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파스칼!

2019.06.15 17:22

어디로갈까 조회 수:986

서양사람들은 편지 첫머리를 'I'로시작하는 걸 꺼리는 편입니다. 관계에서 '나'를 앞세우는 자세로 간주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래서 '나는 당신의 편지를 잘 받았습니다' 라고 말할 것도 '당신의 편지를 나는 잘 받았습니다, 라고 쓰는 게 낫다고 여기죠. 의례화된 편지 예절인 셈입니다.

편집기를 열고 이 글을 '나의 내면을 건드리지 못하는 말들만 쌓는 날들이다.'라고 시작하려는 순간, 문득 저 편지 예절이 생각났어요. 그러니까 '나의 내면...'이라는 식으로 쓰는 건 매우 편집증적인 자아함몰 증세인 거구나 하는 생각이 스친 거죠. 
아무려나,  듀게에다 나 자신의 내면을 건드리지 못하는 말들을 주절대다 보니, 마음 어딘가에서 진액 같은 부끄러움이 느릿느릿 흘러가는 느낌입니다. 이 글은 어떨까요? 이 글이라고 실낙원처럼 덩굴진 장미의 정원에 가닿지는 못할 게 뻔하죠. - -

몇 시간 전, 시 쓰는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는 너무도 진부한 어구지만 꼭 쓰고 싶다면서 '청춘의 가느다란 손가락' 이란 표현이 어떠냐고 물어왔어요. 그래서 오히려 되물어 봤습니다. 우리 나이면, 이제 진부한 표현을 스스로에게 허용하고 감당할 만큼의 내공이 생기는 때가 아닌 것이냐고.        

가장 강하고 아름다운 것, 가장 인상적인 것들만을 발음하겠다는 결벽은 시에 이롭지 않다고 저는 생각해요. 적어도 그런 시가 제겐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습니다. 아마 그도 그건 알 거예요. 다만 그는 그런 억제의 감각으로 그의 작업을 간신히 미지의 어스름 속에 감싸둘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짐작할 뿐입니다.
           
세상의 소식을 듣노라면 (특히 몸을 못 움직이는 이런 휴일에)  세상을 잊고 사는 것이 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더 이상 내 시선을 요구할 만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 남았는가 싶고,  내 인생은 이미 수십 번이나 완성되었지! 그런 느낌입니다.  
둔주곡의 반복으로 제가 소리없이 발음할 모든 말들은 가닿았든 아니든 이미 명백하게 드러났거든요.  여기에 제가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매일 죽고 다시 태어나죠. 반복, 반복.

(잠시, 베란다에 있는 이름 모를 들풀을 바라봤어요. 아파트 통장님이 키워보라며 보름 전에 주신 건데 매일 보라색 꽃을 얼마나 열심히 피어대는지 몰라요. 참 예쁩니다. )                                             

저런 자연의 모습을 대할 때면, 사소한 일상의 일들이라도 그것의 가치에 합당한 모습으로 정리해 두어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곤 합니다. 마치 마지막 사물을 대하듯 다가가서, 마음에 새기며 다듬어 안고 싶어져요. 그러다가도 지금 날들 속에 일어나고 있는 이 많은 일들이 과연 뭘까, 하는 불투명한 의문에 금방 시무룩해지기도 합니다. 저와 일상이 거리가 먼 두 개의 사물인 것만 같아요. 불투명성이 제게는 가장 피로인 걸까요.

유럽의 신비주의는 <눈 먼 현자>들을 가리키곤 합니다. 그들은 세상의 일을 보편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지 못하므로, 오히려 영혼의 진리를 직시하는 유형의 사람들이에요. 제가 <눈 먼 현자>가 아님은 분명하기에,  어쩌면 불투명한 시계는 세상을 사는 저의 얕은 지혜와 짝을 이루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말해, 명료하게 보는 일은 지금껏 살아왔던 제 삶이 '무엇'과 만나 변화하거나 또는 '무엇'과의 무서운 이별을 거치며 변화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생각. 그런데 그걸 제가 원하는지 실은 그걸 잘 모르겠으니 난감하죠.

'눈  멀어 비로소 보게 되었네'는 다른 세상으로 이월해본 적이 있는 사람의 말이죠.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오고 가는 세상의 거리들일 것이다. 물론 제게는 현재  먼지낀 소음의 길들만 보입니다. 그런 점이 제 근시안의 장점이고, 기슭에 머무는 자의 안전입니다. (음?)

예사로운 일상의 일들이라도 단 한 번 내 마음과 같아지도록 정성을 기울여 보고 싶어요. 그러나, 그럼에도, 마음 어느 한 구석은 압니다. 모든 사물들, 모든 상황에는 내 마음이 가닿을 수 없는 무섭고 어두운, 격렬한 소음이 들려오는 그런 깊이가 있다는 것을.
이런 인식은 평면적이던 삶이 불현듯 깨어지며 요철을 만들어내는 순간을 의미하는데요,  저는 그런 순간을 인식하되, 체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밤하늘의 침묵에 대한 절망>과 닮아있는 감정일까요?  아니면 절망이기 보다는 그저 놀람일 뿐일까요, 파스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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