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06 01:36
게임을 소재로 쓴 작품들을 볼 때면 항상 묻게 되는 질문 하나가 있습니다.
"저거 진짜로 재미있을까?"
특히나 '전 인류가 열광하는!' 급의, 제작자는 신!으로 추앙받는 그런 급이라면 더 더 생각을 한 번 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 '오아시스'라는 게임(이라기보다는 가상세계)은 그럴만한 매력이 없어요. 지금까지 만들어진 VR은 좀 비싸고 갖고 놀다가 금방 질릴 장난감인데, 지금 시대의 기술에서 그다지 발전하지 않은 수준이라면 '오아시스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말은 완전 뻥이거든요. 실제 몸을 잘 움직여야 제대로 플레이가 되는 것이 대부분인 것처럼 묘사되어 있던데, 조이스틱-패드-키보드-마우스로 게임을 하는 편이 더 능한 사람들에게는 영 후져보이는 입력기잖아요. 뭐 미래에서는 키보드니 마우스니 하는 구닥다리는 다 가져다버린 모양이긴 하지만... 그럼 플레이어들은 죄다 몸짱 정도는 되어야 한단 말인가요. 아무튼 이렇게 불평으로 감상글을 시작하는 이유는, 영화가 맨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어요. 컨테이너 빈민굴의 전경과 그곳을 (FEZ같은 게임을 연상케하는 풍경과 그에 어울리는 몸놀림으로) 내려오는 주인공과 그 주인공 중심으로 각종 게임을 즐기고 있는 '게임폐인들'의 모습을 비추는 그 연출부터. '게임'과 '게임폐인'에 대한 감독의 시각이 바로 반영된 것 같은 오프닝이었습니다.
이 영화 관련된 어떤 글에 저는 <픽셀>보다만 나으면 된다고 댓글을 달았어요. 그리고 결과적으로 볼 때 이 영화는 당연히 훨씬 나은 작품이었습니다. 다행이에요. 초반에 마음에 들지 않았던 감정은 어느새 화려하고 정교하고 아름다운 화면과 액션에 누그러졌습니다. 등장인물들도 그럭저럭 마음에 들었고요. 5년 동안 풀지 못했다던 트릭이 그런 것이었다는 건... 뭐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레이싱 게임을 - 온라인으로 - 조금만 해본 사람이라면 역주행의 마력을 잘 알텐데... 그리고 그 바닥에 얼마나 '미친'작자들이 많은데요! 뭐 아무튼 그럴 수도 있죠. 그 이후의 퀴즈들은 재미있었어요. <샤이닝>부분도 영화관 문을 열 때 그 호텔이 나오는 장면 멋있고 좋았어요. 다 좋다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아무튼. 어쨌든 이야기는 잘 풀려나가다가 클라이맥스에 이르러서 막 그냥 나가요. 처음에는 '오아시스'의 경쟁 게임 업체 되는 줄 알았던 거대 기업 IOI인지 뭔지가 사실은 게임 내 작업장을 운영하고 있는 마피아 같은 놈들인지 '아이템베이'같은 놈들인지 아니면 둘을 합친 뭔가인지 도통 모르겠지만 (엔딩에서야 게임 만드는 놈들도 아니고 무슨 기생충 같은 놈들이었구나, 하고 감을 잡았지만 놈들의 정체는 좀 애매하네요. 사실 관심도 없지만) 아무튼 걔들 일처리 하는 꼴이 온라인에서건 오프라인에서건 갈수록 한심해지고 결국 그냥 바나나껍질 밟고 자빠지는 것보다 안 웃긴 짓으로 자멸하는 것...까지도 웃으며 넘어갈 수 있었어요. 그런데 마지막의 마지막에서 '화 목은 셧다운'이라니요? 지금까지 즐겁게 웃으며 보던 기분이 확 곤두박질치더군요. 원작소설을 다 읽지 않았지만 결코 이런 엔딩이 있을 수는 없었을 거예요. 소설은 대체로 영화(이렇게 원작을 각색한)보다는 stand-alone해야 하는 매체고, 영화에서 보인 이런저런 엉성한 구멍은 소설에서는 적어도 그걸 읽으면서 큰 의구심을 바로바로 제기해낼 정도로 크게 뚫려 있지 않아 보여야, 팔리는 소설이 되게 마련이니까요. 이건 안타깝지만, 게임(특히나 온라인과 접목된)이라는 매체를 스필버그가 이렇게 보고 있구나, 라는 걸 재확인 시켜주는 엔딩이었습니다 제게는. 뭐, 그 연세에 이 정도면 그래도 대단한 감각이긴 하잖아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같은 거나 끄적거린 누구와는 확실히 다르죠만.
