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이면 괜찮죠

2020.05.02 02:08

Sonny 조회 수:1026

어제 듀나게시판 사람들끼리 소소한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렇게 영어번역체로 말하면 뭔가 있어보이지만, 기름기를 쳐낸 문장에서는 그냥 술먹고 떠들었습니다. 그리고 어제도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너무 늦게 왔다, 차라리 다른 모임을 가봐라, 다른 모임을 가보고 나한테 그 모임 좀 알려줘라... 집에 와서는 조금 언짢았어요. 저도 여기 사람들도 다 바보 되는 것 같으니까. 그래도 웃자는 의도인 걸 알기에 차라리 제가 왜 이 모임을 좋아하는지 좀 써보기로 했습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온라인을 통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오프라인에서의 지인을 통한 것과는 다른 긴장이 있습니다. 대외적인 글이나 댓글을 통해 만들어진 인상이 있고 그것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외양과 인격체로서의 정보를 합한 "본격적" 교류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약간의 정보와 외모의 인상으로 시작되는 오프라인 만남과는 반대로 생각이나 가치관을 어느 정도 알게 된 후 실체적인 이미지를 나눕니다. 이 과정에서 어느 정도 공인되는 게 있어요. 아 이 사람이 이런 생각을 이렇게 하는구나, 이런 가치관을 이렇게 표현하는구나, 하는 것들이요. 아무리 잘생쁘고 재미있어도 가치관이 안맞으면 관계가 힘들잖아요. 그 점에서 여기 소모임 사람들은 제가 기본적으로 동질했으면 하는 가치관이 어지간한 부분에서 다 맞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이야기할 떄 전혀 거슬리는 게 없어요. 즐거운 대화와 논쟁이 가능하죠. 아무리 의견이 부딪혀도 그것은 결국 차이의 영역에서 맴돕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역사가 그렇게 쌓이지 않았는데도 저는 이 소모임 내의 대화가 즐겁습니다. 


저는 게시판에서는 소위 "지랄"을 자주 하지만 오프라인에서는 덜 그럽니다. 실제로 소모임 한분이 그러셨어요. "아니... 게시판에서는 좀 쌈닭같고 한판 뜰 줄 알았는데 말은 별로 안그렇게 하시네요..." 당연하죠! 온라인에서는 제 생각을 일단 주장하는 목적이 강하지만 소모임은 다수와의 친분을 목적으로 하는 거고 저도 사람인지라 얼굴 보고 그렇게 세게 지르는 건 잘 못합니다. 이런 것이 이 소모임의 다른 재미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려나요.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연동됩니다. 그 안에서 어떤 사람의 온오프 동질성과 괴리감(?)을 확인하는거죠. 물론 이 소모임의 대다수는 그렇게 글을 안쓰고 이미 유령선의 유령들처럼 떠돌아다니고 있어서 그 연동이 확인되는 건 거의 저뿐이지만... 제 입장에서는 듀나게시판이라는 온라인의 영토를 공유하면서도 생각은 다른 분들을 실제로 만나서 그 생각을 듣는 재미가 있습니다. 공통된 가치관 안에서 당연할 수 밖에 없는 개개인의 차이와 취향을 안전하게 발견하고 놀 수 있어요.


그런데 소모임이란 걸 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사실 즐겁기가 좀 힘들잖아요. 저는 아주 옛날에 인생 최초의 소모임이란 걸 어느 남초커뮤니티에서 해본 적이 있습니다. 영화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영화 이야기를 해보자 라고 했고 저는 좀 긴장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영화공력(...)이란 어떻게 될까, 나는 뉴 아메리칸 시네마나 아핏차퐁 이런 건 거의 모르는데... 하면서 쫄아서 갔어요. 그리고 그 안에서 정말 쪼다같은 영화수다만 나눴습니다. 내가 본 이 영화가 망작이다, 내가 본 이 영화가 더 망작이다, 서로 무슨 지뢰를 밟았는지 국군병동 같은 이야기만 해대는데 별로 즐겁지가 않더라구요. 물론 영화 좋아하는 모든 사람이 정성일 키드일수는 없겠지만 저는 제가 모르는 정보나 애정으로 제 외연이 더 확장됐으면 싶었거든요. 그리고 2차에 가서는 취했는지 어떤 얼치기가 데이빗 핀처는 개연성이 야수적이라는 당최 모를 헛소리를 해대기 시작했고 저는 좀 짜증이 났습니다. 아무튼 개판이었습니다. 그게 제가 가진 온라인 소모임에서의 첫인상이었습니다. 다른 분들 말도 소모임 경험담은 즐거운 경험보다는 폭탄 터진 경험들이 더 많더군요.


