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사람들의 불행

2019.01.22 21:04

흙파먹어요 조회 수:1501

때는 결전의 수학능력검정고사의 날


1교시 언어영역이 끝난 후 저는 외쳤습니다. 엄마, 나 의대가나 봐!

그리고 2교시 수리영역이 끝난 후 저는 다시 외쳤습니다. 엄마, 나 재수하나 봐!


그저 막연히 공대를 나오면 취직이 수월하지 않을까 싶어 선택했던 이과

그러나 저는 몰랐던 것입니다. 저라는 놈은 두 개의 OS로 돌아가는 인간이라는 것을.

하나의 OS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다른 하나의 OS는 분명 윈도우즈이고

불행하게도 수학이라는 프로그램이 인스톨 된 곳이 바로 윈도우즈였다는 것을.


제가 수학 문제를 받아들면 흔히, 가령, 이러한...



... 현상이 나타나곤 했던 겁니다. 게이츠 이 자식...


그래도 어떻게 꾸역꾸역 대학에는 진학을 하였는데,

군대에서 서울대 다니다 온 동기놈이 재수를 준비하던 고참의 문제집을 보고

무려 3차 방정식을 암산으로 풀이하는, 전성기 동춘 서커스에 버금가는 대환장 쑈를 목격하곤

전역과 함께 미련 없이 전공을 바꾸게 됩니다. 


그 두 번의 선택이 제 인생을 참 많이도 바꿔 놓았는데요.

그 선택들은 어쩌면 제가 이렇다 할 특출난 재능이 없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만약, 글 쓰기, 그림 그리기, 악기 연주 등과 같이 어느 한 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어려서부터 보였더라면

그렇게 미련 없이 쥐었던 줄을 패대기치고 다른 줄을 닁큼 잡지 못 했을 거에요.


요즘 손열음이라는 처자에게 빠져, 나이는 어리지만 멋지니까 너님은 나의 누나~를 외치고 사는데요

클래식이라곤 아마데우스에 나온 모차르트의 냐하하하 웃음소리밖에 모르던 놈이라

손열음이 뭐가 뭐가 대단하다고는 하는데 뭔 소린지 잘 모르겠고,

유튜브로 이 사람, 저 사람이 치는 것 듣다가 백건우 아재나 손열음 누님의 피아노를 듣노라면

아, 뭔가 확실히 다르긴 다르구나를 느끼는 겁니다. 장금이의 홍시랄까?


그러다 문득, 아무리 양산형 제품인 나 같은 놈일지라도

남보다 뭐 하나쯤 특출난 구석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봤는데요.

묘하게도 현재의 제가 아닌, 과거의 제가 더듬어지고, 자꾸 후회로 귀결 되려 해 덜컥 겁이나는 겁니다.

맞아, 나 그때 그거 참 잘 했어. 그때 돈 생각 하지 말고 그거 그냥 더 해볼걸... 뭐 그런?


옛날에 나름 유명한 여자와 연애를 했었는데

흔히 말 하는 셀럽들과 일을 하고, 어울려 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와 생각해 보니 그녀에게 주었던 감정은 사랑이었고, 끝내 감췄던 감정은 질투였어요

사랑을 나눠 준 자리에 쌓여만 간 것은 질투뿐이라, 지금도 손열음처럼 재능이 빛나는 사람을 보면

잘 한다! 하는 순수한 감탄보다는, 좋겠다... 하는 불손한 질투가 앞서는 게 솔직한 마음이고요.

심지어, 저 자리에서 저 연주를 해내기 위해 그녀가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을지 모르는 게 아닌데.


쨌든,


제가 손열음에게 홀딱 반한 연주 하나 투척하고요




이 연주의 압권은 마지막! 왠지, "봤냐?" 라고 말 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저 순간만은 거의 제니스 조플린


그리고 이 노래는 혹시나 이 글을 볼, 저처럼 스스로 평범할 수밖에 없어 다소 불행한 

당신을 위한 저의 사소한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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