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호정, 대리롤, 공정

2020.04.29 12:52

Sonny 조회 수:159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910042017005


이런 경우도 있다. ‘조국 논란’에 분노하여 촛불집회를 진행하는 고려대 집회 집행부에 분교인 ‘세종캠’ 학생이 1명 참여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논쟁으로 번졌다. 격론 끝에 ‘민주적인’ 투표로 해당 학생은 오픈채팅방에서 퇴출당했다. 화르르 타오르던 불공정한 계급 세습을 향한 분노가 ‘학벌 계급’ 앞에서 허무하게 꺼져버린 것이다. 이들에게 공정이란 과연 무엇일까?

배신을 일삼는 조폭들이 유난히 의리를 강조하거나, 사랑과 정의를 말하는 교회가 혐오와 불의의 공간이 된 것처럼 누군가 혹은 어느 집단이 특정한 단어를 자주 부르짖는다면, 도리어 그것의 결핍을 의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마치 시대정신인 것처럼 곳곳에 덕지덕지 난무하는 ‘공정’이라는 가치도, 분열된 ‘개혁’도, 광화문광장을 점령한 ‘자유 민주주의’도 결핍의 징후일 수 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 사회에는 이런 개념들이 부족하기보다는 애초에 그게 무엇인지 배울 기회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각자의 정의를 칼처럼 휘두르며 치킨 게임을 하는 것이다. 이 게임은 언제 끝나며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ㅇㅇ제 의도가 댓글로는 정확히 전달되지 않는 것 같아서 글을 새로 팠습니다. 일단 전제로 할 것은, 저는 어느 당의 무슨 후보가 대리롤 논란에 휩싸이든 거기에 큰 가치를 두지 않을 거라는 겁니다. 국가혁명배금당의 허경영이 대리롤을 했든, 미통당의 이준석이 대리롤을 했든, 더민주의 오영환이 대리롤을 했든, 저한테는 그 논란은 그리 유효한 비판점이 아닙니다. 대리롤 논란은 공직자로서의 결격사유를 이야기할 때 굳이 의제로 삼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영논리에 따라 사안의 경중을 바꾸냐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저는 다소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을 해야겠네요. 저는 류호정이라는 정치인에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그의 당적과 성별에는 작은 관심이 있지만요. 

경쟁규칙, 계급주의의 공고 등으로 사회가 미리 정해놓은 규칙점을 공고히 하는 것에 제가 알러지를 보인다고 하시는데, 저는 의외로 계급주의적인 면이 있고 규칙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제가 알러지를 보이는 것은 규칙이 아니라 규칙이 상정한 벌칙 혹은 보상의 차등을 더 심화시키려는 계급주의의 폭력이죠. 계급은 사실 규칙이 아닙니다. 규칙을 사회적 티피오에 맞는 금기사항과 처벌의 모음집이라고 볼 때, 그것은 예외적 상황을 제외하고는 모두에게 평등해야 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계급은 그 평등을 무력화시키는 상한선과 하한선의 접점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할 수 있지만 그는 할 수 없어야 하는 것. 계급은 어쩔 수 없이 존재하고 계급에 따른 보상의 차이도 당연히 뒤따르겠지만, 요즘의 계급주의는 이제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모 님께서 말씀하신 "규칙"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에서 저는 공포를 느낍니다. 류호정 대리롤 논란도 그에 따른 대중의 진보 알러지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구요.

예시를 들자면 이런 겁니다. 군대는 한국에서 가장 보편적인 계급사회입니다. 군인으로서 져야 할 보편적 책임과 의무는 동등합니다. 그 안에서 계급에 따른 세세한 차이가 있을 뿐이죠. 그러나 군대에서 계급을 각인시키는 방법은 군내부조리라고 불리는 아주 쓰잘데기 없고 시시한 것들입니다. 상병 이상 되어야 밥먹을 때 젓가락을 쓸 수 있다거나, 일병 때부터 싸제 샤워용품을 쓸 수 있다거나, 병장들만 깔깔이를 입고 내무실 바깥을 돌아다닐 수 있다거나 하는 것들. 아무 의미없는 자유의 제한이 계급의 확실한 지표가 되고 가장 큰 질서가 됩니다. 이러한 계급주의는 군대를 벗어나면 말도 안되는 또라이 짓이었다면서 농담거리가 되었지만(사실은 농담거리가 아니지만 이 문제를 군내에서 병사들 스스로 개선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요즘에는 아주 많은 영역에서 이러한 계급주의가 더 공고해지고 있다는 걸 느낍니다. 내가 좋은 대학을 나왔으니 나보다 안좋은 대학을 나오면 나보다 돈을 더 벌면 안된다는, 그런 사례 말입니다.

