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올해 초에 작성하다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중단되었었는데요. 다행스럽게도 <행복한 라짜로>가 관객수 1만 명을 돌파했고 며칠 전 영화에서 탄크레디역으로 출연한 루카 치코바니가 내한을 했었죠. 이 영화를 강력히 추천하고자 글을 완성해서 올립니다. 다른 곳에 먼저 올려서 말투가 이런 것이니 양해 부탁드려요. <행복한 라짜로>는 CGV 압구정, 메가박스 코엑스, 필름포럼, 홍대 상상마당, 아트하우스 모모, 더숲 아트시네마, 에무시네마, 부산 영화의 전당, 광주극장 등에서 상영 중이에요. 관심 있으신 분들은 꼭 보러 가시기를요. ^^)
 
새해 벽두에 본 새해 첫 관람작이 나에게 엄청난 영화였기 때문에 소개하고자 한다. 작년에 칸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한 알리체 로르와커의 <행복한 라짜로>이다. 영화와 신학 혹은 영화와 초월성의 문제에 관해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아직 새해 초이지만 연말 베스트 10편에 이 영화를 무조건 올릴 수밖에 없다. 이 영화는 아무나 편하게 봐도 좋은 훌륭한 작품이지만 특히 영화 현장과 영화학계에 있거나 영화를 좋아하는 크리스천들이 더 봤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행복한 라짜로>는 내가 지금까지 본 기독교와 관련된 영화들 중 최고작 중의 한 편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영화를 기독교적인 관점에서만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 영화에 탄복한 것이 기독교와 관련된 부분이기에 이러한 측면을 강조하는 것뿐이다. 

<행복한 라짜로>는 기본적으로 성경적인 알레고리가 결합된 종교적인 우화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라짜로는 예수의 속성을 가진 인물이다.(이름에서 짐작이 되듯이 '라짜로'는 예수가 부활시킨 나사로와 연관된 인물로 보이기도 한다.) 영화 속에서 나무 밑에 앉아있던 라짜로가 갑자기 한 줄기 눈물을 흘리면서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장면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면서 고뇌한 끝에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십자가 사역을 감당하기로 결심하는 예수를 연상시킨다. 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 중에 예수의 형상을 한 인물이 등장하는 작품이 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행복한 라짜로>는 동시대의 영화 미학 안에서 신성의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성취가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영화들과 차별화된다. 이 영화는 이를테면 데이빗 린치의 <로스트 하이웨이>, <멀홀랜드 드라이브>나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열대병>과 같은 작품의 이원적 구조를 빌려와 종교적인 테마와 결합시킨 것 같은 측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이원적 구조가 성립하기 위해서 이 영화에서는 시간성의 문제가 결부된다. 이 영화의 이원적 구조는 신이 시간을 초월해있는 존재라는 전제 하에서만 성립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라짜로는 성경에서 예수가 섬기려고 이 땅에 왔다고 했던 것처럼 섬기는 존재로 설정되어 있으며 동물과 교감하고 소리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는 한 편으로는 너무나 평범해서 존재감을 느끼기조차 힘든 선한 청년으로 보이기도 한다. 라짜로가 그가 속한 가난한 무리들이 성당에서 쫓겨난 뒤에 성당으로부터 음악을 이동시켜 가난한 자들에게 음악을 들려주는 장면은 매우 감동적이다.

이 영화의 감독인 알리체 로르와커는 올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 황금종려상을 안긴 칸영화제 경쟁부문의 심사위원 중의 한 명으로 활약했으며 봉준호 감독이 시상대에 올라왔을 때 눈물을 흘리는 것 같은 제스처를 취해서 국내 영화팬들에게 화제가 된 바 있다. 흥미롭게도 <행복한 라짜로>는 <기생충>과 유사한 측면이 있는 작품이다. 두 작품 다 계급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우화이며 자본주의 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현대인의 초상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일맥상통한다. 물론 <행복한 라짜로>가 1부와 2부로 나눠지는 놀라운 구성을 통해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착취의 구조가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기생충>보다 더 넓은 시기를 다루고 있기는 하다. 

