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학 시절 남들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를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조제, 호랑이, 물고기들>이 그렇게 유명하지 않았던 시절이고 이야기할 거리도 많아서 의기양양하게 이 영화를 소개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전 분명 그렇게 말했어요. 이 영화는 하반신 불구인 여자와 일반 남자가 연애하는 이야기지만 장애에 초점을 맞추진 않는 영화라고. 그리고 한동안 그걸 믿어왔습니다. 이 둘의 연애는 그저 사랑의 불공평함에 대한 은유라고. 장애인이 아니더라도 어느 한 쪽은 감정적으로 반드시 다른 한 쪽에게 쏠릴 수 밖에 없다고. 그런 개념으로 이 영화를 이해하려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애인은 보편적 인간의 감정을 비유하는데 쓰여도 괜찮은 존재인가? 육식의 불구는 감정적 의존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는가? 제가 다시 내린 결론은... 이 영화는 제 아무리 모든 연인과 닮았어도 결국은 장애인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 특수성을 인정할 수밖에는 없어요. 그렇지 않으면 장애를 자기 마음대로 활용하는 비열한 영화가 되니까요.

2. 츠네오는 조제를 견딜 수 없어서 도망친 것처럼 보입니다. 애달파하는 마음은 점점 연소되어가고 익숙함뿐인 일종의 간병 생활은 그를 진력나게 했을 겁니다. 그는 카나에에게로 탈출합니다. 그럼에도 츠네오의 구원자 서사는 반복됩니다. 번듯한 정규직 회사원으로서, 한때 자신에게 버림받고 일일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카나에를 동정하는 것이 이 둘의 재회 출발점이니까요. 그는 과연 카나에에게 정착할 수 있을까요. 츠네오가 현실을 견딜 수 없었다는 걸 더 정확한 문장으로 써보면, 그는 자신이 구원할 수 있는 사람만을 찾아 돕는 걸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는 카나에와 헤어지고 나서도 다른 방식의 사랑을 하진 못할 것입니다. 오로지 현실을 배웠다면서 그가 하려했던 구원의 총량을 줄여나갈 뿐일 거에요.

3. 전에 어떤 매체에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이별을 통한 남자의 성숙을 그리는 여성착취적인 드라마라고 비판하는 글이 올라온 적이 있습니다. 츠네오라는 남자가 연애와 결별을 거치며 고통을 가슴에 새기며 성장하는 동안 조제는 츠네오의 인큐베이터로 너무 편리하게 이용된다고요. 저는 아직도 그 의견에 동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조제를 한 인간으로 바라보는 대신 그가 받아야 할 존중의 총량으로 연애라는 불공평한 게임을 해석하는 게 아닌가 싶거든요. (마찬가지로 저는 <봄날은 간다>의 이영애를 나쁜 여자라 욕하는 것에 전혀 동감하지 않습니다) 영화가 츠네오의 시선에서 시작했다는 걸 상기한다면 그가 도로에서 흐느끼는 장면에서 영화는 끝났어야 정상이지만 영화는 이후 조제의 삶을 더 진득하게 보여줍니다. 저는 이것이 "츠네오 너의 비겁한 눈물이나 걱정 따위 없이 고독하고 아무 일 없이 난 산다"는 조제의 독백처럼 들렸습니다.

그럼에도 지금은 조금 의심합니다. 츠네오가 볼 수 없는 조제의 이별 후 삶은 누굴 위안하기 위한 걸까. 그가 별 일 없이 산다는 것에 가장 크게 안도하는 건 누구일까. 호텔에서 사랑을 나눈 후 곯아떨어진 츠네오를 보면서 조제는 혼자 말하죠. 너가 오기 전까지 나는 심해의 외로운 물고기였고 너가 떠나면 다시 아무도 없는 그 외로운 삶을 살거라고. 다 알고 있다고.

전에는 그 고독을 수긍하며 조제가 의연하게 산다고 믿고 싶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삶을 함부로 동정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좀 슬퍼하고 싶어집니다. 부엌 싱크대에서 요리를 마친 뒤 그저 쿵 하고 떨어지면 그만인 것인지. 그 누구의 걱정도 애정도 없이 그렇게 하루에 몇번씩 낙하하는 조제 역시 츠네오 아닌 다른 사람과 사랑하며 살아가도 되는 거 아닌가요. 그런 희망쯤은 품어도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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