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단 트레일러라도 올려 보고 시작하죠.




 - 게임을 시작하면 시체 더미에 묻혀 있는 주인공이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기괴한 장면을 보게 됩니다. 제목만 봐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양반은 흡혈귀가 된 상태이고, 피에 대한 갈망으로 정신줄을 놓고 가장 먼저 마주친 어떤 여성의 목덜미를 마구잡이로 물어 뜯는데...


 본의가 아니게 또 '이 시국!'에 어울리는 게임이었습니다. 스페인 독감이 한창 유행해서 사람들이 매일같이 와장창 죽어나가던 20세기 초반의 지옥 같은 런던을 배경으로 하고 있거든요. 그런 상황에 왠일인지 사람들을 흡혈귀로 만드는 병이 스며들어 확산되어가고, 영문도 모르고 흡혈귀가 되어 버린 주인공 '닥터 리드'가 전염병에 맞서면서 동시에 복수심에 불타는 맘으로 자신을 흡혈귀로 만들어버린 상대를 찾아 헤맨다... 는 내용의 다크하고 암울한 내용의 오픈월드 액션 rpg 게임입니다.



 - 게임의 상태(?)를 이해하시려면 일단 제작사의 이름에 유의하셔야 합니다. 돈노드 엔터테인먼트(DONTИOD Entertainment)라는 이름이 기억나십니까.

 이런 게임들로 자신의 존재감을 알린 프랑스의 중소 제작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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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대표작이 '라이프 이즈 스트레인지'와 '라이프 이즈 스트레인지: 비포 더 스톰', 그리고 '라이프 이즈 스트레인지2' 되겠습니다... ㅋㅋㅋㅋ

 이 시리즈는 대화 선택지로 스토리를 조금씩 변형시켜가며 (하지만 결국 엔딩은 몇 가지로 한정되어 있는) 즐기는 어드벤쳐 게임이었죠.


 이 Vampyr(뱀파이어라고 읽어야할지 뱀피르라고 읽어야할지 뱀퍼라고 읽어야할지 몰라서 걍 영어로 적습니다;)는 액션 rpg라서 장르는 다릅니다만, 결국 게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마주치는 npc들과의 대화와 선택지이고 액션과 캐릭터 육성은 그냥 거드는 정도에 가깝습니다. 그러니까 원래 자기들 잘 하던 장르에 살짝 다른 걸 첨가해서 맛을 낸 거죠. 맨날 어드벤쳐 게임만 만들던 회사가 갑자기 왠 액션 rpg야... 싶었는데 직접 해보니 납득이 가는 선택이었어요. 머리 잘 굴렸죠.

 어드벤쳐라는 게 결국 스토리로 승부하는 장르인데, 솔직히 말해서 이 회사가 만들어내는 스토리들이 그렇게까지 훌륭하진 않았어요. 그리고 '선택에 따른 이야기 전개'라는 부분도 뭐 대단할 것처럼 폼 잡는 것에 비해 결국 그렇게 큰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해서 엔딩을 보고 나면 아쉽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었구요.

 그런 부분은 이 Vampyr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장르를 어드벤쳐에서 액션 rpg로 바꿔버리니 이전에 해 오던 그만한 퀄의 스토리에 그만한 수준의 선택을 넣어둬도 그게 부족해 보이지 않는 효과가 있습니다. ㅋㅋ 뭐랄까, 그러니까 식당의 메인으로는 좀 아쉬운 구석이 있던 요리를 사이드로 바꿔 놓으면 사이드 치고는 훌륭하네!! 이런 기분이 드는 거 있잖아요.



 - 그리고 그 외에도 가만 생각해보면 은근히 적절하다 싶은 부분들이 많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게 비주얼이요.

