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고 이걸로 아예 끝낼 겁니다. ㅋㅋㅋ 구체적인 스포일러는 없는 글입니다.



 - 미국 청춘물에 자주 나오는 아예 시골도 아니지만 대도시는 절대로 아닌 어중간한 동네와 그 곳에 위치한 평범한 미국 영화식 고등학교(?)가 배경입니다.

 '해나'라는 여학생이 자살을 했습니다. 학교와 학생들은 역시 뭐 익숙한 미드 고등학교답게 호들갑을 떨며 그 죽음을 추모하려 하지만 뭔가 불쾌하고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해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던 것 같은 너드(왜 아니겠슴까) 친구 한 녀석이 유난히 슬퍼하는 가운데 요상한 박스가 배달되고, 그 안에는 해나가 자신을 죽게 만든 주변 사람들을 하나씩 호명하며 구구절절 사연을 늘어 놓는 내용의 카셋트 테잎이 푸짐하게 들어 있습니다. 이제 주인공은 이 카셋트를 들으며 해나와 주변 사람들의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합니다만, 이 일이 자신의 미래를 망칠까봐 두려운 호명 학생들의 저항이 살벌하기 그지 없습니다...



 - 일단 칭찬부터 해보자면, 기술적으로 상당히 잘 만들어진 이야기입니다.

 사실 이걸 그냥 시간 순서대로 배열을 해 놓으면 그냥 평범한 청춘 막장극이 됩니다만. 이렇게 살짝 비틀어 놓으니 흥미로운 미스테리가 되죠. '메멘토'랑 약간 비슷한 발상과 이야기 구조라는 느낌도 들고 그랬습니다.

 '해나' 나름의 복수(?) 방식도 꽤 근사합니다. 살아 있을 땐 털끝 하나 건드릴 엄두도 못 냈던 학교의 '핵인싸'들을 자신의 죽음을 무기로 사후에 꾸짖고 겁주며 반성하거나, 최소한 불안과 두려움에 떨게 만들고 있으니 결말에 관계 없이 꽤 성공적인 복수가 되겠구요. 또 그 스타일 (굳이 구식 카셋트 테이프를 도구로 삼는다든가) 또한 아주 영화적이면서 괜히 있어 보이구요. 시청자들의 관심을 훅 끌어내는 장치 역할을 톡톡히 했죠.

 수많은 캐릭터들을 굴리면서 나름 살짝살짝 디테일을 넣어줘서 현실감을 살리고 드라마를 튼튼하게 만드는 센스도 괜찮습니다. 예를 들어 해나 부모님네 가게가 대형 마트 때문에 겪는 위기 같은 건 별로 중요하지 않는 부분이지만 어쨌든 드라마와 캐릭터 구성에 연결이 되고 또 역시 이 이야기를 '괜히 있어 보이게' 해주죠.

 중반 이후로 비슷한 이야기의 반복 때문에 슬슬 질리네... 하는 타이밍에 슬쩍슬쩍 소소한 떡밥들을 던져주고 국면 전환을 넣어주는 스킬도 꽤 훌륭했고.

 흥행한 청춘물이 다 그렇듯이 캐스팅도 좋습니다. 대부분의 인물들이 그냥 얼굴만 봐도 캐릭터와 딱 맞아떨어지는 느낌. 비열한 애는 비열하게 생기고 무식하고 거친 애는 무식하고 거칠게 생기고 뭔가 꿍꿍이가 있는 애는 꿍꿍이가 넘치게 생기고... 그냥 모여서 서 있기만 해도 드라마가 진행되고 있는 느낌. 특히 투톱인 해나와 클레이의 캐스팅은 정말 완벽해요.

 또 화면도 예쁘게 잘 잡으면서 음악도 잘 써서 전반적으로 보기도 좋고 듣기도 좋은 드라마입니다. 충분히 흥행할 자격이 있었어요.



 - 그런데 사실 좋은 것보단 싫은 부분이 더 많았습니다. ㅋㅋ 최대한 간단하게 적어 보면요.


