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넷 - 감독으로서의 야망

2020.09.06 18:48

Sonny 조회 수:1056

저는 이 영화를 지금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영화에 대해 뭘 쓸 수는 없습니다. 다만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감독에 대해서는 좀 말 할 수 있을 것 같아요.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제일 훌륭한 감독인가? 이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고 많은 경우 "아니오"로 통합니다. 그러나 이렇게는 말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현재 헐리웃에서 가장 야심이 커다란 감독입니다. 단지 상업적 성공이나 작가주의 영화인으로서의 명예욕 같은 게 아닙니다. 잘 만든 영화가 아니라, 세계를 아예 바꿀 영화를 찍고 싶어합니다. 


<테넷>의 전작부터 이야기해야겠습니다. 저는 아직까지 크리스토퍼 놀란의 최고작이 <덩케르크>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그의 야심을 가장 정확히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덩케르크>는 전쟁이랑은 큰 상관이 없습니다. 공간이 어떻게 인간을 뒤흔드는가. 이것에 대한 놀란의 영화적 실험이죠. 물론 이 영화에는 서로 다른 세 개의 시간축이 등장하지만 저는 이 부분을 부끄럽게도 영화에 너무 몰입해서 제대로 느끼지를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덩케르크>에서 공간이 완전히 인간을 외면하고 무심하게 대할 때의 그 경악을 감당하기에도 벅찼으니까요. 


이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이름없는 주인공이 삐라를 받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눈이 내리는 것처럼 환상적으로 삐리들이 떨어지는데, 이 때 삐라의 내용은 너희는 완전히 포위당했다는 독일측의 내용이죠. 이것은 이 영화를 시작하는 놀란의 선포장입니다. 인간은 수직적인 운동에 대해서는 굉장히 무기력합니다. 인간은 사실 두 발을 땅에 붙이고 2차원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3차원적으로 움직이는 시간은 지극히 한정적입니다. 위와 아래를 향하는 움직임에서도 계단이나 엘리베이터 같은 2차원적 사물의 도움을 받아야합니다) 여러 물체의 동시다발적인 낙하운동이 벌어질 때 인간은 2차원적인 움직임의 가능성을 거의 차단당합니다. 그 삐라처럼, 놀란은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이 사방팔방 어디로도 숨을 데가 없다는 걸 조용히 경고합니다. 그리고 그 주인공 일행은 어느 시가를 지나가다가 총격에 위협당하고 아군의 진지로 열심히 도피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장면이지만,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수평적 운동을 통한 자기보호는 이 장면으로 끝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현실적 상상력에 기반한 안전의 개념은 이 이후로는 국물도 없을 줄 알라는 놀란의 "신사적인" 안내문입니다. 그 적군의 사격조차도 수평적인 운동이니 인간이 애를 쓰면 다른 방향의 수평 혹은 그 수평을 방해하는 수직적 건축물로 자기를 지킬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그런 건 이제 나오지 않습니다. 덩케르크 해변은 완전한 허허벌판입니다. 그리고 공격은 하늘에서 떨어집니다. 자기를 둘러싼 공간에서 수직적 건축물을 통한 안전의 개념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공간입니다. 이후 해변에서 처음으로 공습이 시작됩니다. 인물들은 도미노처럼 일제히 쓰러집니다. 숨을 데가 없으면 수직적으로 서있는 인간이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우르르 무너져버립니다. 


<덩케르크>는 인간이 영화를 통해서 공간을 어디까지 지배할 수 있느냐, 달리 말하면 인간적인 무엇이 영화적 공간 안에서 어디까지 0에 가까워질 수 있는가 하는 실험입니다. 그러니까 <덩케르크>에서 처음으로 구출하러 온 배가 무너져버릴 때, 저는 놀란에게 정말 경악했습니다. 그 거대한 배가 옆으로 무너질 때, 이것은 아주 거대한 뭔가가 쓰러지는 단지 규모의 문제가 아닙니다. 완벽하게 무력한 인간이 처음으로 수직의 힘을 받은 건축물 안에서 보호를 받고 자기의 세계를 되찾았는데, 그 세계를 어떤 동정심도 없이 무너트려버리기 때문입니다. 좀 웃기는 이야기인데 저는 이 장면에서 "어떻게 감히 저런..." 같은, 무엄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은 공간적 지배는 <덩케르크>의 다른 시간축들에서 계속 나타납니다. 배를 타고 병사들을 구조하러가는 일행이 발견한 킬리언 머피는 침몰한 배 꼭대기에 쭈그려 앉아있습니다. 아무 구조물도 없는 바다 한 가운데에서 인간이 완전히 고립되어있습니다. 전투기를 모는 톰 하디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무한에 가깝게 펼쳐진 공간에서 어디로도 갈 데가 없는 인간들이 외부의 에너지에 완전히 노출됩니다. 옷을 벗겨놓은 맨몸 상태의 인간을 거리 한복판에 세워두듯이, 안전에 대한 감각을 0으로 떨쳐놓고 공간을 육해공으로 나눠서 계속 인간을 찔러보듯 청각과 시각으로 위협을 가해봅니다. 세계 정복같은 유치한 지배욕이 아니라 그냥 법칙 자체, 공간이라는 인간의 감각 하나를 완전히 앗아가버린 것입니다.