 예를 들어, 주인공의 상태가 상태이다 보니 게임이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쭉 밤이고 어두침침한 실내이고 그래요. 그러다보니 미술 디자인 좀 적당히 해 주고 화면 어둡게 한 다음에 강한 광원 좀 넣어주면 그래픽이 실상보다 훨씬 좋아보이게 되는 효과가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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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말입니다)


 이 회사가 원래 그렇게 규모가 큰 곳이 아니고 그동안 만들어온 게임들도 '그림'은 예뻐도 기술적으로 높게 쳐줄만한 그래픽을 보여줬던 물건들은 아니었는데, 이 Vampyr의 그래픽은 그 실상(?)에 비해 상당히 보기가 좋습니다. 뭐 일단 20세기 초 런던, 음침하고 절망적인 사태에 휩싸인 도시의 어두컴컴한 밤... 이라는 설정으로 먹고 들어가는 것만 해도. ㅋㅋ

 혹시 플레이스테이션의 '블러드본'을 재밌게 하신 분이 있다면, 그 게임의 배경과 분위기가 흡사합니다. 물론 그 정도로 막나가는 느낌은 아니지만 대략 비슷해요. 그 게임의 배경도 정체불명의 괴물들이 장악한 영국풍의 도시 뒷골목을 밤에만 헤매고 다니는 식이었죠.



 - 근데... 사실은 단점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액션' rpg인데 액션이 약해요. 그냥 뱀파이어식 순간이동 대시로 다가가서 무기로 두 대 정도 툭툭 치고 반격 당하기 전에 다시 대시로 피하고, 적과 거리를 벌여서 스태미너를 회복한 후에 다시 접근해서 툭툭 치고 샥샥 빠지고. 이 패턴 하나로 시작부터 끝까지 갑니다. 무기가 여럿 있지만 공격 스피드와 데미지에 차이가 있을 뿐 무슨 콤보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구요. 피(=마법력)를 소모해서 사용하는 전투 스킬들이 있지만 시각적으로나 데미지로나 크게 의미가 없구요.


 그리고 주인공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런던의 시민들을 치료하러 다녀야 하고 그러기 위해 아이템을 수집해 약을 조제하고... 그걸 대충 하다가 시민들의 건강이 안 좋아져서 죽기라도 하면 좋은 엔딩 보는 데 영향이 가고... 이런 요소가 있는데 이게 상당히 귀찮습니다. 특히 초중반까진 약 재료도 좀 부족한 편인데 주인공의 레벨도 낮으니 스트레스가 만발.


 또 맵이 그리 넓진 않지만 길이 복잡하게 꼬이고 사방이 막혀 있어서 이동이 불편한 편인데 빠른 이동도 없고. 미니맵이 아예 없어서 목적지를 확인할 때마다 버튼을 눌러 맵을 봐야 한다든가. 그 와중에 로딩은 또 빈번하면서 길구요.


 npc들 하나하나에 많은 대화와 사연을 넣어준 건 좋은데, 그 대화 내용을 전부 개방하려면 맵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며 전혀 쌩뚱맞은 곳에서 튀어나오는 특정 인물에 대한 정보들을 수집해야 하는데 이게 양이 워낙 많다 보니 작정하고 공략을 보며 플레이하지 않는 이상엔 거의 반 이상의 대화를 놓치고 찝찝한 기분으로 엔딩을 보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게임의 최적화가 별로여서 게임기의 성능을 제대로 살린 퀄리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종종 프레임 저하가 느껴졌다는 거...



 -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합적으로 상당히 재밌게 했습니다. 제 취향엔 이 회사 대표작인 '라이프 이즈 스트레인지'보다 훨씬 재밌게 했어요.

 일단 전투는 시스템이 허접하지만 그래도 흡혈귀의 특성을 잘 살린 스킬이나 모션들이 많아서 그냥저냥 할만 했구요. 종종 주인공에 비해 적들 레벨이 너무 높은 상황을 만나게 되는데... 그게 그래도 어떻게든 깰 수는 있게 되어 있다 보니 (왜냐면 적들 ai가 멍청해서요 ㅋㅋ) 쌩뚱맞게도 프롬 소프트의 게임들을 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네요.