게임이 작은 사회라는 것은 제가 실감하지 못했던 부분입니다. 그러나 게임이 작은 사회로 구성되는 수많은 규칙 가운데에서 "등급"만이 국회의원의 결격사유로 대두된다는 것은 조금 이상한 현상입니다. 이를테면 롤을 하면서 누가 욕을 엄청나게 했다고 칩시다. (실제로 류호정 후보를 둘러싼 기사 중에는 '방송 중 5티어 새끼들 XX 라는 욕설 날려...' 라는 기사도 있습니다. 남자 비제이들의 욕설파티를 생각해보면 귀여운 기사죠) 그러나 롤을 하면서 욕을 하는 건 거의 일상적인 일이기에 국회의원을 그만둬야 한다는 말까지는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게임을 하면서 상대에게 마구 쌍욕을 날리는 일은 게임 바깥의 큰 사회에서는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닙니다. 뒤따를 신체적 폭행을 각오하지 않는 이상 얼굴을 맞대고 있는데 사람과 사람이 신발 어쩌구 존 시나 어쩌구 하면서 싸울 일은 별로 없어요. 그러니까 그런 욕설과 패드립의 전쟁은 게임이 가상현실이라는, 어느 정도 비현실적인 감각을 근거로 생기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등급만큼은 현실적인 감각으로 지켜져야 하고 그 질서를 무너트리는 대리롤은 범법행위로 취급받아요. 그리고 공직자로서의 자격을 내려놓아야 하는 도덕적 실패가 됩니다. 저는 이것을 "내가 그렇게 빡세게 게임을 해서 이 등급을 만들었는데 류호정 너는 대리로 이 등급을 받았던 적이 있다고?" 라며 화를 내는 것이 앞서말한 군내부조리와 비슷하다고 여기는 이유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만화책 중에 "홀리랜드"라는 만화책이 있습니다. 고등학생들이 어쩌다가 길거리 싸움에 심취해 자기들끼리 싸움을 하고 그 안에서 우정도 만들고 거대한 적도 만나고 한다는 흔해빠진 청소년 격투 만화인데, 의외로 현실적인 성찰이 많이 나옵니다. 거기서 다소 유약한 심지를 가진 주인공이 자기한테 라이벌 의식을 가진 친구와 진지하게 격투로 맞붙었다가 절교를 당할 상황이 되자 괴로워하며 묻습니다. 나는 친구를 폭력으로 다치게 했는데도 여전히 싸움에 매달리는 이유가 뭘까. 거기에 레슬링을 하는 캐릭터가 이렇게 답하죠. 너넨 고지식해서 그렇게 맞붙었지만, 우리가 아무리 그렇게 서로 치고 박고 다쳐도 결국 이건 우리 나이대에만 가능한 "놀이"라고. 그가 "놀이"를 정의하는 근거는 이렇습니다. 우리의 싸움이 아무리 진지하다해도 생활이나 사회를 책임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피터지게 싸우는데 그에 따른 충격이나 열패감이 없을 리가 없죠. 그런데도 그는 싸움을 놀이로 여깁니다. 저는 여기에 동의해요. 롤도 마찬가지로 아무리 진지하고 좁은 세계를 구성한다 해도 그것은 결국 놀이입니다.

http://m.businesspost.co.kr/BP?command=mobile_view&num=173409

https://www.gamemeca.com/view.php?gid=1629271


류호정 의원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서 저는 오히려 모순점을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류호정 의원이 후보시절 대리롤을 했다는 사실을 비판하면서 꺼내든 논리는 류호정이 대리롤을 통해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이익을 거둘 수 있었다는 논지였기 때문이죠. 그래서 류호정 의원의 해명도 거의 다 이런 쪽에 집중되어있습니다. 대학 동아리 회장이나 게임 방송 비제니아 회사 취직 등, 대리를 통해 거둔 실질적 이익은 없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역설적으로 류호정의 대리롤은 게임이 작은 세계이며 그 안에서 대리롤이 심각한 비도덕적 행위라는 것이 아니라, 그 대리롤을 통해서 현실의 "진짜 이익"을 거두었기 때문에 문제라고 비판을 한다는 것입니다. 대리롤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그것을 비도덕적 행위라 보지 않습니다.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돈과 사회적 지위라는 보상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문제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비판을 한다는 것 자체가 게이머들조차도 게임을 또 다른 리얼리티로 충분히 보지 못한다는 반증입니다. 대리롤이 왜 나빠? 라고 물으면 게임을 직접 해서 게임계의 등급을 올려야 하는데 그 생태계 시스템을 흐리는 것이 얼마나 나쁜지를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그걸로 비제이도 하고 게임회사 취직까지 했으니 나쁘다고 합니다. 결국 대리롤은 리얼 월드의 규칙위반 가능성을 암시하는 "그들만의 시그널"입니다. 왜 나쁘냐고 물을 때 그것이 얼마나 불공정한지 설명하기 위해서는 후보가 취한 적 없는 부당이익을 이야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작은 세계는 그 자체로 윤리를 증명하지 못하고 바깥세계와의 연결고리를 통해서만 비판의 논리가 성립합니다.

