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리에게

2019.10.14 23:25

Sonny 조회 수: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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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와 어떤 관계도 없지. 내가 너의 팬인지도 모르겠어. 그렇지만 너의 빈 자리를 보고 새삼 깨달아. 나는, 우리는 너를 아주 많이 좋아했구나. 너의 빈 자리가 이리도 크게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 기억과 기록을 더듬어 발견한 너의 미소가 얼마나 하얗고 발그레했는지, 가슴저미게 선명해. 너가 남긴 너의 자리를 조용히 손바닥으로 눌러보면서 나는 너의 친구 행세를 하고 있어. 이제라도 너와 아주 가까워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착각인 건 알고 있지만, 너는 감히 나와 우리를 말릴 수 없다는 걸 알아주면 좋겠다. 지금, 아주아주 너가 그립거든.


너가 끝이라는 선물을 줘도, 우리는 그걸 받고 다시 너를 좋아하기 시작해. 너의 마음과 우리 마음이 돌고 돌진 못해도...우리가 되돌려줄 것은 그런 마음뿐이라서. 너가 남긴 개구진 표정처럼, 우리의 마음이 네게도 조금만 더 진하게 전해졌으면 좋았을걸.

조금 케케묵은 이야기를 써볼까 해. 좋아한다는 건, 우정이라는 건 원래 흔하고 뻔해서 금새 먼지가 쌓이지만 훅 하고 불어내면 또 꺼내보는 재미가 있잖니. 너가 어떤 소식으로만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게 난 조금 싫어. 그래서 나는 설리 너라는 사람을 추억하는 데 조금 더 집중하려고. 너는 그랬던 사람... 너는 어떤 사람... 길고 짧은 시간에 흩뿌려진 너의 자취들을 모아보면 매순간 너는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결론에 부딪혀서 슬프고 슬프지만. 너가 줬던 별거 아닌 그 행복들을 다시금 그리며 너가 여전히 곁에 있는 것처럼 우리는 너의 기억으로 잠시 눈을 가리고 너를 기다리지.


너는 최진리라는 이름으로 맹랑한 일기를 썼지. 너는 브래지어를 안입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인스타에 올렸지. 조명이 꺼진 무대에서 음악이 울려퍼지면, 가운데 서있던 너가 싱긋 웃으며 모두의 환호가 울려퍼졌지. 무대가 끝나갈 언젠가는 너가 힘들어서 주저앉아있었지. 예능에 나갔을 때 너는 박명수 아저씨를 보고 이유없이 폭소를 터트리며 눈물을 흘렸지. 너는 장어를 구우면서 타죽어가는 장어 흉내를 냈지. 명동역 출구에는 써스데이 아일랜드의 모델로 너가 떡하니 걸려있었지. 진리상점이라는 너만의 잡화점을 열어서 이것저것 팔기도 했지. 누에삐오를 부를 때 너는 꿍디꿍디라는 가사를 불렀고 제트별을 부를 땐 통통한 내 다리 얘기 같대 라는 가사를 불렀지.


그거 아니. 나는 너가 싫은 적이 한번도 없었어. 너가 아무리 욕을 먹고 세상이 괘씸해해도, 난 항상 네 편을 들고 싶었어. 너가 멍한 표정으로 로리타 컨셉의 사진을 찍었을 때에도 난 이상하게 너가 이해가 가더라. 그게 너라는 사람이잖아. 누군가의 사이다도 아니고 관심에 미친 인간도 아니고 설리 너는 호기심 많고 네 안의 가능성을 모조리 실험해버리고 싶던, 용감한 사람이었잖아. 그게 꼭 강하다거나 담대하다는 건 또 아니지만. 그래서 난 너가 늘 궁금했어. 검색창에 네 이름이 또 떠다니면 나는 씨익 웃으며 클릭하고 괜히 웃곤 했어. 역시 설리. 이건 또 뭐니 설리. 작은 당혹에 커다란 즐거움을 한바구니 가득 채워서 너는 너를 우리에게 알려주곤 했잖아. 다 열려있는 것처럼 쿨한 흉내를 내던 세상이 네 앞에서는 어쩔 줄을 모르면서 훈계질을 시작할 때면 난 그게 그렇게 웃기고 통쾌하더라. 너는 누굴 가르치려하지도, 정답을 제시하도 않았지만 그저 너의 자유를 한웅큼 움켜쥐어서 손바닥을 펴기만 했는데 나한텐 그게 그리도 멋져보였어.


그렇게 다 같이 웃을 때에 난 너가 힘들었을 수도 있단 걸 헤아리지 못했어. 조금만 더 상상하고 걱정했더라면, 너는 우리에게 다정할 기회를 줬을까. 어차피 너흰 모를테니... 혼자서 다 품고 가버린 너의 작고 정당한 심술에 나는 서운하다고 하지 못하겠어. 왜냐하면 너는 삶에 대한 변덕을 거듭해서 쌓아오다가 오늘 전부 무너졌을테니까. 어떻게 힘을 내라고, 다시 또 쌓으라고 너의 삶 바깥에 있는 우리가 쉽게 말하겠어. 너는 오로지 네 눈동자 안의 너만을 마주하고 있을 때 우리는 네 웃음소리 바깥에서 너를 다 안다는 듯이 굴었구나.



그런 날들이 있었겠지. 많은 사람 앞에서 눈이 부시게 웃고 뒤돌아서는 부숴져있는 그런 날. 나는 어쩐지 너를 이해한다고 말하고 싶어져. 나도 그런 날이 있었거든. 우산을 썼는데도 빗방울에 온종일 두들겨맞고, 별로 비를 맞은 것도 아닌데 닦아낼 길 없이 온 마음이 흠뻑 젖어있고.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거운 그런 날 침대에 쓰러져버리면 그냥 밤 내내 잠에 깔려있고. 그래도 내가 널 다 이해하지는 못하겠지. 나는 집에서 비로서 혼자의 자유를 얻어 힘들어할 수 있지만 너는 수많은 인파에 휩쌓여 계속 웃고 미소지었어야 했을테니. 너의 인스타가 생각나.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 너를 보고 사람들은 놀랐지. 왜 그렇게 눈을 꺼벙하게 뜨고 있냐고. 너는 동그라이 뜬 눈을 보여주며 말했지. 이건 방송용. 살짝 풀린 눈으로 다시 바라보며 말했지. 이게 원래 나. 그렇게 눈꺼풀에 힘을 주고 살았던 너는 밤이면 긴장을 풀고 눈을 온전히 감을 수 있었을까.


이제는, 쉬도록 해. 무리해서 씩씩하고 당당하느라 힘들었잖아. 외로웠지. 널 외롭게 한 만큼 우리도 외로워야 하는 거지. 너를 위로하지 못한 우리는 마땅히 슬퍼야 해. 그게 너가 우리에게 다른 방식으로 너를 좋아해주라고 한 마지막 부탁일테니까.


너의 세계가 조금씩 흐려져서 이제는 수채화가 되어가지만, 그래도 설리 너가 있는 세계는 여전히 화사하고 이뻐. 번지면 번지는 대로.


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서 너를 다시 생각했어. 바람이 매섭게 불자 눈물이 얼굴 위에 그리는 길은 조금 삐뚤어지더라.


어떡하지. 우리는 설리 너가 계속 좋아지고 있어. 뒤늦게 깨닫고 너를 향한 애정과 우정이 안에서 퍼져나가도록 내버려두는 수 밖에 없어. 너가 던져준 충격을 견디며 우리는 이전과 똑같이, 조금 다르게 너를 계속 좋아할거야.


https://www.youtube.com/watch?v=Gw6ona6_y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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