<덩케르크>이야기를 왜 이렇게 길게 하냐면 놀란이 공간의 장악을 실험해봤으니 그걸 시간에 본격적으로 적용해보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놀란은 <덩케르크>에서 인간이 완전히 무력해질만큼 공간의 지배력을 100에 가깝게 실험했습니다. 이제 그 지배력을 본격적으로 시간을 대상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영화들과 비교해보면 좀 실감이 될 것 같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을 카피한 마블 영화가 있는데, 그게 바로 <닥터 스트레인지>입니다. 이 영화는 대놓고 크리스토퍼 놀란의 공간과 시간의 지배를 마블식으로 구현하려고 애를 썼지만 그건 결국 애들 장난입니다. 공간을 아무리 휘고 돌려도 그건 세계에 대한 지배가 아니라 그걸 휘두르는 인간, 아주 특수한 어떤 히어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를테면 특수효과로 아무리 건물 빌딩을 휘고 시간을 반복시킨다고 해도 그건 그냥 마술 같은 거지 개념에 대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아주 화려한 화면 자체가 우리가 원래 있는 리얼리티에 대한 의문으로 번지진 않습니다. 그런데 놀란은 진짜로, 현실 세계를 기반한 가장 기초적인 질서를 영화로 다시 세우려 합니다. 주인공이 이름이 없는 주인공인 것도 <덩케르크>와 비슷한 의미일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건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떤 법칙이 완전히 새로 세워진 초현실 자체에 대한 이야기니까요. 


<인셉션>에서 놀란은 시간의 확장을 실험했습니다. 꿈이라는 공간에 가면 인간의 시계는 대략 열두배(?) 정도 느려집니다. 이렇게 현실의 1초가 계속 늘어나면서 림보라는 밑바닥 꿈에서는 무한하게 늘어납니다. 이것은 시간의 규모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원래 있는 상태로 아주 거대한 시간을 견디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한 실험이었죠. <인터스텔라>는 시간축을 거슬러가보려고 시도합니다. <인셉션>에서 시간의 규모는 커졌지만 그 방향에는 감히 거스르지 못했습니다. <인터스텔라>는 시간의 방향성에서 잠깐 탈출합니다. 미래와 과거가 접촉한다는 그 한 점을 영화적으로 실현하죠. 감동의 부녀상봉도 결국은 과거와 미래의 만남이라는 과학적 희열을 가족드라마로 표현한 것에 더 가깝습니다. 놀란은 시간의 흐름에 침투하는데까지 성공했습니다. 이제 <테넷>에서는, 그 시간의 흐름에 아예 끼어들어 역행을 시도합니다. 한 점을 건드리고 그걸로 커다란 발견을 얻는데 만족하지 못하고 기어이 그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가봅니다. 이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놀란은 "현실적으로" 실현해내려고 합니다. 이게 정말 가능한 것처럼, 아직 우리가 모를뿐이지 현실의 어떤 법칙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리얼리티에 대한 놀란의 집착은 단순한 표현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영화가 뻥튀기 픽션으로 두시간 보고 끝나는 눈속임이 아니라, 이게 어떻게 가능한건지 전율하고 이해불가의 신비로 느끼도록 영화를 만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놀란은 진심으로 자기 영화를 믿게 만들 작정입니다. 뤼미에르 형제가 기차를 튀어나오게 했던 것처럼 사람들이 자기 영화를 보고 한치의 의심도 없는 시간의 일방적 방향을 의심해보길 요구합니다. 그래서 그는 그걸 특수효과를 쓰지 않고 찍으려고 합니다. 영화가 영화로 끝나지 않고 현실과 섞여들어가길 바랍니다.


이것은 거꾸로 놀란의 영화적 야심이기도 합니다. 그는 영화로 구현가능한 초현실적인 것들을 화면에 담으려 합니다. <테넷>의 인버젼은 영화 바깥에서 보면 그냥 영상을 거꾸로 돌린 것에 불과합니다. 그는 현실의 시간역행을 영화의 되감기 기능으로 표현하려고 합니다. 이 때 영화는 픽셔널한 표현장치가 아니라, 그 자체가 상상이 현실로 이루어진 세계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간역행이란 영화의 되감기 같은 것이다, 라는 문장이 아니라 영화의 되감기는 사실 시간역행이다, 라고 말하고 싶어합니다. 영화는 그냥 수단이 아닙니다. 인간의 비전이 이미 시청각적으로 완성된 세계입니다. 놀란은 영화에서 자신만의 개념이 완성된 세계를 창조해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스필버그의 <죠스>가 바다를 완전히 공포의 공간으로 바꾸어놓았듯이 자신의 영화를 통해서도 사람들의 개념을 아예 뒤바꿔놓길 바랍니다. ,테넷>의 비행기 충돌은 그런 이야기처럼도 들립니다. 이것도 굉장한 짓이긴 한데, 이런 대규모의 사건조차도 개념의 역전을 완성시키는 그냥 수단일 뿐이라고.


크리스토퍼 놀란은 007 광팬이라고들 하죠. 만약 007에 새로운 악당이 나온다면, 그 악당은 영화적 야심에 사로잡혀 세계 3차 대전을 일으킨다거나 한 국가를 붕괴시키는 짓을 하는 악당이 나와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에게서 자본의 한계와 양심의 통제를 빼버리면 그런 악당이 나올 것입니다. 나는 영화를 너무 좋아하니까 이 세상이 진짜 영화같아졌으면 좋겠어! 하고 영화같은 대규모 재난을 일으키는 악당 말입니다. 저는 놀란의 영화를 볼 때마다 이 사람은 어느 정도까지 영화를 현실에 밀어붙일 것인지 감이 오지 않습니다. <테넷>은 감독으로서의 그의 야심을 더 지독하게 밀어붙인 결과입니다. 이 영화가 성공적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이 야심을 이해하는 게 첫번째 숙제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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