 그리고 스토리가 꽤 괜찮습니다. 노골적으로 앤 라이스식 흡혈귀 세계관을 차용하고 있다는 것도 게임으로서는 꽤 신선했고. 주인공을 비롯해서 주변 인물들의 드라마도 '라이프 이즈 스트레인지'의 그것보다 오히려 잘 만든 느낌. 심지어 '선택에 따른 결과' 시스템도 '라이프 이즈...' 보다 훨씬 잘 구현된 느낌이었네요.

 암튼 그래서, 숱한 단점들과 못 만든 구석에도 불구하고 19세기말~20세기초의 영국뽕을 사랑하는 분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살며 사람 행세하는 흡혈귀 이야기 좋아하는 분들. 스토리 중심의 게임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상당히 만족스럽게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진 소수 취향 저격 게임이었고 저는 아주 만족했습니다.

 다만 전투를 좋아하는 분, 캐릭터 성장에 큰 비중을 두시는 분, 시스템이 불편하게 생겨 먹은 게임에 적응하는 걸 싫어하는 분... 이라면 피하시는 편이.




 + 멀티 엔딩이고 플레이 방향에 따라 총 네 가지 엔딩이 준비되어 있는데 내용상 베스트, 굿, 배드, 워스트... 정도 되더라구요. 저는 굿 엔딩을 봤습니다.


++ 한 가지 재밌는 시스템이 있어요. 주인공이 흡혈귀이다 보니 대화를 빌미로 npc들을 꼬드겨서 세뇌시키고 피를 빨아 버릴 수 있는데... 이렇게 하면 경험치를 대량으로 얻어서 렙업이 수월해지지만 대신 좋은 엔딩을 볼 수 없고 보스전이 엄청 빡세집니다. (보스가 주인공의 레벨에 맞춰서 강화되거든요)

 그렇게하지 않고 '나는 인간의 마음을 버리지 않겠어!'라는 주인공의 의지에 맞춰 npc들을 보호해주고 살려주며 플레이하면 경험치를 얻지 못해 잡졸들 두 세 마리만 뭉쳐 나와도 땀나게 도망쳐야 하는 궁상맞은 플레이를 해야 하지만 그 댓가로 좋은 엔딩을 볼 수 있고 보스전은 상대적으로 쉬워져요.

 그러니까 결국 한 번 컨셉 잡고 엔딩 본 후에 맘에 들면 다른 방향으로 한 번 더 플레이하라는 겁니다만. 전 이 게임을 엑스박스 게임패스로 플레이해서 어제 간신히 엔딩을 봤고 오늘부로 이 게임이 게임패스 리스트에서 빠지기 때문에 2회차를 할 일은 영원히 없겠습니다.


+++ 얄미운 국내 배급사에서 플스 버전만 현지화를 해놓는 통에 (망해버려라!!!) 영어 버전으로 플레이했지만 대화에 나오는 영어들은 상당히 낮은 수준이라 별 어려움 없이 플레이했습니다. 하지만 대략 수십개 정도 등장하는 편지, 일기장 같은 건 그냥 시원하게 포기했네요. 하나하나 텍스트 분량도 많지만 또 폰트 크기가 너무 작아서 눈알 빠지겠더라구요.


++++ 왜 Vampire가 아니라 Vampyr일까... 했는데 한참 플레이하다가 이 게임은 대화중에 중요한 (이후 스토리에 영향을 미치는) 선택지가 뜰 때마다 그게 항상 셋 중 하나를 고르는 식이고, 그 선택지가 Y자 모양으로 배치된다는 걸 깨달았죠. 그리고 그 때마다 정말로 붉은 Y자가 선택지 셋을 연결하는 모양으로 그려져요. 그리고 게임 제목의 폰트를 보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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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ㅋㅋㅋㅋ 결국 이것도 대화 선택 게임이란다... 라는 제작진의 은밀한 고백 같은 거였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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