹을 만들었더군요. 어느날 한 친구가 오더니 이런 그룹을 만들었고 오는 음력 설날(이라고 썼지만 사실은 차이니즈 뉴이어)에 발족식을 하면서 설날에 대한 소개를 할 건데 저한테 한국 설에 대해서 소개를 해줄 수 있냐며 물어왔습니다. 얼떨결에 일단 그러겠다고 대답은 했습니다.

나중에 공식적인 이메일이 왔는데 '범아시아체험' 그룹은 줄여서 약어로 PAX라고 부르며 차이니즈 뉴이어를 소개하는데 중국, 베트남, 한국, 인도 네 개 국가의 소개를 한다고 했습니다. 일단 저는 이름에서 좀 뜨아 했습니다. 대체 이 이름은 뭐지? 범아시아는 뭐며 팍스는 대체? 이름이 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거 아니냐고 넌지시 물어봤지만 그게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발표를 하는 상황이 되어 일이 터져버렸습니다. 음력설을 차이니즈 뉴이어라고 부르는 거야 워낙 널리 퍼져 있어서 제가 고칠수는 없지만 제가 보낸 한국 설을 소개하는 슬라이드에 두 장이 사라지고 제목 슬라이드는 붉은 깃발과 붉은 랜턴으로 가득메운 중국의 광장 사진이 떡하니 들어가 있는 겁니다. 그 위에 '코리안 뉴이어'라는 제목이 얹혀있고요.  


이쯤 되니 아무리 연결을 안시킬려고 해도 이 상황을 동북공정과 새로이 떠오르는 중국의 패권주의와 연관을 안 시킬 수가 없더군요. 진짜 범아시아 체험이 범아시아주의인 것 같고 팍스는 팍스 시니카인것 같고... 무엇보다도 한국과 베트남과 인도는 차이니즈 뉴이어를 어떻게 지내는지 소개하는 자리...저는 인도에서도 음력설을 지내는 곳이 있는 줄 몰랐는데 이 쯤되면 차이니즈 뉴이어라고 부를 수 없는 것 아닌가요?


고민끝에 오피스 매니저에게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사실 메일을 보내기 전에도 이게 이의를 제기하는 게 맞는 건지 아닌지 많이 망설였는데 그냥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이게 과연 회사에서 추구하는 다양성인가? 시드니에 살고 있는 중국인은 마이너리티인지는 몰라도 지금 돌아가는 국제정세에서 중국은 결코 약한 세력이 아니고 동북아, 동남아 관계에 온갖 복잡한 파워게임이 진행되는 이 상황에 대체 범아시아는 뭐고 팍스는 무슨의미인 걸까요? 제 매니저에게도 범아시아주의에 대해서 살짝 귀띰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의 일방적 패배로 끝날 가능성이 크겠죠. 사무실에 한국인은 저 혼자뿐이고 한국에 대한 이미지라고 해봤자 걔들이 아는 건 북한이 시시때때 발사하는 미사일뿐이거든요. 게다가 인터넷을 열심히 찾아봐도 범아시아주의는 문제가 많지만 범아시아라는 단어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래도 하고많은 단어를 놔두고 굳이 범아시아... 팍스...정말로 이 다양성의 의도는 대체 뭘까요? 마이너리티를 지원한다고 하지만 마이너리티의 마이너리티는 그냥 큰 마이너리티 그룹에 묻혀버리는 상황. 대체 무슨 다양성을 지향한다는 걸까요? 게다가 한국시장은 우리회사 매출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곳입니다. 한국에서 돈 벌어서 월급받아가면서 생각할 수록 그냥 화가 납니다.


2.