 1) 일단 해나의 수난들이 문제입니다. 이게 가해자로 지목되는 게 무려 13명이라 수난도 그 숫자 이상이 벌어지는데요. 그냥 하나하나 떼어 놓고 보면 다 현실에서 충분히 겪음직한 일들이라 감정 이입도 되고 그럽니다만. 이걸 단 몇 개월의 시간 동안 한 캐릭터에게 몰빵을 하다 보니 괴상해지는 거죠. 학교 학생들이 모두 해나 인생을 망쳐놓고 싶어서 번호표를 뽑아들고 기다리다 차례로 입장하는 풍경을 보는 듯한 느낌(...) 중반쯤 넘어가면 인위적이라는 느낌이 강려크하게 밀려와서 몰입이 깨져 버립니다. 


 2) 그나마 초반에 바탕을 잘 깔아놓아서 은근슬쩍 넘어가는 느낌인데, 아무리 그래도 막판의 전개는 해나 생전 막판이나 사후 막판이나 똑같이 빤다스띡 막장극입니다. 특히 주인공에게 죄책감을 심어주기 위한 그 부분의 전개는 진짜... ㅋㅋㅋ (막판에 어떤 캐릭터가 '여긴 참 작은 마을이구나'라는 대사를 치는 걸 보며 작가들도 스스로 좀 민망하지 않았나... 라는 의심을 했습니다) 특히 해나에게 결정타를 날리는 학생과의 그 사건은 너무 쌩뚱맞으면서 불필요하게 자극적이어서 제작진의 진심을 의심하게 만들었네요. 굳이 그런 사건까지 덧붙일 필요가 없었는데요.


 3) 그리고 어찌보면 가장 심각한 문제인데. 주인공의 행동이 지나치게 답답함을 유발합니다. 짝사랑하던 사람이 죽었고 거기에 덧붙여 또 끔찍한 비밀 사연들을 듣게 되다보니 살짝 맛이 가는 건 이해하겠습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심적으로 너무 힘들다'면서 테이프는 못 듣는 놈이 그나마 듣는 내용 진도 맞춰서 한 놈씩 찾아가서 비난하고 갈구고 시비걸며 다니는 건 대체... 빌런(?)들이 '너 제발 이렇게 설치고 다니지 말고 집에 가서 얼른 그 빌어먹을 테이프부터 다 들어!!!'라며 화를 내는데 매번 공감 100%였습니다.



 - 그래서 제 결론은 이렇습니다.

 기술적으로 참 잘 만들었고 메시지도 좋습니다만. 어떤 면에선 13시간짜리 고문 포르노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굉장히 피곤하고 불편한 마음으로 봤습니다.

 13편짜리 드라마를 보면서 4화쯤 넘긴 시점부터 이미 '해나 과거 얘기는 이걸로 끝내고 이제 수습 파트에 집중해주면 안 될까'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으니 말 다 했죠. 억울하고 비참하고 불쌍한 주인공이 개고생하는 이야기에 취약하신 분들은 손도 대지 않으시는 게 좋아요. 며칠 전에 봤던 '믿을 수 없는 이야기'보다 몇 배는 더 지치는 드라마였습니다.

 하지만 미국 고딩들 나오는 청춘극이 취향인 분이시라면 한 번 시도는 해보실만도 합니다. 아주 조금이지만 밝고 낭만적인 장면도 없는 건 아니고 하니(...)

 


 - 그럼 이제 본편보다 긴 사족 파트.



 - 스카이캐슬의 '혜나' 캐릭터 이름은 아무래도 이 드라마에서 따온 게 맞는 것 같죠. Hannah라는 이름을 '한나'가 아니라 '해나'라고 적는 데에서 세월의 흐름을 느꼈습니다. ㅋㅋ



 - 조이 디비전의 음악을 카셋트 테이프로 듣는 고딩들이라니 복고 코드를 넣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라는 생각이 첫 회부터 문득.



