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할 수 없는 일들 4

2019.01.23 04:32

어디로갈까 조회 수:1355

어제. 갑작스런 출장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웬만한 돌발 사태엔 무덤덤하게 대처하는 편인데, 제 몫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의혹의 감정을 내비치지 않을 수 없었어요.

- 왜 제가 가야 하죠?
"이 문제를 스마트하게 잘 처리할 수 있는 적임자라 생각했기 때문이오."
- 제가 처리해야 할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에요.
"(미소) 내 판단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뜻이오?"

- 신뢰와 이해는 다른 문제죠. 이런 식으로 급하게 투입되는 걸 이해할 수 없습니다.
" 당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소.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이건 길을 닦는 일이라고... 
현재 당신이 사용하는 길도 지나다니기엔 별 불편함이 없는 폭의 넓이요. 그럼, 그 이상 넓게 길을 닦을 필요는 없는 걸까? 
일미터 폭의 길과 오미터 폭의 길을 갈 때의 차이를 당신도 알거요. 

거기엔 심리적인 편안함의 차이뿐 아니라 실제적인 속도의 차이가 있는 거요. 당신도 잘 알다시피 길의 폭은 보행 속도에 큰 영향을 미쳐요.
이 일을 그런 맥락으로 이해하시오.  당신에게 직접 필요한 일이 아닌 것처럼 보이겠지만, 직접 필요한 일을 할 때 균형을 잡고 추진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일이오. 내 장담하지. 이건 앞으로 있을 당신 업무에 길을 넓히는 작업이오."

상대를 설득시키는 것도 길을 내는 일일 테죠. 이유를 묻고 사리를 따지는 동안, 상사는 제 앞에 아득한 철길 하나를 펼쳐놓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제가 그 철길 위를 달려야만 하는 기차라는 사실을 제대로 각성시켜줬어요. 그리하여 내일, 저는 스키폴 공항에 무거운 마음으로 도착할 예정입니다.

다른 분들도 그런지 모르겠는데, 저는 출장 기간 동안의 감각이 한결같이 안 좋아요. 뭐랄까, 살아 있는 건 알겠는데 살아 있다는 실감이 들지 않는 시간들이랄까요. '나'라는 기능이 '나'를 소외시킨 채 오로지 '그들'을 위해, '그들'에 의해 탕진되는 듯한 느낌. (이라고 하면 말장난처럼 들리겠지만 아무튼 그렇습니다.)

사실 암스테르담은 제가 서유럽에서 좋아하고 익숙한 도시 중 하나예요. 대안문화의 도시라고 불리며 한시절 유럽에서 가장 독특한 분위기를 자랑했으나 이젠 평범한 도시로 전락(?)해버린 감이 있지만요.
그래도 여전히 암스테르담은 유럽에서 드물게 모던한 도시입니다. 일들이 합리적으로 처리되고, 시민들은 신뢰할 만하고, 어떤 도전이든 가능하다는 의미에서 놀랄 만큼 진보적인 톨레랑스가 있어요. 접할수록 그들에겐 심리적인 마지노선이 없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과장되게 들릴 표현이겠지만 인간이 인간에게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철학적 테제로서의 근대화가 이루어진 도시라 생각해요.
섹스 박물관, 홍등가, 커피숍에서 쉽게 살수 있는 마리화나 등으로 퇴폐적인 분위기를 연상하기 쉬운데, 사실 이런 것들은 네덜란드인이 아니라 이방인들이 향유하고 있는 문화라고 할 수 있어요. 이 독특한 관용의 문화를 네덜란드 인들은 '게젤라이하이드'(아늑함)이라고 표현하더군요.

어느 글에선가 '수긍되고, 인정받고, 이해되고, 부정되지 않는 건 '나'의 정당성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관대함이라는 조건 하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내비친 적이 있는데 암스테르담에서 그걸 가장 강하게 느끼곤 합니다. 관대함이란 겸손이며 인간에 대한 가없는 신뢰에서만 가능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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