그래도 아쉽고 실망스런 처음과 끝이었습니다. 건담이 아이언자이언트가 트레이서가 뭐 기타등등의 캐릭터들이 실체화되어... 음 영화 자체가 비교할 수조차 없이 후졌지만 <픽셀>에서도 그런 거 눈요기는 이미 했어요. 게임의 세계에서 게임 캐릭터가 날뛰는 스토리는 가장 최근의 <주먹왕 랄프> 정도면 이미 충분했고. 결국 80년대부터 쌓여온 온갖 서브 컬쳐들의 오마쥬에 의의가 있는 영화...였나요? 휙휙 지나가는 수많은 캐릭터들 중 제가 알지만 모르는 것들이 그렇게나 많았지만 소설에서 한 줄 읽는 것에 비하면 아무 감흥도 없을 0.1초간 화면 한 귀퉁이에서 반짝하고 말 그런 깨알 같은 것들 모두가 그저 나왔다는 것에 감탄할 시간은 없었어요. 그걸 감상하고 나누기에는 소설이 훨씬 적당하죠.
아무튼 유쾌하고 잘 만든 영화였습니다. <더 포스트>에서 신문 한 부 발행하는 걸 그렇게나 웅장하게 표현한 스필버그 답게, 한 세계의 퀄리티를 잘 만들어낸 거대한 작품이었어요. 그렇지만 아쉽네요.
뭐... 어쨌든 추천할만한 영화입니다. 요즘 같이 볼 게 많은 와중에도 말이죠.
그나저나 요즘은 '우주먹튀' 소리나 듣게 되어버린 전설적인 게임 개발자가 말했던 '궁극의 도피 게임'은 언제나 만들어질 수 있을까요? <노인의 전쟁> 시리즈에 나오는 '뇌도우미' 정도가 일상화되면 가능할까요, 아니면 '매트릭스'쪽이 빠를까요? :)
2018.04.06 01:57
2018.04.06 02:10
비주얼은 리얼하죠. VR을 갖고 노는 건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죠.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얘기가 아니고, 영화 극초반 일련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연출가의 시선, '온라인 게임폐인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각' 이야기입니다 게임폐인의 현실이 어떤 모습인지는 영화 내에서도 다른 방식으로 많이 나오죠. 물론 제 자신도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이라는 건 뭐 주지의 사실 아니겠습니까.
2018.04.06 03:08
'오아시스' 라는 게임이 정말 재미있을까 라는 말씀을 들으니 이 영화와 원작 소설간의 애매한 시간차가 생각나네요. 소설이 2011년에 나왔으면 실제로는 2010년도 이거나 그 전에 썼을 텐데, 그 당시면 VR 에 대한 기대가 어마어마할 때였죠. (정작 실체는 없지만) 근데 영화는 사람들이 VR에 어느정도 익숙해진 2018년에 나왔고요. 이미 해외 테크 리뷰어들 사이에서는 VR hype 이 꺼진지 오래로 기대했던 것보다 별로라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는 참에, 그 사이에서 이상한 균형을 잡고 있는 이 영화가 좀 재밌더군요. 가상세계는 소설의 열광을 그대로 가져온 것처럼 굉장히 seamless 한대, 현실에서 헤드셋을 끼고 있는 모습들은 마치 지금 VR체험장에서 사람들이 하는 웃기는 포즈처럼 현실적이고요. 뭔가 묘하게 핀트가 엇나간 영화 같아요.
2018.04.06 03:39
제 생각에 SF작가가 점점 힘들어지는 건 어떤 멋진 소재를 잡아놓고 작품을 써냈을 때, 그 소재가 되는 기술이 너무 빨리 구현되거나 너무 빨리 한계를 드러내버리는 현실 때문인 것 같아요. 근미래에 일어날 멋진 일을 써내기에는 좀 막나가는 뻥을 당당하게 칠 배포(?)가 더 더 필요해져 버렸죠. 쥴 베른은 잠수함 이야기를 쓰면서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별로 없었을 테고, 허황된 면도 있는 그 작품 역시 지금와서 까이지는 않잖아요. 고전 SF에 비하면 (특히) 사이버펑크는 카테고리 자체의 존속이 막 위협받는 느낌적 느낌까지 있고......
아무튼 댓글에 공감합니다. '뭔가 묘하게 핀트가 엇나간', 과연 그렇게도 생각되네요.
2018.04.07 03:34
동감합니다. 제가 좀 달라진 것도 있지만 말씀하신 거처럼 현실이 고삐풀린 채 막달리는 이 상황이 점점 SF 를 안 읽게 되는 큰 이유 중 하나인거 같아요. 근미래를 짧게 치고 나가는 블랙미러 같은 시리즈가 지금이야 괜찮아 보이지만 몇 년뒤에는 또 어떻게 보일지 모르죠.
2018.04.08 10:12
2018.04.08 15:05
영화 후반, 길에서 VR착용한 채 달리는 군중들 장면이 참 좀 그랬죠. 아무튼 지금 형태의 VR기기로는 멀었어요. 더 가볍고 더 편리해야......
ㅎㅎ 트론 같이 미래적으로 휘황찬란한건 너무 거짓말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