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대예술과 현장미술 작업을 병행하는 선배가 전화로 하소연하기를 "세계경제 규모 11위라지만 한국인은 참 예술 소비를 안 한다." -_-
TV나 SNS에서 가장 인기 있는 건 먹방이고,  맛집을 찾아다니며 먹다가 일하고, 그러다 정치판을 난도질 해보는 것으로 에너지를 다 쓰는 것 같은 느낌이라더군요. 
요즘 네티즌들 사이에 가장 핫한 화제가 백종원이 진행하는 '골목식당'에 소개되었던 포방터 돈까스집이라죠. 하루 판매량이 한정돼 있어서 번호표 받으려고 가게 앞에다 밤새 천막치는 손님까지 있을 정도였고, 그들이 일으키는 소음 때문에 주민신고가 이어져서 결국 그 가게는 제주도로 옮겨갔다던가요. 

우리사회의 유행을 보면 <머리를 비워주는 단순한 것이 좋다> 파가 <아는 만큼 보인다>파를 이기고 있는 것 같긴 합니다. 예술이든 방송이든 앎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환영받지 못하는 분위기가 확연해요. 
선배의 괴로운 토로를 듣노라니, 90년대 초 백남준이 관객과의 대화 중 “예술이 뭐냐?” 라는 질문에 답했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나에게 예술은 돈이 벌리는 것이다. 돈이 벌려야 정상인 예술이다."

2. 예술은 표현이 아니라 명확한 의지라고 믿습니다.  예술이 '표현'이 되는 것은 명확하기 위해서이며, 의지이기 위해서라고 저는 생각해요. 하지만 예술은 확신이 아닌 모색이고, 대답이기보다는 질문입니다.
 '형상'조차도 추구되는 것이 아니라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라 봅니다. 삶의 의지이자 행위의 일환이더라도,  남겨진 것이 아니라 진행되며 미래로 던져지는 새로운 의지이자 행위.

가끔 느끼는 건데 대중은 인생의 윤리로는 요구할 수 없는 슬픔, 참혹, 광기를 예술에게 요구합니다. 그것만이 세계를 조명하는 빛이 아닌데도 말이죠.  정화된 존재란 하나의 의식이나 하나의 욕망이, 아니 다른 그 무엇이든 극점에 이른 상태에서 빛을 발하는 행위인데 말이죠. 

3. "예술은 번역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계몽적으로 유포될 이유, 혹은 필요가 있었던 시절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그 말이 예술은 정말 번역해봤자 별 의미가 없다는 식으로 이해되어서는 곤란합니다.  번역될 수 없는 건 예술에 접근하는 우리의 자세인 거죠.  눈부신 대상을 두고 '차마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하는 마음 말이에요. 
사랑이 그렇듯 예술 감상도 기도와 같은 것 아닐까 싶습니다. 기도는 모자라거나 넘치지 않는 자세이고, 비원이자 은밀한 직접성입니다. 

4. 모든 것이 시간의 예술이고, 무대예술은 특별히 더 그렇습니다. 작가가 시간을 한 번 쥐었다 놓을 때마다 한 사람이 눈뜨거나 눈이 멀죠.  누군가 시간을 조금 건드릴 때마다 한 사람이 불꽃처럼 터트려지거나 재처럼 사그러든다. 
예술이란 시간이 인간에게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이에요. '혹시 모든 방식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자주 우울하죠. 
그러나 그들은 어둠을 빛만큼 사랑하는 이들입니다. 어둠의 부드러움, 어둠의 우아함, 어둠의 고적함, 어둠 속의 기적 같은 불빛을.

5. 시간 속에서 생각하는 시간이란 무엇일까요.  사랑 속에서 생각하는 사랑, 이별 속에서 생각하는 이별이란 또 무엇일까요. 생각과 사랑과 이별은 negation을 핵으로 삼아요. 이별과 이별 아닌 것의 경계에서 예술은 오래도록 서성이고 머물고 시간을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시간의 예술이죠.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소리가 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움직이는 것에 대해 멈추어 서서, 멈춘 것에 대해 움직임으로 대응하면서.

덧: 월요일부터 2주 간 겨울 휴가라 (여름 휴가를 사용하지 않은 누적 분 포함.) 내일 여행을 떠납니다. 보스가 프랑스 북쪽에 위치한 Charleville Mezières에 위치한 별장을 쓰라며 빌려줬어요. 한번 가본 집인데, 랭보가 태어난 곳이라는 것 외에는 별 시선 끄는 것 없는 외지고 조용한 시골입니다.
저를 설레게 하는 건 그 집에 굉장한 오디오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는 사실이에요. 스펙트럴 DMC 20 프리앰프와 마크 레빈슨 NO. 20.5 파워앰프 조합에다 알텍 9708A 스피커입니다. 
제가 갖추고 있는 오디오 시스템도 괜찮은 것이긴 한데, 작은 아파트라 항상 헤드폰을 착용해서 감상해야 하는 안타까움이 있죠. 공간을 꽝꽝 울리는 소리로 좋아하는 음악을 즐길 생각을 하니 벌써 가슴이 두근거려요~ ㅋ

어쨌거나 여러부운~ 미리 메리크리스마스 앤 해피뉴이어! 
평안하고 쉼이 있는 연말이기를, 풍성하다 못해 잉여까지 즐길 수 있는 연말이기를, 더 바랄 것 없이 다복한 연말이기를 기원합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4822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379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1731
123206 이번 주에 읽을까 하는 책. [4] thoma 2023.05.15 302
123205 피식대학에게 토크쇼의 미래를 묻다 [11] Sonny 2023.05.15 817
123204 '중이층' 이란 무엇입니까 [8] 2023.05.15 642
123203 [웨이브바낭] 슝슝 하늘을 나는 어린이의 친구 로보-캅! '로보캅3' 잡담입니다 [17] 로이배티 2023.05.14 366
123202 이번 이강인 역제의 오역 해프닝 보다 든 생각 [5] daviddain 2023.05.14 290
123201 Dreams that money can buy를 5분 보고 daviddain 2023.05.14 147
123200 넷플릭스 ‘택배기사’ : 유치함이라는 허들 (스포) [3] skelington 2023.05.14 661
123199 '천사는 침묵했다' 읽고 잡담. [7] thoma 2023.05.14 274
123198 프레임드 #429 [4] Lunagazer 2023.05.14 103
123197 [웨이브바낭] '로보캅2'를 봤어요 [16] 로이배티 2023.05.14 381
123196 연극 오셀로를 보고 Sonny 2023.05.14 187
123195 페미니스트 남자에 대해 [11] catgotmy 2023.05.14 704
123194 귀찮아서 이런 생각이 [2] 가끔영화 2023.05.14 146
123193 남한테 기억 되기 [1] 가끔영화 2023.05.14 142
123192 모르고 지나쳤던 명작, 이번엔 애니 [6] LadyBird 2023.05.14 511
123191 [넷플릭스] 택배기사, 2회까지 본 소감은.... [6] S.S.S. 2023.05.13 629
123190 러브 미 이프 유 데어 (2003) catgotmy 2023.05.13 180
123189 프레임드 #428 [4] Lunagazer 2023.05.13 98
123188 나겔스만이 토트넘 감독 후보에서 아웃/감독 찾기 47일 [3] daviddain 2023.05.13 153
123187 [웨이브바낭] 저렴한 장르물 셋, '마더 앤 머더', '프레이: 인간사냥', '극장판 카케구루이3' 잡담 [2] 로이배티 2023.05.13 290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