그렇다면 게이머들의 분노는 게임이 또 다른 리얼리티가 아니라 아무리 버츄얼 리얼리티라 해도 침범받을 수 없는 가치가 있다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대리롤이 그렇게 비판받는 이유는 바로 "등급"에 있는데, 이것은 개인의 노력과 경쟁을 통해 얻어낸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현재의 공정 판타지가 게임에 확장된 것처럼 보입니다. 제가 여기서 공정을 하나의 윤리가 아니라 "판타지"라고 쓰는 이유는 경쟁의 균등한 보상이 핵심이 아니라 경쟁의 보상에 따른 계급의 차등과 지배가 핵심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대한 정규직들의 반발, 수시 입학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정시 입학, 지역 캠퍼스에 대한 서울 캠퍼스의 자부심과 멸시 등 "네가 감히"라는 정서가 공정 판타지입니다. 이 정서가 과연 정의로움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지 저는 회의적입니다. 군대 내에서 상명하복이 아무리 중요한 질서라 해도 너는 샤워타월을 못쓰고 내무실에서 누워있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차등에 의한 공정이 아니라 억압일 수 밖에 없듯이요.

류호정의 대리롤 논란이 과연 사회정의의 회복과 유지를 위한 계기가 될 수 있는가. 저는 이것이 정치적 의도를 배제한 생각이 아닌지 반문하게 됩니다. 그 어떤 정치적 공격도 자신만의 도덕적 명분을 갖추고 있습니다. 맨 위의 칼럼에서 인용된 사례도 그렇습니다. 저는 조국이 굉장히 불공정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불공정을 비판하면서 자신들만의 공정으로 같은 학교 다른 캠퍼스 출신을 배제할 때, 이것을 공정함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가치관의 부재가 지나치게 비판받을 때, 그리고 그 가치관이 약자배제적인 양상을 나타낼 때 저는 이것이 결국 강자를 위한 질서는 아닌지 의심하게 됩니다. 어떤 도덕이 정치로 남용될 때 그 도덕은 내적 일관성을 잃고 타겟을 제거하는 데에만 집중됩니다. 저는 류호정의 대리롤 논란이 그런 양상을 띄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 정치성에도 불구하고 개개인이 논란을 계기삼아 내면을 갈고 닦는 것을 저는 틀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만큼 정치적 공격의 순수성을 위장하는 데 보탬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개인의 순수한 선택이 항상 탈정치적이게 된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과거의 메갈리아를 보면서 욕설은 나쁘고 성별혐오는 나쁘구나, 라고 교훈을 얻는 것이야 개인의 해석 자유지만 그것을 사건의 전체로 두고 판단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듯이요. 저는 게이머들이 류호정을 보면서 대리롤을 안해야겠다고 하는 것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게임이라는 작은 세계, 혹은 게임이 포함된 세계 전체의 질서라는 대의명분을 가지고 이야기할 때에는 조금 더 의심을 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모두 알고 있지 않나요. 진보 알러지가 어떤 것이고 유난히 꼴보기 싫은 누군가를 흠잡을 때 어떤 도덕은 굉장히 강력해진다는 것을.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5237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796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2293
123191 [넷플릭스] 택배기사, 2회까지 본 소감은.... [6] S.S.S. 2023.05.13 629
123190 러브 미 이프 유 데어 (2003) catgotmy 2023.05.13 184
123189 프레임드 #428 [4] Lunagazer 2023.05.13 98
123188 나겔스만이 토트넘 감독 후보에서 아웃/감독 찾기 47일 [3] daviddain 2023.05.13 153
123187 [웨이브바낭] 저렴한 장르물 셋, '마더 앤 머더', '프레이: 인간사냥', '극장판 카케구루이3' 잡담 [2] 로이배티 2023.05.13 290
123186 참 이상하고 신기한 태국정치 [2] soboo 2023.05.13 542
123185 오셀로를 읽었습니다 [6] Sonny 2023.05.12 274
123184 주말에 읽을 책. [2] thoma 2023.05.12 265
123183 프레임드 #427 [5] Lunagazer 2023.05.12 105
123182 남호연 개그맨이 뜨나봅니다 [1] catgotmy 2023.05.12 510
123181 녹수가 길동이 한테 [2] 가끔영화 2023.05.12 184
123180 검사와 피의자 [1] 왜냐하면 2023.05.12 239
123179 [웨이브바낭] 그래서 HBO 시리즈 버전 '이마 베프'도 봤습니다 [10] 로이배티 2023.05.11 464
123178 '면도날', 애플티비+'유진 레비 여행 혐오자 -' [2] thoma 2023.05.11 303
123177 외로움에 대해 [3] catgotmy 2023.05.11 303
123176 재미로 해보는 여러분의 플래이 리스트는? [7] Kaffesaurus 2023.05.11 394
123175 프레임드 #426 [4] Lunagazer 2023.05.11 107
123174 넷플릭스 신작 비프 추천(온전히 이해받는 것에 대해) [6] 가봄 2023.05.11 534
123173 술 한잔 안마시고도 필름이 끊기는 신기한(아님) 무서운 경험말고 하늘 사진들 [12] soboo 2023.05.11 564
123172 바티칸 엑소시스트를 보고 [2] 라인하르트012 2023.05.10 309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