조슈아 쿠퍼 라모의 기사는 한국에서 이슈화가 되었지만 NBC에서 짤린 이후 이틀이 지나자 외신에도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저 아래 방송을 직접 본 분이 그렇게 모욕적인 발언은 아니었다고 전하셨지만 그 이전에 아무리 호의적인 발언을 했다고 해도 좀 뜬금없었다는 건 사실이예요. 해방이후 상황이라면 사실 일본이 우리나라에 많은 산업 기술(자동차, 전자제품)을 전수했고 그걸 바탕으로 발전한 게 맞는데 식민지 상황을 언급하고 바로 이후에 영향을 주었다고 하니 빼도 박도 못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되어 버렸으니까요. 뭐하는 사람인지 좀 찾아보니 경력이 화려하시더군요. 헨리 키신저와 사업을 같이하고 베이징에서 교수생활...NBC에서는 아시아 전문가라고 영입했다고 하는데 이정도 발언이면 의도적으로 했다는 생각밖에 안드네요. 그런데 그 중에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이 '베이징 컨센서스'. 아시아 민주주의의 또다른 버전이죠. 아시아의 가치는 서구와 달라서 모두가 평등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오히려 일인 독재의 권위적 통치가 더 잘 먹히며 그런 것을 사람들도 원한다는 얘기. 그리고 중국의 눈부신 경제성장은 그 증거로 계속 주장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이 정말로 서구인들에게 받아들여질까봐 무섭습니다.  천안문 학살에서 사람을 그렇게 죽였는데 이제 정말 다 잊어버린걸까요? 


조슈아 라모 기사의 긍정적인 효과라면 외신들이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한국의 식민지 상황과 일본이 저지른 만행, 특히 위안부 문제를 부연 설명으로 덧붙였다는 겁니다. 어떤 신문은 위안부 비디오까지 포스팅했더라고요. 오히려 한국의 입장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많이 홍보한 결과가 되어 일본, 의문의 1패인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3.

1번에서 얘기한 회사 사람들에게 한국의 설을 소개할 때였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모두 가족이 모여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데에 공통점이 있더군요. 저는 한국의 설을 소개하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제삿상 차리기에 명절증후군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제 슬라이드에서 차례 부분은 아예 빼버렸습니다. 실제로는 그게 한국 명절에서 가장 큰 부분이지만요. 한국은 이러다가 설이 그냥 없어지지 않을까? 즐거운 전통은 보존하지 못하고 며느리 생골탕먹이는데만 골몰한다면 다들 설명절을 싫어하게 될테니까요. 게다가 음식도 가족이 함께 먹을 음식을 장만하는 게 아니라 제삿상에 올릴 음식을 만드느라 허리가 부러질 지경이고. 이런 상황인데도 미디어는 명절만 되면 제삿상 바르게 차리는 법이라며 근거도 없다는 조율이시 홍동백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발 그런 기사좀 안 썼으면 좋겠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5237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796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2293
123311 '큐어' 짧은 잡담 [11] thoma 2023.05.29 429
123310 외로우니까 좋네요 [6] catgotmy 2023.05.29 411
123309 누구일까요? [5] 왜냐하면 2023.05.29 208
123308 뻔뻔한 유베/레비/컨퍼런스 리그 [2] daviddain 2023.05.29 135
123307 프레임드 #444 [4] Lunagazer 2023.05.29 83
123306 가장 기억에 남는 죽음씬은 무엇인가요? [12] 말러 2023.05.29 528
123305 인어공주 박스오피스 [4] theforce 2023.05.29 554
123304 인어공주... [5] 메피스토 2023.05.29 730
123303 [웨이브바낭] '연기'를 하는 장 클로드 반담이 궁금하십니까. 'JCVD' 잡담 [3] 로이배티 2023.05.29 279
123302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견종 [1] catgotmy 2023.05.28 211
123301 네덜란드 어 배우고 싶을 때+<포스맨> 잡담 [6] daviddain 2023.05.28 255
123300 프레임드 #443 [4] Lunagazer 2023.05.28 98
123299 [바낭] 후... 나는 나 자신을 넘어섰다... 극장에서 졸지 않고 본 영화 [4] 스누피커피 2023.05.28 419
123298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때려치면서 [2] catgotmy 2023.05.28 243
123297 도르트문트는 너무 멍청해 우승 못 한다는 정치인 말이 진실일까요 [1] daviddain 2023.05.27 180
123296 [영화바낭] 몇 번째인지 모를 'E.T.' 재감상 아주 짧은 잡담 [20] 로이배티 2023.05.27 491
123295 프레임드 #442 [4] Lunagazer 2023.05.27 92
123294 하라 료 작가가 돌아가셨군요. [8] thoma 2023.05.27 451
123293 '자칼의 날' [12] thoma 2023.05.27 353
123292 [웨이브바낭] '리-애니메이터' 제작진의 공포 동화, '분노의 인형들'을 봤어요 [8] 로이배티 2023.05.27 350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