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06 12:48
1.뭐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부모가 자식을 올바르게 대하는 방법은 사랑이 아니라 책임감으로 자식을 대하는 거라고요. 왜냐면 사랑이란 건 자의식일 뿐이잖아요. 본인의 사랑을 멋대로 상대에게 강제해봐야 그건 서로가 짜증날 뿐이예요. 부모라면 상대의 행복을 정말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올바른 케어를 해주는 '책임감'으로 자식을 대해야죠. 똑똑한편인 내 친구의 육아 철학도 그것과 같아요.
'요즘 세상엔 교육 따윈 필요가 없어. 우리가 자식에게 주어야 할 올바른 건 교육이 아니라 자산뿐인걸세.'
라고 말하는 친구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어요.
2.무라카미 하루키 부부는 '태어날 자식을 위해 자식을 낳지 않는다.'라고 말하죠. 뭐 이건 일단은 맞는 말이긴 해요. 전에 썼듯 아무리 좋은 인생도 태어나지 않는 것보다는 못하니까요. 한데 문제는, 저딴식으로 말해버리면 이 세상에 자식을 낳을 자격이 있는 부모따위는 없는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어떤 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났는데 무라카미하루키 부부보다 더 나은 부모를 만날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물려줄 자산의 규모만이 아니라 자의식을 자식에게 강요하지 않고 자식에게 가능한 한 행복한 인생을 줄 것 같다...는 점까지 종합적으로 따져보면, 이 세상에 아마 무라카미 하루키 부부보다 나은 부모따윈 거의 없을거예요. 무라카미는 저런 고매한 말 뒤에 숨어서 그냥 귀찮은 걸 안하는 녀석으로 볼 수도 있는 거죠. 뭐, 얘기가 샜군요.
3.그러나...위에 썼잖아요.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어요.'라는 건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졌다는 거죠. 나는 쓸데없는 사랑이 싫지만, 너무 많은 책임감도 싫거든요. 물론 책임감은 부모로서 당연히 가져야 하는 거지만...인간이 늘 그렇게 계산적일 수는 없으니까요. 요전에 친구가 내게 말했어요.
'나도 부모님에게 말하곤 한다네. 그냥 있는 돈을 펑펑 다 쓰시라고 말야. 내게 물려줄 거는 신경쓰지 않으셨으면 좋겠다네.'라고요. 나도 동감이었어요. 하지만...그런 일은 없을 거란 것도 알죠. 그래서 말해 봤어요.
'하지만 부모들은 늘 그래. 우리에게 뭐 하나라도 더 해 주려는 생각밖에 없지. 그건 고마운 일이지만 요즘은 생각이 달라졌어. 그럴 필요가 없거든.'
그래요. 책임감은 당연한 거지만 책임감이 과하면 그것 또한 사랑이거든요. 사랑...도저히 되같아줄 길 없는 사랑은 부담스러운 거예요. 고마운 마음보다는 족쇄같은 느껴지는 마음 때문에 답답하죠. 이 보잘것없는 짧은 인생에서 누군가가 나를 위해 헌신하는 것도 매우 신경쓰이는 일이니까요.
4.휴.
5.그래서 요즘은 어머니에게 말하곤 해요. 어머니가 가진 돈을 모조리 펑펑 쓰는 게 좋다고요. 그러면 어머니는 어떻게 그러겠냐고 말하시고...나는 또한번 일장 연설을 하죠.
'이봐 어머니...요즘은 80살은 기본이고 90살까지 사는 것도 전혀 놀랄 일이 아냐. 그러니까 어머니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앞으로 30년은 더 사실 거란 말이야. 한데 말이지, 30년 후면 나는 환갑이 넘는다고. 그 나이가 되면 이미 내게 영광따위는 없어. 돈도 많이 필요 없고. 그 때가 되어서 돈을 물려받아 봤자 할 것도 없단 말이야. 그러니까...어머니가 돈을 흥청망청 쓰는 걸 보는 게 내 기분이 가장 나아지는 길이야. 그러니까 있는 돈을 몽땅 다 펑펑 써버리는 게 좋아.'
그러면 어머니는 네가 뭘 모른다고, 늙어서야말로 돈이 정말 많이 필요하다고 대답해요. 늙어서 돈이 없으면 정말 비참하다고 말이죠. 그러면 나는 또다시 지겹게 한 얘기를 리바이벌 하는 거죠.
'그렇지가 않아. 나는 다른 사람과 진짜 다르다고. 내겐 친구도 없고, 여행다니는 취미도 없어. 지금 이 시기만 지나면 내겐 정말 돈이 많이 필요하지 않아. 나 같은 사람은 늙으면 돈이 없어서 비참한 게 아니라, 늙었기 때문에 비참해지는 거라고. 나는 늙어버리면 인생의 즐거움이란 것 자체가 없어. 환갑이 넘어버린 내게 돈을 물려 줄 필요가 전혀 없단 말이지.'
다행히도 어머니는 다른 보통 사람들처럼 여행을 좋아해요. 그러니...여행을 실컷 다니시라는 말로 끝맺곤 하죠. 아 물론, 위에 쓴 말들은 사실 모두 존대말이예요. 웬만하면 대사를 적을 땐 거의 그대로 적지만 저건 그냥 느낌을 살리기 위해 반말로 써 봤어요.
6.위에 '다행히도' 라고 썼듯이,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래요. 다른 보통 사람들과 비슷하게 태어난 건 행운이죠. 다른 사람처럼 낮에 모여서 밥먹고, 여행 가고...뭐 그런 것에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거...그게 행운이란 걸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알게 될 거예요.
7.하하, 늘 생각하는 건데 나는 걱정이 너무 많아요. 그것도 너무 긴 사이클 단위로 걱정을 하곤 하죠. 다행히도 아직은 30년 후가 아니라 30년 전이니...물론 여러분들도 나름대로의 미친짓을 하겠지만, 나도 나름대로의 미친짓을 할 수 있는 거예요.
앞으로 그럴 수 있는 시간이 몇십년밖에 안 남았으니 할 수 있는 거라곤 하나밖에 없어요. 나중에 후회를 남기지 않는 거죠. 언젠가 늙어버리면 나는 인생을 즐길 수 없게 되거든요. 그냥 기억을 파먹으며 하루하루를 보내겠죠. 그때 기억을 파먹다가 후회가 남지 않게 미리미리 준비해 둬야 하는 거예요.
나는 분명 그때쯤엔 심술이 많아질 거거든요. 내 나이 또래의 다른 녀석들이 즐겁게 사는 걸 보며 '쳇, 저 녀석들은 나이도 나랑 같으면서 왜 저렇게 행복한 거지?'라고 맨날 투덜댈 거니까요. 나는 그렇게...여행을 가거나 다른 녀석들과 잘 어울릴 자신이 없단 말이죠. 지금이야 그러지 못해도 나름대로 즐길 거리가 있지만 나중엔 글쎄요.
이봐 어머니 그래서 영화 스물에 나오는 김우빈 같구나 했는데 아니군요.
김우빈 건강 되찾길 바랍니다.
사는 방식이나 사람 따라 다르겠지만 돈이야 젊으나 늙으나 있으면 더욱 좋은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