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추행 사건이 일어나면 쉴드 중 하나로 꼭 등장하는 썰이 꽃에 나비와 벌이 찾아오듯, 남자가 여자를 만지고 싶은 것이 자연의 섭리이고, 이 자연의 섭리가 없으면 인류는 망한다는(...) 이야기죠. 그냥 헛웃음만 나옵니다. 무식해서 용감하다는 점에서는 퀴어페스티벌 반대하는 개신교 신자들이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인형에 맞춰 발레를 춘 장면과 궤를 같이 합니다만.


1. 꽃은 여성이 아닙니다.

암꽃과 수꽃이 있는 종류도 있고 꽃 속에 암술, 수술이 같이 있는 종류도 있고, 암그루와 수그루가 따로 있는 종류도 있죠. 


2. 벌과 나비는 남성이 아닙니다.

나비는 암컷, 수컷이 다 있고.. 결정적으로 꿀 모으러 다니는 벌은 전부 암컷입니다.


3. 나비와 벌이 있어야만 수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풍매화도 있고.. 또 타가수분이 안 되면 그냥 자가수분하는 꽃들이 많죠.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교훈도 없고 식상하고 상투적이고 게다가 사실관계도 안 맞고.. 대체 저런 비유는 왜 죽지도 않고 또 오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갑자기 이 생각을 떠올린 것은 무화과 때문이에요. 무화가를 먹다가 '아니, 얘네는 대체 어떻게 생식을 하는 거지?'라는 의문이 생겼죠. 꽃들이 밖으로 안 보이고 밀폐되어 안에 숨어버리니까 무화과라고 부르는 건데, 그럼 늘상 자가수분 중에서도 자화수분만 가능하다는? 대대손손 유전자가 동일하게 유지되는 것인가? 늬들 이럴 거면 왜 유성생식하는 꽃으로 진화한 거니? 아아. 그래서 찾아봤더니 엄청난 과정이 숨어있지 뭐예요.


무화과는 무화과말벌이라는 작은 말벌이 꽃가루를 날라줍니다. 암컷 말벌이 자기 몸 속에는 정자를, 자기 몸 밖에는 무화과 꽃가루를 지닌 상태로 어린 무화과열매의 작은 입구로 기어들어가요. 무화과말벌에게만 특화된 좁은 입구라서 다른 곤충들은 못 들어오고, 암컷 말벌도 들어가면서 날개와 더듬이가 다 뜯겨가며 겨우 들어갑니다. 들어가서 꽃봉오리마다 알을 까놓고 그 안에서 곧 죽습니다. 수컷말벌은 알에서 일찍 깨어나서 암컷 말벌들을 수정시키러 돌아다닙니다. 수컷 말벌들은 평생 무화과 밖으로 나갈 일이 없기 때문에 날개도 없고 교미 말고는 다른 기능이 없으므로 C자처럼 생겼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화과 밖으로 나가는 길을 뚫어놓고 죽습니다. 암컷 말벌은 무화과의 꽃가루가 성숙할 때쯤 다 자라서 나오면서 몸에 꽃가루를 묻히고 수컷들이 뚫어놓은 구멍을 통해 밖으로 나가서 다시 다른 무화과로 알을 낳으러 날아갑니다.


말벌이 무화과의 유전적 다양성을 책임지는 것이었습니다! 여기까지 파악하고 나니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말벌이 무화과 안에서 죽으면 우리가 무화과 먹을 때 모르고 말벌도 먹는 거야?

-저 암컷 말벌과 수컷 말벌들은 다 형제자매 아니야? 말벌이야말로 밀폐된 무화과 속에서 대대손손 유전자 풀이 변하지 않는 것인가?

-내가 먹는 무화과에는 구멍이 없었는데?

-수꽃이 열매(??)가 있어?


일단 우리가 시중에서 사먹는 common fig은 저 과정이 이루어지지 않는 (수정이 필요없는) 단위결실이라서 (달걀로 치면 무정란) 말벌이 전혀 없습니다. 한국에는 무화과말벌이 아예 없다고 하네요. 수정된 무화과가 더 맛있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상업적으로 말벌과 숫나무를 도입했는데, 이 경우에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무화과에서 피신이라는 효소를 분비해서 말벌을 전부 분해해서 흡수하기 때문이죠. 무화과 많이 먹으면 입이 아린 것도 이 소화효소 때문.. 무화과 먹다가 말벌 사체를 보게 될 일은 없다고 합니다.


암컷 수컷 말벌들은 형제자매들이 맞고 유전자 풀이 바뀌지 않은 상태로 세대를 반복하는 것이 맞다고 합니다. (한 무화과에 여러 암컷이 기어들어간 경우는 유전자 풀이 넓어지겠지만 이런 일이 얼마나 일어나는지는 모르겠어요.) 무화과는 말벌 덕에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했지만, 정작 말벌은 그걸 포기한 것이네요. 공생은 맞는데, 또 미묘한 긴장관계이기도 합니다. 무화과 수꽃과 암꽃은 겉으로 보기엔 똑같아요. 복불복으로 말벌이 수꽃에 들어가야 자기 알들을 낳아서 번식에 성공할 수 있고, 암꽃에 들어가면 번식 실패. 무화과 입장에서는 꽃가루 묻힌 말벌이 암꽃에 들어와야 꽃가루받이가 되고, 수꽃에 들어오면 남 좋은 일만 시켜주는 것. 너의 성공은 곧 나의 실패인 관계죠.


수꽃과 암꽃이 똑같이 생겼고 수꽃도 열매가 생기는 이유는 사실 그게 열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과육(열매)처럼 보이는 부분이 꽃받침이기 때문에 수꽃도 열매를 맺는 것처럼 보이죠. 


무화과는 보존성이 매우 낮기 때문에 아주 맛있는 잘 익은 무화과는 산지에서만 먹을 수 있고, 특히 맛난 품종은 가는 동안 상해서 멀리서 파는 것이 어렵다고 합니다. 시장에서 사먹는 무화과도 맛있게 잘 먹었는데 그보다 훨씬 맛있는 무화가가 있었을 줄이야!! 나무에게 잘 익은 무화과는 얼마나 맛있는 걸까요?  '맛난 무화과를 산지에서 먹어보기'를 버킷 리스트에 넣었습니다.


덧. 기생충 스포 피해다니고 있는데 과연 극장에서 볼 수 있으려나 모르겠어요. 제가 있는 지역은 거의 전부 이 지역 말로 더빙(!!!!!)된 버전만 상영해요. 한국 배우들이 입을 달싹거릴 때마다 생경한 목소리로 생경한 언어가 울려퍼지는 것이죠. 아놔.. 제발 자막판 한 번만이라도 상영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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