 - 제작비 아껴쓰는 티가 별로 나지 않는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가끔 나오는 군중씬 같은 걸 보면 확실히 돈이 없긴 없었나보더라구요. 전교를 호령하는 실질적 학교의 주인 운동선수들!! 이라는데 경기 보러 모여 있는 학생들 규모를 보면 그게... 무도회 장면도 그렇구요. ㅋㅋㅋ



 - 처음부터 끝까지 깨끗하게 호감가는 캐릭터가 딱 하나 있었습니다만. 비중도 비중이거니와 막판의 대우가 참... 누구 얘기냐면 그 주인공에게 공부 배우는 야구 선수요. 이름이 생각 안 나서 찾아보니 '제프'였네요.



 - 너무 지치는 드라마라 다음 시즌들은 안 보기로 결심하고 맘 편히 스포일러를 찾아보니 참... 보지 말라고 댓글 달아주신 분들의 선의가 확확 와닿네요. 결국 시즌2는 시즌1의 에필로그 같은 이야기를 한 시즌 분량으로 늘려 놓은 것이고, 시즌3 만들려고 그마저도 결말을 충격과 공포의 그지 깽깽이 엔딩으로 만들어 놓고 억지로 시즌3... 이라는 느낌. 뭐 새로운 이야기라도 만들어 놓았나 했더니 결국 시즌1의 사건들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 뿐이잖아요. 한 때는 천조국의 시즌제 제작 시스템이 한국 드라마가 가야할 미래라는 얘기들도 많이 했었는데.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아. 그래도 시즌1의 마무리는 '그래 이걸로 끝난 거야!'라고 정신승리 할 수 있을 정도로는 정리를 해줘서 다행이었습니다. 노골적인 클리프 행어 같은 건 아니더라구요.



 - 남자 주인공 배우의 목소리가 캐릭터 성격과 생김새에 비해 너무 깊고 낮고 중후해서 적응하는데 한참 걸렸습니다. ㅋㅋ



 - 과거와 현재가 정신없이 교차되는 형식이다 보니 시청자들이 혼동하는 걸 막기 위해 현재 파트 주인공의 이마에다가 커다란 상처를 내놨는데. 그러다보니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일단 주인공 이마부터 뚫어지게 쳐다보게 되는 효과가(...) 막판에 상처가 거의 아물고 피부색 반창고로 안 보이게 되니 그땐 또 다른 상처를 잔뜩 만들어주더군요. 괜히 웃겼습니다. 



 - 아예 악당으로 묘사되는 학생들 중에 그나마 제일 덜 나쁜 놈을 꼽는다면 누굴 고르시겠나요. 전 그 재수 없는 잡지 만드는 놈을 골라주겠습니다. 되게 밥맛 없는 놈인 건 사실이고 해나의 뒷통수를 정말 얼얼하도록 후려친 것도 사실이지만 그게 해나의 시라는 걸 전교생이 다 바로 눈치 채버리는 것과 또 그 시 내용 때문에 해나 인생이 더 고달파지는 부분은 아무리 봐도 억지 전개 같아서요. 그 학교는 뭐 전교생이 30명쯤 된답니까. 도대체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리고 이 드라마 역시 진짜 빌런들은 대부분 남자애들인데... 여자 캐릭터들 중에 끝까지 재수 없게 구는 유일한 캐릭터가 하필 동양인이라서 괜히 맘 상했습니다. ㅋㅋ 음. 근데 생각해보니 빌런 여학생들 중엔 백인이 아예 없네요.



 - 이런 장르의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마다 반복적으로 드는 생각인데요. 제가 미국 고딩들 문화에 대해 이렇게 자세히(?) 알고 있다는 게 좀 웃깁니다. 수십년간 헐리웃 문화 컨텐츠들과 함께 살아가다보니 참... ㅋㅋ 

 그리고 또 한 가지 생각. 정말로 미국 고딩들에겐 저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흔한 풍경들 맞나요. 힘 센 남자애들이 으시대며 별 이유도 없이 힘 약한 애들을 갈구고 괴롭히고 다닌다거나. 금수저 어린이들은 집에 돈 많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대놓고 추앙 받으며 가난한 애들을 무시하고 다닌다거나. 수시로 파티를 열어 이런 거(?) 저런 거(??) 마구 하고 논다든가. 정말로 그런 게 일반적인 풍경이라면 거의 동물의 왕국 수준인데요. 차라리 한국 고딩들 삶이 나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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