크라이테리언 컬렉션 사이트에 실린 알리체 로르와커 감독의 베스트 영화 명단을 보면 루이스 브뉘엘을 시작으로 이탈리아의 거장들인 로베르토 로셀리니,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에르만노 올미를 거쳐서 장 뤽 고다르, 아녜스 바르다, 존 카사베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감독들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이 명단으로 추측해보건대 로르와커 감독은 상당한 씨네필인 것으로 보인다. <행복한 라짜로>는 이탈리아 영화의 유산들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동시대적 감각으로 세련화하는 데 성공한 영화라고 볼 수 있는데 그런 점에서 이 영화를 이탈리아 영화사에 남는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행복한 라짜로>에서 라짜로는 페데리코 펠리니의 <길>에서의 젤소미나나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영화들에 자주 등장하는 니네토 다볼리가 맡은 백치나 천사 캐릭터의 계보를 잇고 있다. <행복한 라짜로>의 전반부에 등장하는 농민들의 모습은 명백히 에르만노 올미의 네오리얼리즘 영화인 <나막신 나무>를 연상시키며 하층민으로부터 신성함을 이끌어내는 태도나 풍경을 담아내는 방식에서는 파졸리니가 떠오른다. <행복한 라짜로>에서 나오는 탄크레디는 루키노 비스콘티의 <레오파드>에서의 탄크레디로부터 이름을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데 <행복한 라짜로>와 <레오파드> 모두 귀족의 몰락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사라진 전통을 바라보는 두 감독의 시선에서도 유사한 측면이 있다. 

<행복한 라짜로>를 얘기할 때 라짜로역을 맡은 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의 외모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타르디올로의 신비한 아우라는 같은 이탈리아 영화와 비교해볼 때 그 특별함에 있어서 루키노 비스콘티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에 등장하는 조각 미남인 비요른 안드레센에 버금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드리아노의 눈망울이 특히 인상적인데 그의 눈망울은 곧바로 선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로 등장하는 라짜로의 특징과도 연결되어 있어 <행복한 라짜로>의 영화적인 힘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번 보면 결코 잊을 수 없으며 근래 들어서 보기 힘든 존재감을 갖고 있는 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를 보기 위해서라도 이 영화를 볼 필요가 있다. 

<행복한 라짜로>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전통을 기반으로 초현실주의가 결합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는데 무엇보다도 영화 언어를 다루는 알리체 로르와커의 정직한 태도가 인상적이다. '정직한'이라는 말을 '세련된'과 비교해 진부한 표현으로 받아들인다면 오산이다. 로르와커 감독에게는 어떠한 꼼수를 부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야기를 전달해도 관객들을 공감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는 강력한 믿음이 있다. 그러한 믿음이 관객에게 감동을 준다. 이 영화를 1부와 2부로 나눠버리는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날 때조차 로르와커의 카메라는 특수효과를 사용하지 않고 그저 일상의 어떤 순간이 지속되고 있다는 듯이 대상을 포착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면에서 <행복한 라짜로>는 칼 드레이어의 <오데트>와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있는 작품이다. 

서두에서 이미 밝혔지만 다시 한번 이 영화를 크리스천들에게 강력히 추천하는 바이다.(물론 영화 애호가들도 만족할 만한 작품이다.) 내 기준으로 볼 때 <행복한 라짜로>는 기독교적인 걸작임에 틀림없으며 아마 향후 10년간 기독교와 관련된 영화들 중에 이 영화를 능가하는 작품이 나오기는 힘들 것이다. 부디 이 영화를 크리스천들이 많이 보고 이 영화로부터 영화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창의적인 영감을 많이 얻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나도 논리적으로 이유를 설명할 수 없지만 나는 이 영화를 알리는 데 있어서 일종의 사명감마저 느낀다. 한 영화를 추천하는 데 있어서 이런 마음까지 드는 건 <행복한 라짜로>가 처음인 듯싶다. <행복한 라짜로>와 함께 모두 행복하기를. 
(긴 글을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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