소모임이라는 게 원래 리스크가 크다면, 또 원래 "친구"라는 사이에서는 안그런가. 저는 사실 가치관의 변화가 큰 폭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무감각하던 것들이 이제는 너무 예민하게 되었고 원래 친구인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더 많은 충돌 혹은 가치관의 협곡을 체험합니다. 제가 볼 때 놀라울 정도로 인싸이고 먹고사니즘에 바쁜 이들에게, 저는 쓸데없는 세상걱정에 혼자만 착한 척 하느라 바쁜 인간이죠. 전에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어떻게 봐도 대한민국의 택배시장은 기형적이고 노동자 착취에 기반하고 있다. 택배비용을 올리지 않는 이상 택배는 값싼 노동이 되고 이 착취는 모든 업계 인간들을 연쇄적으로 다 좀먹을 것이라고. 그러자 친구가 그러더군요. 네 말이 틀린 건 아닌데 소비자 입장에서는 그냥 이득을 누리면 되지 않겠냐고. 저는 예전에 돈 좀 벌고싶어서 야간 택배를 한 3주 정도 뛰어보고 말을 한 거거든요...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정치적 입장 A와 B가 부딪히는 게 아니라 정치적 입장 A와 탈정치가 항상 부딪힙니다. 저는 이런 대화를 할 때 좀 괴롭습니다. 옳고 그르다가 아니라 괜한데 신경분산하지 말자는 그 무심함이, 약간 티비 예능의 세계로 저를 끌어당기는 것 같아요. 그냥 웃자, 그냥 떠들자, 진지한 게 바보, 이런 거. 그리고 싸우면 미통당 지지자랑 조국 이야기 가지고 엄청 싸웁니다. 조국이 잘못했는데 검찰은 잘했냐! 너무 격한 싸움과 입 한번 못떼고 끝나는 이 평화 사이에서 저는 이런 문제의식을 구술(?)로 좀 나눠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거든요. 그런 점에서 친구라는 사이도 아주 정확한 대화 상대는 아니었습니다. 안부와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지만 대화가 꼭 잘 통하냐 하면 그런 건 또 아니거든요.


더욱이 취향에 관한 이야기는 나누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저는 티비를 거의 보지 않는데, 어떤 친구는 만나면 이태원 클라스 이야기를 하고 어떤 친구는 아는 형님 이야기를 하고 어떤 친구는 슬기로운 의사생활 이야기를 합니다. 그저 아냐 모르냐의 문제라면 모르겠는데 그냥 티비를 보는 사람과 티비를 보지 않는 사람으로 나뉘는 기분이 들거든요. 그렇다고 제가 또 티비를 안보는만큼 뭘 또 막 보고 읽고 하냐 그런 건 아니지만. 저는 전혀 관심이 없고 진지해질 수 없는 걸 이야기를 하니까 제 입장에서는 좀 신기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뭘 진득하게 하려면 영화관이라는 공간에 가서 두시간동안 자발적 감금을 안하면 그런 게 불가능한 인간이 되서 그런지도 몰라요. 저는 쀼의 세계도 그냥 건너건너 소식만 듣습니다. 어쩌면 제가 그냥 뿌리가 오타쿠라서 맨날 만화책이나 보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죠.


이런 저의 성향과 취향이 큰 트러블 없이 소통이 되는 오프라인 모임은 듀게의 그 모임이 거의 유일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 모임에 나가는 걸 좋아해요. 저빼고는 다들 너무 모임 출석 역사가 오래되어서 별 감흥이 없는 모양이지만...ㅋㅋ 다른 분들도 볼 수 있으면 좋겠고 그렇습니다. 어찌보면 제가 가장 저답게 있는 곳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미통당 지지자가 없고 어느 정도 취향이 맞아서 즐겁게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오늘 홍진경씨가 인스타에였나 올린 글귀에 "너랑 있는 시간이 달다"라고 써놨던데 저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그냥 쓰지 않고 가시걸리는 게 없는 시간이라고 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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